# 1-1 공감 능력자 (1)
* * *** 잘 느끼는 그녀 - # 1-1 공감 능력자 (1) * * * * *
- 삐삑삑삑삑 삑삑 삑
화이트와 내추럴 우드 톤으로 꾸며진 주상복합 아파트의 도어록 눌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고 곧이어 두 명의 여자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이 들어오면서 자동으로 켜지는 조명, 그리고 집 전체 창을 덮고 있던 커튼은 자동으로 걷혀 들기 시작했다.
“아 피곤하다. 길고 긴 한 주였어...”
리클라이너 소파의 발받침을 끝까지 끌어올리고 길게 늘어져 있던 수하가 한 마디를 내뱉자 주방 정수기에서 물 한잔을 떠먹던 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야 누가 들으면 네 휴일이 내일부터인 줄 알겠어? 넌 내일부터 더 바쁘잖아?”
“야 무당 점집이 법정공휴일에 쉬면 손해가 얼마나 막심한데. 그래도 난 남들 출근하기 싫어 죽는 월요일에 쉬니까 더 좋아.”
다시 ‘피식’하고 터진 서연의 미소를 본척만척 하며 수하가 제 집 냉장고를 열 듯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 ‘뭐 먹을 게 있나~’ 하며 먹을 만한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연은 수하가 그러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아하며 씻기 위해 안방 욕실로 사라졌다. 수하는 서연이 씻는 동안 냉장고에서 식재료 이것저것을 꺼내 두 사람 몫의 저녁식사를 간단히 차렸다. 두 사람이 마주 앉는 시간은 거의 매일 이렇게 퇴근 후 서연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며 시작된다. 그러다가 식후주로 간단하게 맥주나 와인 한 잔으로 이어지는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지만. 제 아무리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서연이라 할지라도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그녀에게 수하는 정신과 환자들에게 정신과 전문의인 자신과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존재였다.
“오늘 힘들었구나? 아니 오늘이 아니라 이번 주 전반적으로 다 힘들었네.”
“온전히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서 느끼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인데 그게 업이니 어쩌겠어. 근데 유난히 이번 주는 민감하게 느껴지는 환자들이 많은 편이어서 조금 더 지치네.”
서연의 정신과 병원이 특별히 홍보를 하지 않음에도, 최소 3주의 예약이 가득 차 있는 것은 그녀가 엠패스(Empath : 공감 능력자)이기 때문이었다. 환자에 따라 느껴지는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문진하며 환자가 느끼는 감정과 아픔이 그녀의 몸으로 느껴진다. 많이 느껴지면 환자가 느끼는 감정의 70% 이상, 적어도 40%의 감정이 그대로 전이된다. 때때로는 환자가 느끼는 몸의 통증까지도 그녀의 몸에 그대로 발현되곤 했다. 그렇다 보니 그녀의 약물 처방이 잘 맞아떨어질 확률도 높고, 스타일이 잘 맞는, 즉 그녀와 감정 동기화가 잘 되는 환자라면 병원을 바꾸지 않고 꾸준히 그녀를 찾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타일이 잘 맞지 않는, 정확히는 그녀의 감정 공유력이 부담스럽거나 감정 공유율이 평균 이하를 밑도는 환자의 경우 그녀의 병원에 한 번 방문 후 재방문을 하지 않았다. 공유치가 낮은 환자들은 '아 이 선생님이 나와 스타일이 맞지 않나 보다'라고 생각하지만 곤란한 것은 그녀의 능력을 부담스러워하는 환자들이 방문 후 그녀의 병원에 대해 평점 테러를 하는 문제. 그것만 없다면 서연의 개업의 생활은 거의 탄탄대로나 다름없었다.
물론 지금이 있기까지 서연 그녀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환자의 아픔과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 소모도 많이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상담을 하는 상담사로서 내담자의 눈물에 같이 눈물짓는 것은 의사가 취해야 할 행동이 아니었으므로. 남의 감정을 느낀다 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일, 그리고 타인의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되도록 티 내지 않는 일에 부단히 노력을 해왔다. 즉 감정 동기화를 조절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고나 할까? 서연은 전문의 자격증을 따기 전까지 나름대로 그 단점을 스스로 극복하려 애썼고, 그 때문에 2년간의 의대 휴학도 불가피하게 선택하고 수하와 외국으로 긴 여행을 떠나기도 했었다.
“주말에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너도 내가 주말에 자면서 스트레스 푸는 거 잘 알잖아?”
“오늘은 몇 시간이나 주무시려고요 아가씨. 한 열다섯 시간은 잘 거니?”
냅다 돌아오는 수하의 타박에 어이가 없다는 듯 서연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점집 무당집을 평일에 찾지 못한 사람들이 주말이면 몰려들어 수하에게 제일 바쁜 시기였다. 정치인이며 재벌 가문 사람들이 오가는 신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그 명성에 못잖게 젊은 층에게는 점바치 중에 용하기로 소문난 무당이었다. 특히나 연애 문제 상담에 있어서 탁월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오늘도 남녀상열지사로 고민이 많은 청춘남녀들의 두 달 치 예약이 풀타임으로 채워져 있었다. 오늘도 연애 문제로 속을 끓이는 어린양이 신당을 찾아와 그녀 앞에 앉아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티슈로 찍어내며 하소연 중이었다.
“그래서 보살님, 제가 어떡하면 그 남자를 잡을 수 있을까요? 저 하라는 건 다 할 수 있어요. 부적도 쓸 수 있고, 아... 비방!! 비방도 쓰라면 쓸 수 있고요!! 굿도요!!! 뭐든 할 테니 그 사람이 돌아올 수만 있게 해 주세요...”
애처롭게 두 손을 모아 맞잡은 손님이 불쌍은 하지만, 몸주신의 능력으로 뻔히 보이는 걸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수하는 연신 부채질만 해 댔다. 좋은 소리 못 해줄 때면 나오는 습관이었다.
“아니, 깨진 그릇은 다시 갖다 붙여도 깨진 그릇이야. 그만하면 됐어. 그릇 깨진 거 접착제 발라서 다시 붙인다고 새 그릇 되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물 담으면 깨진 틈새로 물 새.”
“그 남자가 제 순정을 가져간 첫 남자란 말이에요... 사랑한다고 했단 말이에요... 40대가 되어 20대처럼 심장 뛰는 사랑을 만난 건 자기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두 달이 채 안 돼서 그런 사랑이 변할 수가 있어요? 정말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흑... 엉엉엉...”
조금이라도 희망차고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던 내담자는 수하의 호통에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수하는 속으로 끌끌 혀를 차며 옆에 둔 서연의 병원 명함을 하나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자기야, 이름이 뭐랬지? 아 김미영 씨. 일단 자기는 예쁘고 몸매도 좋고 정말 자기 나이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동안이고 자기 커리어도 탄탄하잖아. 그런 남자 붙잡아 봤자 그 남자가 자기 기운을 빼 간다? 남자가 경인 일주라서, 칼 맞은 호랑이의 팔자야. 칼 맞은 호랑이는 칼 맞고 피 흘리며 화딱지가 있는 대로 나 있는데 나무라던가, 큰 바위라던가, 뭔가를 보면 어떻게 하겠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냐. 신경질을 풀기 위해 호랑이 발톱으로 할퀴고, 이빨로 뭐든 물어뜯는 거지. 자기 그 남자 만나는 동안 몸이 계속 아팠댔지? 자기랑 그 남자... 이름 뭐랬더라? 조명현? 조준록? 하여튼 그 놈은 그런 존재였던 거야. 그러니 일단 내가 주는 명함 요기 있지? 바로 옆 동 같은 층 같은 호수야. 가서 수면장애랑 심리 상담받고, 자기 몸부터 추슬러 보자. 그렇게 또 마음과 몸을 새롭게 해야 새로운 인연이 들어오지. 거기 다니면서 좀 괜찮아지고 나서 새로운 인연 들어오면 다시 와. 그땐 처음부터 상성이 맞는지부터 보고 시작해보자. 응?”
겨우 통곡을 멈추고 눈물을 훌쩍이며 연 정신과 명함을 꼬옥 쥐고 신당을 나가는 내담자의 모습을 보며 수하는 혀를 쯧쯧 찼다.
“정신과나 무당집이나 진짜 찾아와야 할 것들은 안 찾아오고... 그런 것들 때문에 상처 받은 영혼들이 저한테 문제 있나 싶어 찾아오니... 어휴 쯧쯧... 어쩌다 저 애는 이 여자 집적, 저 여자 집적 하는 껄떡쇠한테 걸려 지 기 다 빨아 먹히고, 딴 여자 생겨 되지도 않는 핑계 만들어 헤어지려는 남자를 잡아보겠다고 여길 오네. 덕분에 우리 할머니랑 나랑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주는 방법도 모르고 받는 방법도 모르는 남자랑 더 만나봤자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니. 그냥, 자리가 비었으니 제 몸 하나, 제 영혼 하나 잘 다스리면 또 좋은 인연 들어올 준비가 되겠지. 그때는 그냥 처음부터 상처 받지 말게 그때 점사나 잘 봐줘야겠구나...”
내담자를 위해 신령님께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 수하의 신당엔 영업 시작 전에 피워둔 향 연기와 신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담배 연기가 함께 엉겨 붙기 시작했다. 제발 이따위 밥벌이 하지 않아도 되니 사람들의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면, 아프더라도 정말 쓸데없는 일에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수하의 마음이 가득 담긴 기도 또한 신당 안에 고여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