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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슈타트, 하이든 당신이 없었다면...

오로지 하이든을 찾아 떠난 길

by 류인하

때는 2024년 6월 1일, 빈에서 머문 지 11일 차 되던 날. 이른 아침부터 칼스 플라츠에 위치한 숙소에서 서둘러 나와 출근하는 빈 시민들 속에 섞여 이동을 시작했다. 아이젠슈타트에 위치한 하이든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실 이 여정은 내가 8년 전에 뿌려둔 씨앗이었다.


하이든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든 생각은 무척 닮고 싶은 음악가라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실력과 인성 모두 인정받으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잡다한 구설에 오르지 않으며 무리하게 욕심을 내지 않고 정도를 알았던 사람인 점은 진정으로 닮고 싶은 모습입니다. 언제 떠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떠날 독일-오스트리아 여행에 하이든이 잠든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테르하지 궁전의 묘소에 꽃 몇 송이 놓고 올 수 있길 바라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에게 존경의 의미로 한 송이, 닮고 싶은 삶을 살다가 간 인생의 대 선배로서 한 송이, 이렇게 적어도 두 송이는 놓고 와야겠죠?

- 『이지 클래식』 (류인하, 2016)


어떤 이는 “책에 썼다고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지 않나?”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저 파트를 쓸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생각을 문장으로 적은 것이었고, 8년 내내 저 문장들을 내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언젠가 취재와 공부를 위해 빈을 다시 찾게 된다면, 꼭 중앙묘지와 아이젠슈타트를 찾아 음악가들 묘소를 참배하리라.’


팟캐스트를 제작하고, 클래식 음악사와 함께 나이를 먹은 지 10년이 지나면서 여러 음악가의 삶을 톺아봤지만 하이든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일 수밖에 없었다.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해 역사에 길이 남은 인물이니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일한 사람들 모두 그를 ‘파파’라 부르며 존경한 인물. 그리고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는 인성. 성실함과 꾸준함, 그리고 겸손함까지. (결혼을 할지 안 할지 모르지만,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낳을지 낳지 않을지, 낳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만약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게 되어, 태어난 아이가 아들이라면 아이 이름을 하이든에서 따와 ‘이든(利敦, Eden)’이라고 짓겠다 마음먹을 정도로 그를 존경했고 흠모했다. 훗날의 참배를 기약하는 말을 책에 쓸 때도 빈 말은 아니었지만, 8년이나 숙성된 염원은 이른 아침부터 나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하이든 보러 아이젠슈타트 간다.’ 말이 쉽지, 렌터카를 빌려 운전하지 않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아이젠슈타트라는 소도시가 한국인 여행객들의 관심 대상은 아닌지라 한 번에 가는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구글에서 영문으로 Raddit에 들어가서 찾고(그때만 하더라도 구글 검색에 AI기능이 없었다... 지금은 검색하면 바로 나온다...^_T), 구글맵 검색을 여러 차례 돌리고 나서야 빈 하우프트반호프(비엔나 중앙역)에서 버스를 타면, 기점인 빈 하우프트반호프에서 락센부르크와 뮌첸도르프를 지나 종점인 아이젠슈타트까지 한 시간 반 만에 바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평일 기준) 거의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있는 버스라는 사실도...


어찌 가는 방법까지는 알았는데, 버스 티켓을 살 곳을 못 찾아 난관에 다시 부딪혔다. 스냅사진 촬영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 사진작가 미리에게도 물어봤지만 ‘중앙역 사무실의 역무원에게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정도의 정보만 얻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다음 빈 방문 때로 미루고 그땐 차량 렌트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기가 생겼다. 결국 혼자서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오스트리아 연방 철도 ÖBB앱에서 버스 티켓을 살 수 있었다.


중앙역 맥도널드 오른쪽에 보면 굴다리 같은 게 있는데 거기 버스가 많이 선다. 정류장이 여러 개니 잘 보고 타야... (구글맵 스트리트뷰 캡처)
혹시나 빈 외곽으로 대중교통 타고 갈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서 그때 사진 첨부해 봄...


아침 일찍 움직여서 버스 타는 곳까지 왔는데, 버스가 없어서 1차 당황. 여기가 맞는지 물어볼 데도 없어서 2차 당황...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니 오스트리안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버스를 타러 오셨길래 물어봤다. ‘아이젠슈타트 가는 버스 여기서 타면 되냐.’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한테 묻기도 했다... 나 현지인 아닌데요...? ^_^;) 그리고 딱 정각이 되어서야 버스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더라. 나는 버스 기사에게 ÖBB앱에서 티켓을 보여주고 제일 빠른 속도로 바로 승차. 미리 티켓 끊어오신 할머님들은 티켓 보여주고 승차, 티켓 없는 사람들은 기사에게 현금을 주고 영수증 받고 승차(근데 영수증 뽑아주는 프린터 고장 나서 시간이 지체됨)...


걱정한 것 치고는 여정은 수월한 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걱정했기 때문에 수월했을 거다. 미리 알아보고 표를 사두지 않았다면 현장에서 의사소통하고 돈 주고 버스표 끊고... 생각만으로도 절레절레 고개가 흔들린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승객들을 모두 태우자마자, 버스는 출발했다. 그리고 점점 남동쪽으로...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시씨 황후의 신혼 거주지였다는 락센부르크도 지나고, 고즈넉하던 뮌첸도르프도 지나... 한 시간 반 만에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테르하지 성 앞에 도착했다.


에스테르하지 궁전과 내부의 하이든 홀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하이든의 첫 번째 주인)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하이든의 두 번째 주인)


€15.20의 입장료를 내고, 에스테르하지 궁전 내부를 둘러봤다.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하이든의 주군이었던 에스테르하지 공작가 사람들의 초상화와 그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성 내부에 있는 커다란 콘서트홀이었다. 하이든이 살아생전 활동했을, 성 내의 콘서트홀. 지금은 그의 이름을 따 ‘하이든 홀’이라 개칭된 곳. 때마침 몇 시간 뒤 행사가 있을 예정이라 홀에 조명이 다 켜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성 내부를 다 보고 나오니, 며칠 뒤에 사이먼 래틀 경이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방문해 슈베르트 그레이트 교향곡을 연주할 거란 홍보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내면의 소리. ‘까비...’)



그리고 궁전의 오른편에 위치한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 하우스. 하이든이 아이젠슈타트에 머물 때 기거했던 집은 그의 박물관이 되어 나 같은 서양 고전음악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입장료 €6) 하이든이 살아생전 치던 피아노, 하이든이 입었던 옷, 하이든의 초상화, 하이든의 친필 악보, 하이든의, 하이든에 의한, 하이든의 모든 것들. 심지어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하이든과 그의 아내 마리아 안나 켈러의 결혼증서까지 볼 수 있었다.


하이든 하우스에서 가장 좋았던 전시는, 지금 현대 악기의 모습이 되기 전 옛날 악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었는데 신기방기하게 생긴 악기들이 꽤 많았다는 거... 나름 클래식밥 먹은 지(?) 10년 넘었는데도 처음 보는 게 많았다. 특히 허디거디에 소형 파이프 오르간이 결합된 형태의 리라 오르가니자타, 비올라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좀 더 요상한 바리톤 같은 것들?


요즘과 모양이 다르거나, 이젠 쓰지 않는 악기들 신기해!


에스테르하지 궁전 매표소 직원들도, 하이든 하우스 직원들도 다들 젊은 동양 여자 혼자 하이든 순례하러 왔다고 하니 굉장히 친절히 대해줬는데, 편하게 보고 가라고 엄청 배려해 줬다. 특히 방명록 꼭 쓰고 가라고 얘기해 줘서... (얘기 안 해줬대도 쓸 거였지만...ㅋㅋ) 원래 내 미들네임은 이탈리아어에서 응용한 ‘Raphaella’로 쓰는데, 독일어권이니까 독일어 방식으로 ‘Rafaela’라고 썼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글로 쓸 걸 그랬나 싶기도?


하이든 하우스까지 돌아보고 나니 어느덧 점심 무렵이었다. 무척 배가 고팠지만, 힘들게 아이젠슈타트까지 찾아온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이든의 영묘를 참배해야 먼 길을 떠나온 목적을 달성하는 것일 테니... 가는 길에 꽃을 살 곳이 있을까 두리번거렸지만, 그 흔한 슈퍼마켓 체인 Spar나 Billa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베르크 성당.


수많은 음악가의 삶을 돌아보았고, 막연히 그들의 발자취를 좇아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누군가의 묘소를 참배하겠다는 의지를 이토록 강렬하게 가진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위대한 음악가이기도 했지만, 한 인간으로서 훌륭한 인품을 지녔던 하이든이 죽은 이후 편히 쉬지 못하고 골상학(두개골의 크기와 형태로 그 사람의 특성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문)이라는 희한한 사이비 신도들에게 능욕을 당해 두개골과 몸이 분리된 채 145년간 영면에 들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얼마나 화가 나고 안타깝고 속상했는지 모른다. ‘He shouldn't have been treated like that!’을 되뇌며 성당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성당에 들어서자, 관리인이 방문 목적을 물었다. 나는 ‘하이든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관리인은 그를 보기 위해서는 현금 €3의 입장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미 입장료가 있다는 것을 다른 방문객들의 후기로 알고 있었기에, 나는 선뜻 지갑을 꺼내 동전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자 성당 뒤쪽에 있던 육중한 청동문이 열렸다. 오로지 하이든만을 위한, 하이든이 편히 쉴 수 있게 만들어진 그만의 방. 그 누구도 다시 그의 안식을 방해하지 못하게 지키는 검은 창살 안, 대리석관 안에 그가 편히 쉬고 있었다.


그 순간 얼마나 힘들게, 멀리서 여기까지 왔던가. 오로지 하이든의 묘지 참배를 위해 한국에서 빈까지, 빈에서 아이젠슈타트까지 힘겹게 찾아왔던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8년 전 봄, 첫 번째 책인 『이지 클래식』의 하이든 파트를 쓸 때의 마음이 다시 되살아났다. ‘언젠가는 떠날 독일-오스트리아 여행에 하이든이 잠든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테르하지 궁전의 묘소에 꽃 몇 송이 놓고 올 수 있길 바라봅니다.’ 그 한 문장을 쓸 때의 진심을 한 끗도 잃지 않고 8년을 기다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검은 쇠창살을 붙잡고, 그에게 처음 건넨 인사. ‘이제 평안하신가요? 내내 평안하시기를...’



참배를 하고 성당을 나서는데 수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책에 그리 써놨다고 누가 감시를 하는 것도 아닌데, 꾸역꾸역 아이젠슈타트까지 왔고, 하이든 묘소를 참배했다. 난 참 별난 인간이구나.’, ‘물론 그 파트를 쓸 때 진심을 다해 염원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만...’


팬데믹 이후 첫 유럽, 32박 34일간 베를린과 빈을 방문한 목적은 딱 두 가지였다. 취재와 공부. 전공도 하지 않은 서양 고전 음악이라는 분야를 대중들에게 소개하며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10년을 알아가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이 들고,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견문으로 내 세계가 확장되어 또 다른 내 경쟁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떠난 길이었는데 많은 이들이 빈정거렸다. “한 달이나 유럽 여행? 팔자 좋네.”, “한 달이나 여행하려면 돈 많이 들잖아? 너 돈 많나 봐?”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모두 내 재산이고 내 경쟁력이 될 거라서 가는 취재여행이고, 스토리 텔러인 나에게 여행에서 쓰는 돈은 투자라는 얘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고, 이해할 자세조차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꾸역꾸역 아이젠슈타트까지 찾아온 데는 내가 뱉은 말 한마디는 반드시 지킨다는 걸 그런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내 참배는 과연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거였을까?’



고민을 하며 걷고 또 걸어 아이젠슈타트 역에 다다랐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은 기차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소나기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결론을 내렸다. ‘나란 애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만약 하이든을 흠모하지 않았더라면, 빈에 하루 머물며 더 많이 잰 체 할 수도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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