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위해 입주하면서 침대, 소파, 식탁, 냉장고처럼 꼭 필요한 건 구비했지만 급하지 않은 건 미리 사지 않았다. 집에다 인테리어까지 갑자기 큰돈을 지출하려니 심리적으로 위축돼서 일단 정말 필요하면 그때 사자는 생각이었다. 결국 미룬 일은 두 배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꼭 필요한 제습기, 빨랫대, 전신 거울, 서랍장을 하나씩 주문하며 몇 달을 정신없이 보냈다.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미리부터 주문해둔 유일한 가전이 에어프라이어였다. 자취생의 잇템이라며 친구들이 워낙 자랑해서 하나 꼭 장만하고 싶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윙, 시카고 피자, 만두가 에어프라이어에 구워져 나왔다. 에어프라이어에 넣기 전 기름을 뿌리기 위해 분무형 올리브기름을 산 친구도 있었다. 나 역시 혼자 살면 이것저것 다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기름도 뿌려야지, 마음먹고 있었다.
이때는 매일마다 택배박스를 몇 개씩 받았다. 퇴근하면 집 앞에 택배박스를 치우고, 재택하는 날은 탕 소리 -택배 아저씨가 물건을 두고 문 한 번 치고 가는 소리- 만 나면 나가서 선물포장 뜯듯이 박스를 뜯었다. 에어프라이어가 든 박스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빵도 굽고 싶어서 오븐형 23L로 샀는데, 다용도실에 들어가기 좀 버거웠다. 일단 빨래통을 베란다로 빼고 겨우 넣었다.
제일 먼저 시도한 건 통닭구이였다. 새벽배송으로 생닭을 주문해서 네이버 블로그에 제시된 레시피를 따라 닭을 다듬어 에어프라이어에 넣었다. 넣은지 10분이 되지 않아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닭냄새가 집안을 채웠다. 레시피대로 180도에서 40분을 기다리는 동안 냄새가 점점 진해지며 닭기름이 승화하는 냄새가 극에 달했을 때야 꺼낼 수 있었다.
직접 구운 닭을 방금 딴 캔맥주와 함께 먹으면 정말 맛있다. 바삭한 껍질과 뜨겁고 야들야들한 속살이 맘에 들었다. 두꺼운 튀김옷과 과한 양념이 덮인 배달치킨보다 동네에 가끔 와있는 트럭에서 로티세리로 여러 마리 돌아가는 이른바 '한방 통닭'을 더 좋아하는 나에겐 최고의 요리였다. 동물복지로 키운 닭을 3800원에 주문해서 굽자마자 먹을 수 있다니, 자취하길 잘했다!라고 외치며 발을 굴러가며 먹었다.
처음 한 에어프라이어 요리이자 닭요리. 드래프트캔과 먹으니 더 맛있었다.
그다음부터 주말엔 닭을 잡는 게 일상이 되었다. 토요일 새벽배송으로 생닭을 받아 주말 저녁은 닭을 손질했다. 처음엔 다진 마늘과 바질페스토만 발라서 구웠는데, 나중엔 토마토, 감자, 양파, 가지 등의 야채를 함께 익혀 먹었다. 친구가 왔을 땐 더없이 가성비 좋은 요리가 되었지만, 혼자 먹을 때가 더 실했다. 혼자서는 한 마리의 닭에서 일주일치 단백질을 모두 뽑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치밀하게 남김없이 닭을 이용해야 했고, 내 닭요리는 의례처럼 신중한 절차가 되어갔다.
1. 닭을 손질한다.
닭을 손질하기 전 야채는 미리 씻고 손질해둔다. 생닭에 있는 균 때문에 닭을 손질하고 나면 싱크대를 깨끗이 청소해야 하기에 이날 해야 하는 음식 손질을 모두 다 한 뒤에 닭을 씻어야 한다. 까먹고닭을 손질한 싱크대나 도마에서 채소를 다루게되면 그 모든 채소를 닭과 함께 오븐에 넣어버렸다...
이게 귀찮다면 파스타면 끓이는 냄비처럼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여 닭을 넣어서 아주 잠깐만 익힌 후에 빼서 손질해야 한다는데, 끔찍하게 귀찮아서 나는 늘 '아, 제발 안 아프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닭을 조심스럽게 씻고 손질했다. 소주 한 병 분량에 담가 두었다가 꺼내서 후추와 바질페스토, 다진 마늘을 온몸에 발라주었다.
2. 에어프라이어에 닭과 함께 손질해서 썬 야채들을 넣고 180도에서 40분간 익힌다.
감자, 양파, 가지 등 내가 먹고 싶은 야채를 넣으면 스스로의 수분과 닭에서 나온 기름이 더해져 진한 야채수프가 만들어진다. 소시지를 넣었더니 풍미가 더 진해졌다.
에어프라이어 청소가 너무 버거워 오븐용 그릇을 샀다. 중간에 한번 뒤집어 주긴 해도 양쪽 다 바삭하게 구워지진 않는다. 대신 야채를 같이 익힐수 있다.
에어프라이어에서 익혀서 나온 통닭을 잠깐만 식혀 바로 소분하면 1인용 용기 네 개 정도가 나왔다. 두 개는 얼리고 두 개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남은 뼈는 커다란 냄비에 넣고 끓여 육수를 만들었고, 닭 육수에 잠긴 채소들은 작은 냄비로 옮겼다.
닭 육수의 잠긴 채소가 한 끼가 되고, 육수는 보통 만둣국이나 김치찌개를 끓일 때 썼고, 고기는 보통 샌드위치 속으로 넣어 먹었다. 친구랑 먹으면 한 끼에 끝나는 닭 한 마리가, 혼자 먹으면 일주일간 식탁에서 고기 냄새가 떠나지 않게 해주는 것이 신기했다.
치킨은 샌드위치 속으로 먹으면 딱이다. 햄이 더 맛있지만 가성비는 이게 최고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는 살림에 지친 엄마를 위해 주말 저녁엔 치킨을 시켜 셋이 먹었었다. 배달 치킨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닭다리와 몸통 한 덩어리를 밥반찬으로 먹었다. 엄마가 하는 요리에 고기가 많이 들어가진 않다 보니 주말 치킨은 엄마의 휴식이자 보양식 느낌이었다. 그래서, 직접 주문해드리면서도 "나는 치킨 별로"를 얘기하며 두세 조각만 먹었다. 그랬단 내가 이렇게 평생 만져보지 못한 생닭을 매주 만지다니, 마치 독립한 후 나는 아예 다른 사람인 듯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매주 닭을 잡는 일이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주말 저녁을 늘 닭에 바치는 게 괴로워졌다. 독립한 친구들은 주말이면 다 살림에 허덕인다. 1시간 30분 후면 빨래를 꺼내서 건조기에 넣고 2시간 후 다시 꺼내서 접어야 하니 친구가 내 집에 놀러 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 먼저였고, 한 번 놀러 와 주면 다음엔 내가 놀러 가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생닭을 잡느라 가질 못했다. 3,800원 닭 한 마리로 일주일의 단백질을 뽑아낸다며 뿜어내던 자부심도 시들시들해지자, 바로 닭 주문을 멈췄다.
생닭을 씻어서 소주에 담갔다 양념을 발라 구워서 뼈를 발라 육수를 내고 고기를 소분하지 않는 주말은 평화로웠다. 요리가 빠진 것은 아니지만, 의무감이 사라지자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시 다른 친구들처럼 가볍게 냉동피자를 에어프라이어에 넣어보았다. 물론 피자는 에어프라이어가 없던 시절 하던 대로 프라이팬에 올려 뚜껑을 덮고 약불 3분, 뜸 2분 후에 꺼내 먹는 게 더 맛있길래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더워진 여름엔, 은색 화분이라도 된 양 그 자리에 정물처럼 놓여있는 에어프라이어의 먼지라도 닦아줘야 하나 싶다. 지금은 어떻게 그렇게 닭을 매주 잡았지, 의아하다.
두 달 정도 10번 가까이 이어졌던 주말 행사 생닭잡기는 갑자기 혼자 살게 된 시점의 긴장과 의욕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다. 집들이로몰려오던 친구들을 부담 없이 맞이하고, 갑자기 세끼를 모두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일상에 적응해가면서 벌인 이벤트 같이 후딱 지나갔다. 에어프라이어가 뿜어내는 열기가 부담스럽지 않은 계절이 오더라도 다시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을 찾게 된다면, 다시 뚝딱뚝딱 생닭을 씻고 기름을 척척 발라낼지도 모른다. 맛있고 가성비 좋은 요리로 배달 치킨엔 댈 수 없는 푸짐함이 있다. 더 이상 날 위해 닭을 잡진 않지만 파티를 위해서라면 생닭 한 번 만지는 건 어렵지 않으니, 기승하는 코로나가 얼른 잠잠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