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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H Sep 26. 2022

01. 39년짜리 장벽

싸우는데 싸우는 건 아니에요.

내가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우리 집에 전화를 하면 하는 말들이 있었다.


"너 할아버지랑 같이 살아?"

"방금 전화 바꿔주신 분이 너희 할아버지이셔?"


아빠는 50년생

나는 89년생


나는 아빠가 불혹(不惑) 일 때 태어났고, 내가 11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아빠는 반백살 지천명(知天命)이었다. 그리고 내가 22살이 됐을 때는 육십갑자를 다 돈 환갑(還甲)이었다.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평균 수명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성대한 환갑잔치를 열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환갑 파티로 호들갑 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언니와 나는 주변 또래 친구들보다 이른 나이에 아빠의 환갑을 맞이하게 됐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 지인들을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생의 자금사정으로는 조촐한 환갑 파티조차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던 용돈을 긁어모아 이틀에 걸쳐 차린 조촐한 생일상으로 유야무야 지나갈 수 있었다.


요즘에는 늦게 결혼하거나 난임 등의 이유로 마흔 넘어서 애를 낳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39살 나이차이는 흔한 일이 됐다.


나도 계란 한 판 나이를 넘긴 지 오래고, 그동안 꾸준하게 나 스스로를 세뇌시켜 온 부분도 있기 때문에 아빠와 39살 차이 나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됐다.


그런데 그건 나 혼자만 익숙한 거였다.


얼마 전에 알게 된, 나보다 10살 많은 언니의 시어머님이 우리 아빠와 비슷한 연배라는 얘기를 들었다. 더욱 놀라운 건 언니의 남편은 언니보다 연상이다.


그동안 무던해진 나의 생각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내 또래 세대 또는 바로 윗 세대 사람들과 비교해 봤을 때 부모님과 39살 차이 나는 건 굉장히 파격적인 일임이 분명했다.


아빠가 태어난 시대의 사람들은 이십 대 초반에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금 늦게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이십 대 중후반에는 결혼을 하고 서둘러 애를 가졌다.


가끔씩 "뭐 하다가 그렇게 늦게 결혼했어?"라고 물어봐도 아빠는 이 질문에 대해서 제대로 대답을 해준 적이 없다.


첫사랑에 실패해서? 아니면 외모지상주의가 심해서 결혼 상대의 외모를 고르고 고르다가?


지금까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 상태다.


어쨌든 아빠는 남들보다 훨씬 늦게 장가를 간 것도 모자라 마흔에 나를 낳았다. 


뒤늦게 둘째까지 낳아 초등학교 겨우 보내놨는데 아빠 친구 또는 직장 동료 자녀들은 이미 장성해서 결혼을 하겠다며 청첩장을 돌리고 있었다.


난 그제야 학교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아빠는 지금도 나를 면전에 두고 하는 말이 있다.



"엄마는 네 언니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둘째를 낳아야 한다고 했지만 난 둘째까지 낳을 생각은 안 했어."


아빠는 본인 나이가 많았던 것이 자녀 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지만, 자녀를 한 명이라도 낳아봤으니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적상 아빠와 11살 차이가 나는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엄마 욕심에 의해 기어코 나까지 낳았고, 나는 지금까지 나이 차이의 굴레에 속박되어 살고 있다.


누군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가족관계에선 해당이 안 된다.


가족이라 함은 서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사이이기도 하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반토막 이상 잘려나갔기 때문에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표현은 남의 나라 말이나 마찬가지다.


나름 여러 인문·교양서적들로 하여금 가족을 이해해 보려 노력해 봤고, 지금도 때때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빠가 먼저 겪은 39년 세월의 간극은 텍스트로만 이해하고 넘어갈 수는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는 나이만 가지고 따지기보다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가지라고 말한다.


이 말이 완벽하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100% 옳은 말도 아니다.


우리 아빠만 보더라도 여전히 내가 애처럼 느껴지는지 나를 본인 기준에 가둬놓고 과잉보호할 때가 있다. 그런데 어쩔 때는 본인의 입맛에 따라 나를 대가리 다 큰, 늙고 말 많은 딸 취급을 하면서 귀찮아할 때도 있다.


본인은 지금까지 자녀의 인생에 간섭하는 일이 없었고, 자유분방하게 키웠는데 나는 늙은 홀아비한테 간섭도 많이 하고 빡빡하게 군다면서 말이다.


이것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사람은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가 기억하고 있는 유난히 좋았던 일들은 과장하고 미화시켜서 포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빠랑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기억하고 이해했던 것들과 전혀 다른 장르로 떠올리는 모습 때문에 답답해하다가 결국에는 화를 버럭 내버릴 때가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화내는 일이 많아진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빠가 너무도 밉고 싫어서라기보다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착각하고 있는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아빠의 틀린 기억들과 맹렬히 싸우게 된다.


이렇게 기억과 생각의 차이가 생기는 건...


나는 현재 자기 객관화가 철저해지는 나이대에 진입했고, 아빠는 찬란했던 과거의 일만 거듭 강조하는 과거에 묻혀 사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간극은 죽을 때까지 평행하게 가기 때문에 아빠와 나는 철옹성 같은 39살의 장벽을 넘지 못해 매일 으르렁 거리며 산다.


익숙하데 지긋지긋한 50년생 아빠와 89년생 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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