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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Aug 10. 2018

'부럽다'는 말 앞에서.

퇴사한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

오랜만에 전에 다니던 직장 동료들에게 연락을 했다.

"드디어 제가 이사를 해요. 잘 지내시죠? 그러고 보니 그곳도 이사를 했네요."

전 직장도 이사를 했다. 멀어진 직장의 거리만큼 회사에 대한 마음도 멀어졌다. 전 직장의 이사와 동시에 사원증과 시스템이 모두 조금씩 달라졌나 보다. 내게는 이제 완전히 다른 회사이다. 익숙한 것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거리에서 얼굴은 익숙한 이들과 만났다.

커다란 변화를 앞두고 마지막 식사를 한다. 어쩌면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즐겁고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우리의 대화 소재는 점점 고갈되어간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이라는 한계를 넘고 싶었다. 그래서 일 년이 넘도록 듣기 싫을지도 모르는 나의 근황을 알리고 그들의 근황을 물었다. 


"거긴 어때요? 아직도 그대로인가요. 어쩌면 그때보다 나아졌을지도."

"아니, 그대로야. 너는 어떠니? 즐겁니?"

"그럼요. 좋아요. 처음 쉬는 거니까요. 여행을 가려해요. 이제는 새로운 일도 도전하려고요. 실패하면 다시 건축을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삼 년만 천천히 해보려고요."

"야, 부럽다. 얼굴도 엄청 좋아졌네."



부럽다는 말에 나는 '아, 저도 당신이 부러워요.'라는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부럽다는 말은 평소에도 내뱉지 않는 표현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오기 어린 마음은 아니다. 그저 부럽다는 말에 숨어있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라는 말이 나를 콕콕 찌른다. 

부러워지기 전에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왜 부러워하지? 스스로 선택한 모든 것이잖아.



"그건 살쪄서 그래요. 다른 분들은 요즘 뭐해요? 누구지? 걔는 나갔다면서요."

"어, 다른 데 취직했데. 어디라도 여기보단 낫겠지."

자조 섞인 말투이다. 나도 저렇게 얘기하곤 했었던가.

이제 들어도 기억조차 나지 않는 누군가의 근황 얘기를 한다. 예전과 달라진 연봉 시스템 때문에 속상하다는 후배와 나이 지긋한 선배들의 이상한 열정 싸움에 하루하루 지쳐가는 후배의 하소연을 듣는다. 후배들도 직급이 올라가면 달라질 것이다. 이제는 남이 돼버린 나와는 달리 조용히 그들의 하소연 앞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지금 내 눈 앞의 선배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겠지.

 

더 이상 날카롭게 선배의 잘못을 콕콕 찌르며 아직도 그러냐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이제는 내 회사가 아니다. 당돌하다는 얘기, 쟤는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하게 행동하냐는 평을 듣곤 했다. 믿는 구석이 있어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나를 변호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보살펴주지 않는다는 것을 회사가 알려줬고 되도록 많은 이에게 전파했다.



휴가는 통보하는 거지, 묻는 게 아니야.

너 하나 자리 비운다고 일이 안 돌아갈 정도로 여기 있는 사람들이 바보는 아냐.

교육을 받지 않는 건, 일을 안 하는 것과 같아. (건축 쪽에서는 해당 연차에 받아야 하는 국가가 정해 놓은 교육이 있다. 선배들은 일이 많아 시기를 놓치고 은근히 순서대로 교육을 가기를 바란다. 나도 못 갔어라는 말로 후배의 발목을 잡곤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하고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출력, 복사, 택배 이런 건 각자 알아서 하자.

퇴근시간이 지나면 인사하고 가면 되는 거지, 왜 물어봐? 각자 할 일 정도는 알아서 하자. 


후배와 일하게 되면(그것도 내 맘에 드는 후배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상사들과 함께 모인 공식 회의에서 말했던 이야기들이다. 그런 나를 당황스럽게 바라보던 선배도 곧 한참 늦어버린 교육을 신청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가장 연차가 낮은 사람부터 퇴근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어떻게 직장생활을 했는지, 어떻게 그들이 봉착한 난관을 헤쳐나가면 좋을지 얘기하지 않는다. 전 직장동료로서 조언을 하는 오지랖은 미련이다. 모든 상황이 변했고 나는 오래된 이야기만을 반복하는 꼰대가 될 뿐이다. 내가 말하는 직장에 대한 모든 것이 다 지나간 우리들의 옛이야기에 불과하고 추억이라 얘기할 수 있는 이는 퇴사한 나뿐이다. 다른 이에겐 현실이다.


서로가 미웠던 시간, 갈등이 봉합되지 못하고 술만 마셨던 시간, 누구보다 서로를 더 잘 이해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인 동료이다. 그 추억을 십 년쯤 지나도 얘기하고 싶다. 나는 인연의 끈을 계속 붙잡고 이어가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은 나 혼자만의 추억으로 간직해야 한다. 그저 웃음으로 한참의 시간이 지나간다. 아무리 힘들다고 얘기해도 그들의 상황이 안타깝지 않다.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폭발 직전의 퇴사 상황에 놓인 사람은 입이 무겁다. 선택이 임박한 이들은 그 누구의 조언도 필요하지 않다.


"이사하면 연락드릴게요. 사실 무서워요. 십 년 넘게 지내던 곳도 떠나야 하고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 없는 일을 새롭게 하는 건, 그렇지만 어쨌든 언젠가는 이 일도 은퇴해야 하는 거잖아요. 계속 한 가지 일을 하다가 아무것도 못한 채 뒷방 늙은이가 되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잘 안되면 그땐 다시 생각해봐야죠."

"난 지금 네가 하는 말 하나도 공감은 안된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알겠어. 그냥 이 곳을 떠난다니 부럽네."


동의를 얻고자 한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입장을 잘 모른다. 그러고 보니 직장인 시절 먼저 퇴사했던 친한 언니에게 술 마시고 전화를 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한참 하소연하며 힘들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때, 이제는 함께 나눌 우리의 이야기가 없다는 아쉬움에 그녀의 힘겨움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 나도 퇴사를 하고 난 후 만난 언니는 어쩌면 내가 곧 그만둘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단다. 돈과 힘,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이 직장에 다니는 이유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나눌 좋은 친구들이 하나둘 씩 다른 길을 찾아 떠나고 나 혼자 부유하는 느낌이 들 때, 직장에 다니는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오래된 친구들이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고 그 대열에 합류한 내가 아직도 남은 이들에게 전화를 하고 근황을 전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나는 직장의 동료를 잃고 그냥 세상 이야기, 그리고 너와 나의 소소한 삶을 나룰 친구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너도 참 대단하다.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고 만나는 걸 보면."

"그야 내가 언니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아하니까."

"그래, 넌 가서도 잘 할 거야. 부럽다."


신기하게도 모두 하나같이 손을 흔들고 헤어질 때, 빠짐없이 이 말을 한다.


부럽다.


마치 나는 너처럼 할 수 없을 거라는 다짐 같다. 나는 계속 부러움의 대상이 돼줘야 하는 의무감마저 든다. 나의 선택이 부러워할 정도일까. 어쩌면 생각 없이 내뱉은 긍정적인 부분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만든 건 아닐까. 낯선 회사 건물 앞에서 모두에게 안녕을 고하고 집을 돌아오는 내내 내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딱히 힘든 일을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으니까. 백수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일 뿐, 직장인의 고민이나 백수의 고민이나 도찐개찐이다. 그러나 나는 직장인의 모든 면을 보고 느꼈던 반면, 나를 보는 그들은 백수의 면면을 모른다. 결코 직접 겪어내기 전에는 모를 자유와 불안함이 동전의 양면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쩌면 알면서도 얘기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 동전의 양면을 알기에 적어도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중간 정도는 갈 수 있는 직장인의 삶을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 같다. 부럽다는 건 상대방의 삶을 좋게 느끼지만 나는 다르게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그냥 말 그대로 부럽기만 한 거지 내 삶은 나대로 살아갈 거라는 말이다.


말 한마디에 숨은 의미를 헤아려본다. 더 이상 우리는 같은 무리가 아니기에, 조심스럽게 서로를 배려해야 한다. 인간관계라는 건 울타리를 벗어난 순간부터 시작이다.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상황이 아니니까, 노력이 필요하다. 


대학교육부터 직장생활까지 십육 년의 세월을 보낸 서울을 떠나려니 차곡차곡 쌓아 올린 관계가 희미해지는 것이 당연하면서 슬퍼진다. 내 노력이 결코 원하는 만큼의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하랴. 누군가를 좋아하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마음마저도 감사하다. 회사라는 곳에 갇혀 만났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내게 행운이다.

같은 바다 위에 있는 거야, 다른 배를 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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