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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Sep 11. 2019

동해안 7번 국도

동해 해안도로만의 특별함에 대하여

내가 사는 동네 서귀포에서 딱 십 분이면 해안도로가 나온다. 살고 있는 동네가 워낙 바다와 가깝다. 와, 바다다.라고 소리 지를 일이 많지 않다.


육지 투어의 백미는 산이다. 논들 사이로 오래된 농가 주택들이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고 병풍처럼 둘러싼 산은 고향 같은 편안함을 준다. 멀리 보이던 저 산을 어떻게 넘어가지. 고민하던 순간 벌써 눈 앞에 산이 성큼 다가온다. 그때부터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절묘한 코너링에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동해안 7번 국도. 포항에서 울진을 거쳐 강릉까지 가는 길이다. 매번 가는 제주의 해안도로와 얼마나 다른지, 육지의 바다 내음을 있는 힘껏 들이마실 차례이다.  경주에서 나와 포항으로 방향을 튼다. 구름과 극단적 대비되는 푸른 하늘 아래 벌써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아침 아홉 시, 출퇴근 차량을 피해 조금은 늦게 나서는 길이다.


평일은 출퇴근 시간을 고려해 아주 일찍 도시를 벗어나거나 차라리 모두가 일하는 시간에 맞춰 늦게 나서야 한다. 어설프게 부지런했다가는 출퇴근 길에 꼼짝 못 하는 경우가 생긴다. 오늘의 라이딩은 아주 짧다. 계속된 해안도로의 향연이다. 느지막이 출발했지만 삼십 분 만에 포항에 도착한다. 바다가 보이는 7번 국도에 들어서자마자 배가 고프다. 일단 눈에 보이는 커피숍에 멈춘다.


라이더마다 자기의 취향이 있다. 빠른 스피드, 거친 오프로드, 무조건 칼치기, 규정 속도를 지키는 모범생  등. 자기의 취향은 타인에게 고통이 되기도 한다. 친하다는 것과 함께 라이딩을 즐긴다는 것은 매우 다르다. 남편은 나를 위해 속도를 줄인다. 나는 남편을 위해 좀 더 예민하게 움직인다. 각자만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적당한 어느 선에서 멈춘다. 그 적당한 선이 어디인지가 애매해서 가끔 토닥거린다. 그래도 부부라서 한결 편하다. 그래서인지 타인과 함께 하는 라이딩이 무척이나 어렵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딱 맞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누군가와 함께 라이딩을 가야 할 때면 남편과 나는 나만의 즐거움에 대한 기대를 살짝 접는다. 함께 한다는 즐거움이 더 크니까. 그마저도 제주도에 내려오고 난 후부터는 기회가 많지 않다. 이제 막 오프로드를 시작한 나는 산으로 산으로를 외치고 제주도라이딩을 온 이들은 딱 제주도를 만나야 하니까.


우리 부부의 취향은 언제나 규정된 것 없는 안전한 라이딩이다. 어디까지 가야 하니까 이 곳에서 무조건 쉬어야 하고 저기까지 가려면 아침 몇 시에 출발해야 한다는 약속이 없다. 둘 중 하나가 힘이 더 드는 날은 예상보다 적게 달리거나 천천히 달리거나 한 번 쉴 거리를 네 번 쉰다. 오늘은 내가 천천히 가고 싶은 날이다. 그리고 아침부터 당이 떨어졌다. 바다가 보이는 포항에 들어서자마자 쉬어간다.  맑은 하늘이지만 강릉에 가면 비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편은 재촉하지 않는다. 비야 맞으면 된다. 그러니 컨디션을 조절하자.

커피숍을 나서니 11시가 된다. 이제부터 신나게 해안도로를 달려야 한다. 도로의 상태가 매우 좋다. 지방도로는 대게 파여있거나 누더기처럼 기운 흔적이 있기 마련인데 최근에 새로 깐 듯 깨끗하다. 해안가로 줄지어 온갖 숙박시설과 음식점들이 반짝거린다. 오른쪽엔 바다를 두고 왼쪽의 풍광이 변화무쌍하게 달라진다. 한눈에 들어온다.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억에서 사라진 풍경이 어느 순간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질 때가 있다. 컴퓨터 앞에서 멍 때리던 어느 오후이거나 커피를 마시다가 바라본 창 밖이거나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고 문득 떠오른다.


달리며 마주한 풍경은 가슴에 새겨지나 보다. 기억해내고 싶은 순간이 아니라 그 풍경이 필요한 순간 나타난다.


7번 도로를 한참 달리다가 작은 샛길로 빠져든다. 영덕 대게의 모습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식당 거리가 시작되고 어촌 마을이 나타난다. 빨랫줄엔 색색깔의 옷들이 나부끼고 아주머니들이 오징어를 말리고 있다. 집게를 앙다문 대게부터 실사처럼 정교한 대게까지 온 길이 대게 투성이다. 그에 반면 마을의 풍경은 하나같이 다르다. 오래전에 지어졌으나 관리를 잘해서 묘한 분위기의 가옥부터 이제 막 쓰러질 것 같은 누더기 집, 지어진지 얼마 안 된 깨끗한 콘크리트 주택까지 다양하다. 반짝이는 바다의 수면 사이로 튀어나온  돌들이 하양고 노랗다.


제주도의 바다와 다르다. 심지어 집들도 다르다. 어촌이다. 아직은 정비되지 못한 낡은 집들이 더 많다. 태풍이 쓸고 간 다음이라 그럴까. 마음 한편이 짠해진다. 아직도 지방의 시골은 이렇게나 시간이 더디다. 관광객들이 휩쓸고 간 제주도의 땅값이 오르자 사람들은 세련되졌다. 집들도 다 새로 지었고 더 이상 고된 노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가만히 있었는데도 부자가 된 이들이 많다. 보기에 아름다운 해안도로는 제주도이다. 있는 그대로의 어촌을 보고자 한다면 동해이다. 언제 정비되었는지 모르겠는 똑같은 조형물들이 마을마다 해안변으로 줄지어 서있다. 마을 주민들은 조형물 사이에 줄을 달아 오징어를 말리나 보다. 버리려고 놔둔 생활 집기부터 그물까지 관광지라고 하기엔 삶의 흔적이 너무나 생생하다.


해안가를 따라 이차선이 쭈욱 이어지는 사이 이 곳의 흙과 돌이 까맣지 않음을, 돌들마다 삐죽이 튀어나온 것은 갈매기임을 깨닫는다. 소나무가 참 많구나. 저 새들은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도 꼼짝을 하지 않는구나. 그 순간의 평온함이 어제의 긴 라이딩이 선사한 피로를 가라앉힌다.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해도 피곤하고 하루 종일 바이크를 타도 피곤하다. 기왕이면 후자 쪽이 더 많은 날들을 살고 싶은데, 이년 넘게 일을 쉬는 동안 매일 놀아도 행복이 백배가 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은 균형을 이룰 때 가장 큰 파장을 만들어 낸다. 작년에 들어간 회사에서 내 자리를 찾아간 사이에 투어에 대한 목마름이 목구멍까지 올라왔고 여기까지 여행을 오게 된 걸 보면, 목마름을 선사한 일상의 피로에게 감사하다.


울진을 넘어서며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만나고 돌아서자마자 구름이 심상치 않다. 동해시로 들어가는 길부터 흐려진 하늘 아래 바람이 분다.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는 바람을 타고 나는 다시 굽이굽이 코너링을 시작한다. 완벽한 코스다. 바다를 만나고 다시 산을 만난다. 산을 넘나드는 사이사이 바다가 얼굴을 빼곰 보여준다.


그러다가 새까만 산을 만났다. 올 해의 화마가 휩쓸고 간 흔적이 아직까지 이 동네를 슬프게 하고 있다. 언제나 불행은 이유 없이 찾아오고 기력을 회복할 시간은 그 누구도 약속해주지 않는다. 탓할 사람 없는 슬픔이 내려앉은 탓인지 급격히 어두워진 날씨 탓인지 온 세상이 까맣다.


하루에 300~500km 정도를 달리다 보면 흡수되는 정보량이 어마어마하다. 눈으로 본 그 모든 거리를 기억하고 싶다. 내 머릿속에 라이딩으로 만났던 산과 들을 저장해 놓을 큰 폴더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 탓인지 저장해야 하는 기억들이 많아지는 탓인지 자꾸만 그 길들을 까먹는다.  어쩌면 그래서 다시 바이크를 타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은 그때를 재현하고 싶어서.


강릉시에 접어들고 드디어 오늘 머무를 주문진에 도착한다. 이름도 외기 힘든 곰탕집에 주차를 하고 늦은 점심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다행히 비가 오기 전에 숙소에 도착한다. 내일 서울로 가는 길은 분명 비와 함께 할 것이기에 서둘러 라이딩을 마무리한다.


짧은 여행이다. 그래도 긴 여운이 남을 것이다. 아마도 제주도에 돌아가서는 역시 제주도가 최고야 라는 말을 하지 않을까. 매일이 최고일 필요가 없듯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차지 않아도 여행은 그저 좋다. 바이크와 함께라면,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라면 어디든 행복하다. 즐겁고 좋아서 행복한건지 원래 내가 행복해서 이 모든 것들이 마냥 즐겁기만 한건지 헷갈린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여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올 겨울까지 기억하는 여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떠랴. 비를 흠뻑 맞고 달리는 어제, 이렇게 파란 하늘아래 달리는 오늘이 내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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