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겨울은 서울의 봄과 같아서
긴 연휴가 시작되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 감기가 길다. 서울에서 달고 온 비염은 친구 같은 녀석이라 익숙하지만 이번 감기는 참 길다.
서귀포에 정착한 지 8년, 서귀포의 겨울은 서울의 봄과 같아서 따뜻함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이제 서귀포의 겨울이 춥다.
서귀포에 오기 전 서울에서 보냈던 마지막 겨울에 참 추웠다. 유라시아 횡단을 마치고 한가했던 그 일 년, 매서운 한강바람을 가르며 오토바이로 종횡무진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리 가벼운 추위가 진정으로 춥게 느껴지다니. 나의 몸은 적응이 참 빠르다.
올해 네 번째 이사를 했다. 처음엔 그저 계약이 쉬운 집으로, 그 다음번엔 그저 상황에 맞은 집을 골랐다. 이번엔 작은 동네의 작은 빌라를 선택했다. 서귀포를 가로지르는 가장 큰 도로와 이마트를 포기할 순 없으니 가장 가까운 동네를 골랐다. 좋아하는 돈가스집과 바다가 가깝고 편의점이 무려 세 개나 있는 동네. 사람들은 제주로 이주하면 자연 속에 묻혀 자신만의 숲을 갖는 걸 꿈꾼다. 그러나 제주시는 경기도 신도시 같고, 서귀포시는 관광지다. 작은 마을은 섞이기 어렵고 그러니 꿈꾸던 대로 숲 속, 혹은 바다 앞을 찾는다.
살다 보니 제주는 경험할 것이 지천에 널려있다. 뒷동산인 고근산도 그렇고, 법환 앞바다도 그렇고. 그러니 더 깊은 숲 속으로 더 가까운 바다로 갈 이유가 없다.
서귀포는 살기 좋은 동네이다. 가까운 마트와 살가운 남편이 있다면 더 좋다. 남편을 따라 시작한 오토바이로 유라시아 횡단을 했다. 그 덕에 남편은 평생 탈 오토바이의 재미를 봤단다. 하루에 천 킬로를 달리던 날 덕분에 고작 이백에 불과한 제주도 라이딩은 금세 시들어졌다. 삼 년 정도는 온갖 골목길을 누볐다. 날마다 다른 얼굴을 가진 바다를 찾아다녔고 소름 끼치게 예쁜 노을을 추적했다. 사계절 피는 꽃놀이는 나를 위한 남편의 배려였다.
제주에서 오토바이로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길은 평화로와 산록도로인데 사실 백 킬로를 넘지 못한다. 앞뒤의 차들도 그렇지만 그 길마저도 볼 게 너무 많아서 갓길에 세우는 경우다 있다. 오토바이라면 무릇 바람을 가르는 맛인데 바람을 가르기엔 너무 아까운 풍경이 많다랄까.
그렇게 시작한 게 트레일러닝이다. 러닝이라고 하긴 좀 애매한데 그냥 숲 속을 빠르게 걷다가 뛰다가 한참을 퍼져있긴 반복하는 정도이다. 사람들은 올레길만 알지 둘레길을 모른다. 그 둘레길이 얼마나 뛰기 좋은 흙길과 걷기 좋은 돌길과 오르기 힘든 계단들로 구성돼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거북이 느림보 트레일 러너가 되었다. 중년의 위기를 맞을 나이라서 그런가. 매일 가도 매일 다른 날씨 덕에 공기, 흙, 나무의 색이 다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등산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작되었다. 목표는 산을 달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평지라도 잘 뛰어야 하기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뛰기 시작한 지 이제 이년이 되어간다. 물론 규칙적이지도 않고 속도는 제멋대로인 데다가 사실 장비사는 재미가 달리는 재미만큼이나 쏠쏠하다. (쇼핑이 최고다!)
오늘은 주말을 지나고 연휴의 시작인 첫날이다. 감기를 떼어내진 못했지만 새로 산 장비(러닝화)가 오기 전에 한번쯤은 달려줘야 하는 게 아닐까. 가장 큰 계기는 커튼뒤로 환하게 비추던 햇살때문이였지만. 결국 우리는 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다.
서귀포의 겨울은 서울의 봄 같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변덕이다. 따뜻한 남쪽바다와 북쪽에서 버티고 있는 한라산 덕분에 바람의 방향은 매번 바뀐다. 따뜻한 날씨지만 눈은 제법 날리는데 푸른 하늘 아래 뿌옇게 눈이 내릴 때면 흐린 날씨인가 싶다가도 자세히 보면 그게 눈이라는 걸 깨닫는다. 분명 집 밖을 나설 때는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 같은 날씨였는데 운동장을 돌기 시작하자 눈발이 날린다. 바람의 힘이 세서 달리기 편한 방향이 생긴다. 바람을 등 뒤에 놓고 천천히 발을 뗀다. 부웅. 달리기 참 좋은 날씨다.
유일하게 한라산을 가린다는 고근산 아래, 월드컵 경기장이 있다. 02년도는 내가 대학신입사원 때이다. 이제 이십 년이 지난 경기장은 새로 페인트를 덧칠하고 관람석을 교체했다. 월드컵 경기장을 둘러싼 넓은 공간에 뛰기 좋은 트랙이 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는다. 내가 사는 서귀포에는 러닝 할 수 있는 트랙이 있는 공원이 두 개 있는데 굳이 꼽으라면 월드컵 경기장이다. 탁 트인 공간, 적당한 길이, 한라산과 고근산이 겹쳐서 보인다. 이른 아침엔 해돋이가 늦은 저녁엔 노을이 아름답다. 물론 그 시간 때에 내가 찾는 경우는 따뜻한 봄과 가을이 주를 이루지만.
설날이 시작되는 날은 내일이지만 오늘은 휴일의 시작이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이고 오늘은 짧게 경기장을 돌아본다. 화창했던 날씨가 눈보라로 바뀌었다. 바람은 이쪽으로 불었다 저쪽으로 불었다 난리다. 그 와중에 공기가 시원하다. 땀에 젖고 눈에 젖은 신발 덕에 짧은 달리를 끝내야 한다.
내일은 좀 더 날이 좋지 않을까.
달리고 나니 문득, 지금 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가 달리기 책을 쓴 이유를 알겠다. 리이딩만큼이나 달리기는 생각을 정리해 주는 좋은 순간이다. 비록 짧지만, 비록 매우 느리지만, 가끔 신발 사는 재미가 달리는 재미보다 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