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만든 테라스 카스텔 몰라
카타니아에서 타오르미나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15분이다. 버스 창밖으로 눈 덮인 에트나 화산이 보인다. 날씨는 화창하다. 숙소인 Cassetta di Mary에 도착했는데 대문 옆에 아주 작은 글씨로 Mary라고만 쓰여 있는 초인종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다. 몇 번 더 누르니 말소리는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오늘 예약한 사람이라고 했더니 달칵하면 문이 열렸는데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방은 2층이었다. 계단으로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는데 3층에서 할머니가 내려오길래 주인인 줄 알았다. 할머니는 주인이 아니라고 한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누르니 궁금해서 내려온 듯했다. 체크인하려면 두어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 사이 점심을 먹고 오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짐을 두고 가면 좋겠는데 안심이 되지 않았다. 번역기를 돌려 할머니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안심하고 다녀오라 한다.
구글링을 해서 Sapori di Mare라는 식당을 찾아서 갔다. 친구는 봉골레를 주문했다가 바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로 바꾸어 주문했다. 우리는 그 외에도 피자와 샐러드를 주문했는데 제일 먼저 나온 음식이 봉골레였다. 그리고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도 가져왔다. 취소가 안 되었단다. 할 수 없이 다른 주문과 함께 두 가지 파스타를 다 먹어야 했다. 취소 오류의 음식값까지 지불해야 했기에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왔더니 마당에 있던 짐이 없다. 자신이 주인이라고 말하는 남자는 빗방울이 떨어져서 방에 들여놓았다고 했다. 이어서 숙소 사용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다.
시간을 보니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리스 원형극장은 다음날 가서 느긋하게 볼 생각이었다. 관람 마감 시간까지는 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아서 보고 금방 나오기엔 아쉬울 것 같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얼른 가서 보잔다. 비구름 때문에 불안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마을 절벽 끝,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원형 극장이 있다. 매표소를 지나 약간의 계단을 오르면 관객석 제일 높은 곳에 이른다. 아치문을 통해 들어갔다. 2300년 전(기원전 3세기경)에 지어졌다는 고대 건축물, 현존하는 그리스 극장 중에 원형이 잘 남아 있고 가장 아름답다는 곳이다. 무대 뒤 무너진 벽 틈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사파이어 블루 빛깔의 이오니아 해다. 무대 뒷면의 벽은 많이 허물어졌지만, 그조차도 아름다웠다. 허물어진 벽조차도 이곳에 잘 어울리는 작품 같다. 그 뒤로는 에트나 화산이 솟아 있다. 아직도 화산활동이 진행 중이다. 산봉우리에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산은 고고하고 신비로워 보였다.
로마 시대에는 검투사 결투장으로 활용되기도 했고 지금은 콘서트, 오페라, 연극 공연 등 문화행사가 자주 열린다고 한다. 2017년 G7 회의가 열릴 때 개막 축하공연으로 정명훈의 지휘하에 오케스트라 공연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객석에 앉아 오케스트라 연주를 상상해 본다. 웅장한 음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타오르미나는 영화 ‘그랑블루’와 ‘대부’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타오르미나를 사랑한 예술가들은 많다. 괴테, 니체, 모파상, D.H. 로런스 등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사랑했다. 그중에서 괴테는 그의 책 ‘이탈리아 기행’에서 타오르미나를 ‘작은 천국의 땅’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객석에 앉아 공연을 상상하고 있는 동안 괴테가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조금은 알듯도 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경치에 흠뻑 빠져 있을 때였다.
“배 안 고파? 저녁 먹으러 가자”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심가로 내려와서 근처에 있는 식당 밖에 세워 놓은 메뉴판을 보고 메뉴와 가격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Liola osteria & bar다. 오래된 식당 같지 않았다. 실내 장식이 타오르미나 분위기와 다르게 너무 단순하고 현대적이어서 맛이 살짝 걱정되었다. 튀김옷을 입힌 소고기 요리와 파스타, 문어 샐러드를 주문했다. 소고기 요리는 한국에서 먹는 아는 비프스테이크와 비슷한데 좀 더 얇고 겉은 바삭한데 고기는 연하고 맛있다. 가격은 14유로로 나쁘지 않았다. 다른 두 가지 음식도 맛있다. 먹고 보니 맛집이었다.
다음날 카스텔 몰라(해발 397m 인 타우로 산 정상에 아랍인이 세운 성이 있고 성 아래 형성된 마을)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산 위에 있는 타오르미나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 ‘어금니’라는 뜻을 가진 이 작은 마을로 가는 버스가 9시쯤에는 있겠거니 생각하고 정류장으로 갔다. 매표소에 물어본 결과 첫차는 10시 20분에 출발한다.
오 마이갓! 이런 상황을 눈치챘는지 택시 기사가 와서 호객한다. 5km 정도를 가는데 20유로를 내라고? 두 친구는 타고 싶어 했다. 버스 출발할 시간까지 근처에서 동네 구경도 하고 사진 찍기 놀이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난 사실 걸어갈까도 생각했던 중이었다. 오르막이 심해 힘들긴 하겠지만 말이다.
우린 버스 탈 시간까지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버스 출발 시간이 거의 되어서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편도에 1.9유로이고 왕복은 3유로인데 우리가 편도냐 왕복이냐를 망설이는 사이에 편도 1.9유로짜리 티켓을 준다. 할 수 없이 오는 표도 1.9유로에 샀다. 타오르미나에서 카스텔 몰라로 이어지는 길은 급경사를 이루고 갈지(之) 자처럼 길이 이어져 있다. 앉아있는데도 멀미가 날 만큼 구불구불한 길이다.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오면 넓은 곳에서 기다리며 비껴가야 한다. 이런 험한 지형에 터전을 이루고 사는 시칠리아 인들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마을에서 성(Castello di Mola)까지는 계단을 좀 올라가야 한다. 이 성은 9세기쯤에 이곳을 점령한 이슬람 세력이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산봉우리에 지은 요새라고 한다. 성에 다 올라왔을 무렵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흐린 날씨에 멀리서 올라가는 안개까지 더해져 신비로움마저 자아낸다. 점심을 먹기 위해 전
망대에서 내려와 식당을 찾는 사이 빗줄기가 굵어졌다. 맛집 찾아 돌아다닐 상황이 아니었다. 제일 가깝고 평도 좋다는 pier de cat이라는 카페로 갔다. 그러나 직접 조리해 주는 곳이 아니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적당히 데워준 것이어서 금방 식었고, 하우스 와인도 그다지 맛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냥 비를 피하고 허기를 면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식사를 마쳤을 땐 햇살이 비쳤다. 두오모 광장으로 갔다. 비가 언제 왔냐 싶게 파란 하늘이다. 광장 카페에 앉아 젤라토를 먹었다. 눈 부신 햇살 아래 성당 앞에서 먹는 젤라토 맛이 색다르다.
우리는 골목을 거닐었고 동네는 작지만, 미로 같아서 즐거웠다. 좁은 골목은 때론 계단으로 연결되고, 때로는 막다른 길이었다. 골목의 길냥이도 사랑스럽다. 정이 느껴지는 마을이다. 동네를 배회하다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전망이 보이는 피자가게를 발견했다.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배가 불러 피자를 먹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 앉아서 맥주를 주문했다. 이렇게 멋진 전망을 보며 마시는 맥주는 달다. 시원하고 부드럽다. 바로 밑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멀리는 눈 덮인 에트나 화산이 보인다. 충분히 즐기고 버스 출발시간보다 20분가량 일찍 정류장에 도착했다. 타오르미나로 내려갈 사람들이 이미 줄을 서 있었다. 버스 출발시간은 5시 10분인데 버스가 4시 54분에 왔다. 예정대로라면 4시 50분에 타오르미나에서 출발했어야 했는데 그 시간보다 일찍 출발한 모양이다. 그리고 버스는 줄 서 있던 사람들이 타자 바로 출발했다. 시간에 맞춰 왔더라면 못 못 탈뻔했다.
예쁘긴 하나 관광객으로 북적거리고 기념품 값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타오르미나 거리보다는 작지만 소박하고 한적하게 마을을 돌아보며 즐길 수 카스텔 몰라가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