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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쉽지 않은 그녀

by 차돌


하은과 나는, 잘 맞았다.


처음엔 정말 그랬다. 영화, 음악, 좋아하는 도시, 싫어하는 날씨, 심지어 ‘전자책보다 종이책이 낫다’는 생각까지—척척 맞는 느낌이었다.


"오빠 이 곡, 누가 추천해줬어?"

"그냥, 요즘 이 노래에 꽂혔어."

"진짜? 나도 이거 플리에 있는데."


의외로 잘 풀렸던 첫 만남 이후, 우리는 서로의 취향과 관심을 자연스레 공유해 갔다. 대화는 점점 길어졌고, 깊어졌다. 분위기는 묘하게 설렘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은은 내게 '확실한 표현'을 요구했다. 나는 이번에는 밍기적대지 않기로 했다. 너를 좋아한다고, 우리 사귀자고, 손 잡는 이상의 관계를 말로 선언했다. 마음에 쏙 드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하은은 새침하게 '알았어'라고 답했다. 마치 내 고백 위에 도장을 찍듯이.




그렇게 연애는 시작됐다. 다시 일에 몰두하던 시기는 금세 막을 내렸고, 내 삶의 최우선 순위는 그녀가 되었다. 그녀에게도 최우선 순위가 나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점차 그렇게 될 거라 확신했다. 당시에는 그랬다.


우리는 주말과 평일을 가리지 않고 영화도 보고 술도 함께 마셨다. 하은은 약속을 잡을 때마다 늘 당당했다.

"이 날은 이거 보러 가자. 재밌어 보여."

"아, 저녁은 저기 가자. 엄청 맛있대."


처음엔 고마웠다. 이전의 여자친구들은 대부분 '아무 데나 좋아'가 기본값이었고, 다음은 늘 나의 몫이었다. 장소를 고르고, 예약하고, 메뉴를 조심스레 추천하던 지난 연애들. 그에 비해 하은은 요구 사항이 분명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처음엔 그게 참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곧 알게 됐다. 그건 함께 정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정하는 것이었단 걸.


사소한 균열은 아주 작은 틈에서 시작됐다. 하은과 영화를 본 날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을 나오던 길, 나는 감상을 말했다.


"와, 생각보다 감정선이 섬세했어. 나는 주인공보다 오히려 친구 캐릭터가 더 와닿더라."


하은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나는 무언가 기분이 쎄한 느낌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하은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오빠, 영화 보고 나오면서 꼭 그렇게 자기 생각을 말해야 해? 그냥 좋았다 정도면 되잖아."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아니, 그냥 영화 같이 봤으니까 대화하려고 그랬지. 넌 어땠는데? 별로였어?"


"지금 내가 영화가 별로였어서 그러는 것 같아?"


이제 와서 자세히 보니 하은의 표정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과연 내가 놓친 건 무엇일까,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물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주인공에 대해서 안 좋게 말한 게 별로였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잠시 뒤, 하은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나 영화 끝까지 되게 몰입해서 봤어. 그런데 오빠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와야 했잖아. 그리고, 바로 그렇게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평론을 해야겠어? 괜히 내 감상까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어."


"아니... 난 너가 옷이랑 가방을 챙기길래 당연히 일어날 거라 생각했지. 그리고 영화에 대해서도 그렇게 막 나쁘게 말한 건 아니잖..."


"오빠 자꾸 '아니'라고 되받지 마. 왜 뭐든 당연하게 생각해? 옷 정리 좀 한다고 무조건 일어나는 거야?"


억울했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싶었다. 하지만 이후에 내가 늘어놓은 수많은 호소와 회유의 말들은 하은에 의해 단 하나의 단어로 규정되었다. '변명'. 그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하은에게 있어 감정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나누는 수많은 대화에서 하은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공감이 아닌 동조라는 걸.




그 후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관계가 틀어진 건 아니었다. 하은은 직설적이었고, 자기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한 나머지 나를 당황시킬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감동시키기도 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에서 화도 냈지만, 때로는 나 자신조차 놓치거나 보지 못한 장점을, 이야기를 기가 막히게 캐치함으로써 내가 존중받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감동은 잠시였고 갈등은 쌓여가며 상황은 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늘 내가 무언가 잘못했다는 전제 하에 대화가 이어졌고, 때로는 사과를 강요받았다.


나는 하은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내는 것보다, 화를 사는 게 더 두려웠다.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과 몇 번을 그렇게 끝났다. 갈등이 불거지고, 맞서 싸우고, 이기려 들고, 결국엔 서로를 다치게 하고. 이번엔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참았다. 하은의 말투와 사고방식, 하은의 세상. 취향과 관심사가 이토록 잘 맞는데, 성격은 맞춰보기로 하지 않았던가. 나이 먹은 연애에서, 감정 다툼 쯤은 노력으로 메울 수 있다고 믿었다.


'이번만큼은 내가 바뀌자. 그래, 난 이제 진짜 어른이고, 남자니까.'




하지만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처음 몇 달간 나는 그녀 앞에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참았고, 불편함은 이야기하기보다 이해하려 애썼다. 화가 나도 웃었고, 서운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녀가 너무 불편하다고, 이건 내가 바라던 사랑이 아니라고.


그래서 다시 그녀 앞에서 내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자, 다툼은 점점 더 잦아졌다. 그러던 하루는 또 한 번의 말싸움 끝에 내가 말했다.


"하은아, 나도 나대로 느끼는 게 있어. 넌 자꾸 네 감정이 상한 것만 말하지만, 나도 상처받고 힘들어. 이건 그냥 내가 전부 맞춘다고 될 일이 아니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평소와 다른 나의 반응에 하은도 다르게 반응해 주길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도 그녀는 단호했다.


"지금 한 말, 후회 없겠어?"


잠시 생각을 고르던 난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응, 많이 참고 한 말이야."

"오빠, 진심이지?"

"응 진심이야."

"그래,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네."


그렇게 끝이었다. 하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나는 바닥을 드러낸 커피잔을 보며 허탈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 우리의 연락은 없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단념하듯.


하은과의 관계를 통해 나는 하나의 분명한 사실을 배웠다. 소개팅 앱에선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도 취향이 맞는 사람 하나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정작 앱 밖에서, 그렇게 잘 맞는 사람을 만났고, 연인까지 되었을 땐 정말 이제 외로움이 끝났다고 믿었다. 영화도, 음악도, 책도—이렇게까지 겹치면 인연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건, 취향이 같다고 사랑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증명했을 뿐이었다.


나는 나를 바꾸면 될 줄 알았다. 노력하고, 참고, 맞추면 오래갈 줄 알았다. 하지만 억지로 바꾸다 보니 결국 나 자신이 사라졌다.


나는 나를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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