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야만 #전쟁 #바이러스 #기후위기
‘포비아’에 대해 웬만하면 일정한 거리를 두는 편이다. 바퀴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며 질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정도는 아니다. 낡은 연립에 살던 시절, 함께 살았던 적도 있고, 그것 때문에 큰 탈이 나는 게 아닌 걸 알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 속으로 집에 빈대가 들어오면 어쩌지, 걱정이 많다. 당장 택배 물건을 집안으로 들이지 말고 현관문 밖에서 풀까, 혹은 현관에서 택배 상자를 드라이로 바싹 말린 다음 풀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다. 여행을 자주 가는 것도 아니면서 여행지 숙박도 걱정이다. 위생이나 청결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어서 숙박시설도 까탈스러운 편은 아닌데, 빈대 때문에 여행도 못 갈 것 같다. 이상하다, 원래 이런 류의 호들갑을 안 떠는 편인데, 빈대 걱정이 태산이다. ‘빈대 포비아’가 생긴 걸까? 코로나가 창궐할 때도 큰 걱정이 없었는데 코로나보다 빈대가 더 걱정스럽다니, 인간의 이성이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어제인지 오늘인지 조간신문을 읽다가 한 장의 사진을 보면서 잠깐이었지만, 인간에 대한 절망을 느꼈다. 전기 공급이 끊긴 가자지구의 한 병원, 인큐베이터에서 꺼내진 몇 명의 아기들이 한 침대에 사물처럼 놓여 있었다. 이제 갓 세상에 나온 이 아이들의 생명을 누군가 지켜줄 수 있을까? 인간의 생명이 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높다고 떠들어온 인류에 대해, 인류가 세운 문명에 대해 기묘한 혐오감이 든다. 인간의 문명이 가장 지독하고 기만적인 야만이라는 걸 오래전부터 눈치챘지만,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전쟁을 계속 치르는 걸 보면서 인간에 대한 포비아가 생기려 한다.
발자크가 《나귀가죽》이라는 작품에서 썼던 다음의 문장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유럽은 발목까지 차오르는 피바다에 적신 발을 씻어낼 시간도 없이 끊임없이 다시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최근에 보기 시작한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와 <아라문의 검>은, 인간의 본성과 인간사회 가 가진 잔인성에 대해 새삼스럽게 각성시킨다. 자연 속에 살던 인간이 무리를 짓고, 부족을 만들고, 마침내 국가를 만드는 과정은 침략과 전쟁과 배신과 음모와 살상으로 점철된 피의 역사였다. 또한 이는 인류 문명의 초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누군가는 인류 역사상 지금이 가장 평화로운 때라고 말한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 세계는 고대부터 중세, 근대를 거쳐 1, 2차 세계대전을 치를 때까지 단 한 번도 전쟁을 멈춘 적이 없다. 특히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서구사회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너무나 보잘 것 없으며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했고, 이 회의와 절망감이 사회 전체를 폭풍우처럼 휩쓸었다.
하지만 이젠 이조차 가벼운 감상이거나 철 지난 인문주의처럼 한가해 보인다. 과도한 물질문명은 ‘경쟁’이라는 초강력 무기로 모든 가치를 압살해버렸고, 인간의 지능을 압도하거나 압도할 기계의 출현에 인간의 이성은 이미 마비되기 일보 직전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벌이더니, 이방인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원주민 아랍인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야욕을 멈추지 않아 중동의 화약고가 위험천만하게 끓어오르고 있다. 세계대전을 막는 억지력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가공할 무기가 어쩌면 인류 전체를 멸망으로 이끌지 모른다는 동물적 각성 덕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독일인에 대한 증오의 흔적이 내게서 떠난 건 오래전 일이다. 그래서 나치즘이 비인간적인 잔학함이 아니라면? 그것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고백이라면? 우리 속에 웅크린 채 감춰지고 억눌리고 위장되고 부인된, 그렇지만 언제나 결국엔 뛰쳐나오고 마는 진실이라면?”
2차 세계대전에 대해 가장 날카롭고 적확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소설, 《노르망디의 연》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큐베이터에서 꺼내놓여진 앙상한 몸집의 작은 아기들을 보면서, 우리 안에 도사린 나치즘이 보였다. 나치즘이 인간적이라는 무서운 역설이.
그래서였던 모양이다. 아침 출근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건. ‘가이아에게 인간은 여러 면에서 가장 지독한 해충이겠구나.’
어머니 대지‘가이아’라는 개념을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가이아는 수사와 상징이 뒤섞인 감상적인 사회과학 용어처럼 들리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화학자, 의학자, 생물물리학자, 대기과학자인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가 자기조절 능력을 갖춘 유기체로서, 생물들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스스로 적당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일종의 피드백 장치를 가진 특별한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지구에게 ‘가이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러브록의 친구인 《파리대왕》의 작가 윌리엄 골딩은 살아 있는 지구를 표현하는 이름으로 만물의 근원으로 숭배되는 그리스신화의 ‘가이아’를 붙이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지구에게 ‘가이아’라는 이름이 있었지…. 몇 년 동안 전혀 떠올리지 않았던 이 말이 왜 갑자기 내 머릿속에 등장한 거지?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갔다. 꽤 큰 매장이었다. 테이블마다 종이컵이 올려져 있었다.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종이컵 말고 머그잔에 부탁드려요.”
간에 기별도 안 가던 환경을 위한 조치들이 원점으로 돌아갔음을 한순간에 확인했다.
지구가 절절 끓든 말든, 바이러스가 창궐하든 말든, 수온이 상승하든 말든, 가을이 사라지든 말든, 폭염, 산불, 가뭄, 홍수 피해가 나든 말든, 자연재해가 항시적이든 말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지금처럼 기후위기에 둔감하면 인류 전체를 지옥으로 데려갈 수 있다고 말하면 참으로 환경에 대해 걱정할 만큼 태평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쓰다보니 빈대에 대한 나의 걱정이 참으로 한심한 것 같다. 인간이 빈대보다 나을 게 없으니 말이다. 우리집 빈대를 박멸해도 나는 살 수 있듯, 인간이라는 해충이 사라져도 가이아는 건재할 것이다. 인간이 사라져야 가이아가 건재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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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당디의 연》
로맹 가리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받은 유일무이한 작가다. 본명 로맹 가리로 발표한 《하늘의 뿌리》와 필명 ‘에밀 아자르’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노르망디의 연》은 그가 죽기 직전 발표한 마지막 장편소설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 노르망디 벽촌에서 유년기의 천진함을 간직한 다섯 아이가 한 시절을 보낸다. 폴란드 귀족의 딸 릴라와 그의 오빠 타드, 프랑스 소년 뤼도, 독일인 한스,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섬약한 피아니스트 브뤼노. 친구였지만 적군이 될 수밖에 없는 잔인한 전쟁. 하지만 이들의 삶을 그려보인 로맹 가리의 시선은 매우 날카롭되 더없이 따뜻하다. 인간에 대해 작가가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지 느껴지는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전쟁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