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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Apr 06. 2021

‘산수문전’ 보고 무량사...
늦겨울, 부여나들이①

생각이나 느낌, 행위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을 두고 ‘문득’이라고 한다. 그런데 말이다, 모든 문득이 정말 문득일까? 한파가 조금 누그러진 어느 날 부여로 취재 삼아 나들이 간 일은 ‘문득’ 일어난 일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식가 T선배는 음식과 관련한 모든 걸, 식재료는 물론이요 풍속, 전통, 미감에 대해서까지 모르는 게 없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다. 페북 초창기 나는 T선배의 음식 관련 페북 포스팅을 긁어서 파일로 만든 적도 있었다. 음식이 맛있으면 함께 한 사람들과도 두 배로 즐겁고, 여행일 경우 더 오래 기억되고 또 찾아가고 싶게 만드니까.   

T선배가 부여박물관에서 하는 ‘백제 산수문전’에 관해 페북 포스팅을 했다. 별로 길지 않은 글이었는데도 호기심이 동했다. 일간지 기자로 오래 일한 대선배님이 눈여겨볼 만하다니 취재를 다녀오리라 ‘문득’ 마음을 먹었다. 산수문전도 보고, 잊고 있던 백제문화도 새삼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사실 핑계에 불과했다. 몇 해 전 T선배는 퇴직하면 시골 작은 농가를 서식지 삼을 거라며 청사진을 내보였다. 술이든 고기든 들고 놀러 오면 환영한다는 말에 좌중은 제각각 미래의 어떤 날을 흥겹게 상상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아, 정말 아무데나 써먹어도 어울리는, 이토록 진부한 문장이라니…) 자신이 계획한 미래를 현실로 옮기는 사람과 늘 꿈이라는 위치에 올려놓고 바라만 보는 사람. T선배는 자신의 계획을 지체 없이, 게다가 너무나 근사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렇다고 선배가 나를 대단히 기다렸을 리야 없지만,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선배의 미래를 들은 나로서는 술이든 안주든 들고 놀러가는 것이 내 역할 같았는데, 몇 해를 그냥 보내버렸다. 선배의 시골집이 부여에 있으니 이참에…. 그러고보니 ‘문득’은 은연중에 미뤄둔, 혹은 마음에 남아 있던 것들이 비로소 형체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득보다 겸사겸사가 더 어울리는 부여 취재기이다만.      



국립부여박물관 산수문전山水文塼’, 여덟 장의 중요한 벽돌     


부여를 한두 번 다녀온 적 있지만 기억이 별로 없으니 처음이나 진배없는 걸음이다. 부여, 하면 백제가 저절로 떠오르는데 백제에 대한 상식이 너무 짧다. 백제 역사 속의 부여에 대해서는 다음 여행기에 적겠지만, 백제가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세운 나라이며 660년 나당연합군(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는 기본 상식은 짚고 가자.

아침 볕이 따스할 때 막 부여에 들어섰다. 날 선 추위가 주춤했고 날도 맑았다. 부여박물관이 자리한 읍내는 정갈한 느낌이다. 나지막한 산에 둘러싸여 있는 박물관 위로 맑고 청아한 푸른빛의 하늘이 펼쳐졌다. 코로나 19 검사를 하고 관람시간을 기다리며 둘러보니 드문드문 백제의 유물들이 서 있다. 관람 예약 후 관람 시간은 꼭 엄수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해설사와 함께 하는 전시여서 그렇다. 

‘산수문전’에서 전은 전시展示라고 할 때의 전展이 아니라 진흙 등으로 만든 벽돌을 말한다. 산수문전은 ‘산과 물의 문양이 새겨진 벽돌’이란 뜻.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총 여덟 장의 문양전. 산수문전은 그장 대표 선수다. 몇 장의 벽돌을 전시하는 것으로 전시가 허전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백제인의 이상향을 담은 미디어쇼를 함께 기획해서 풍성하게 메워주었다. 물론 그럼에도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여덟 장의 문양전이다.    

산수문전을 들여다보니 동글동글한 산등성이가 솟고 그 위에 나무들이 눈썹처럼 그려져 있다. 맨 위에는 구름이 떠 있고, 하단의 돌계단 같은 부분은 물의 표면을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 아랫부분에 전각 하나와 스님 같은 인물이 묘사돼 있다고 하는데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늘에는 구름이 흐르고, 산등성이 위로 나무가 솟고, 냇물이 흐르고, 신선(?)이 있는 풍경. 

이 문양전들은 모두 1937년 부여군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출토됐으며 제작 시기는 대략 7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여덟 장의 벽돌은 해외에서 가장 많이 전시된 우리 문화유산이라고도 한다.  

부조로 된 벽돌의 문양이 아름답긴 하지만 이렇게나 대단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뭘까? 산수문전의 경우에는 특히 인물을 곁들인 산수화가 거의 그려지지 않던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 문양전 중에서도 백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수화 벽돌 외에도, 봉황 무늬, 용 무늬, 도깨비 무늬, 연꽃 도깨비 무늬, 연꽃 무늬, 연꽃구름 무늬 벽돌 7점이 함께 전시됐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말 잘 만들었다는 감탄이 나온다. 완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소박하고, 조금은 익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다. 미디어 쇼의 하이라이트쯤에 이 여덟 장의 벽돌 이미지를 띄워서 전체적인 것과 함께 부분부분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내용을 조금 자세히 설명한 영상이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옥의 티. 21세기 사람이 7세기의 문화유적을 보는 일은 일종의 타임슬립 같아 즐겁고 흥미로웠다.      


오라니 갔던 그곳무량사에서  


부여에 들어서면서 T선배와 계속 톡을 주고 받았다. ‘맛꾼’이니 맛있는 걸 소개해줄 거라는 믿음은 말하면 입만 아픈 일이고. 그런데 이 톡, 너무 매력적이다.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암자에 가보고 싶은 생각 없소? 거기 맛있는 묵과 막걸리도 있지.”

‘김시습’‘암자’‘묵’‘막걸리’이 네 글자의 조합은 아득한 상상을 불러온다. 깊은 산골 암자 앞, 허름하고 오래된 주막 같은 곳을. 취재 분량도 얼추 나왔고, 점심 시간도 훌쩍 지나 배도 좀 고파왔으니 아주 마춤하다.(마춤하다는 알맞다의 사투리)   

부여 읍내에서 30여분쯤 차로 이동하니 선배의 처소가 나타났다. 집 뒤로 대숲이 가만히 감싸고 있는 크지 않은 집. 열어둔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정갈하고 소박한 마당이 반겨준다. 페이스북으로 봤을 때는 훨씬 깊숙한 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큰길에서 아주 멀지도, 마을이 아주 작아보이지도 않는다. 

서울에도 집이 있어서 부여집을 오가며 지내기 때문에 서울에서도 종종 만났지만 부여집에서 보니 더 반가웠다. 차를 돌려 선배 부부와 함께 무량사로 향했다. 무량사와 김시습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행선지가 바뀐 모양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10여분쯤 달리니 무량사 입구다. 식당에 차를 대자 신기한 구경을 시켜주었다. 도로 가의 큰 나무 위에 소나무 홀씨가 날아와 움을 티웠다. 나무에 터잡은 나무. 바위틈에서도 생존하는 소나무이니 놀라울 것도 없지만, 제 삶의 어떤 자리를 비워 양보해야 하는 나무의 아량이 넉넉해 보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므로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상상 속 허름한 주막 같은 식당이 아닌, 평범한 식당이었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오니 금세 일주문이 나온다. 무량사의 일주문은 거창하지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특히 단조롭고 묵직한 나무 기둥을 그대로 썼다. 그 문을 들어서니 너른 터가 나온다. 산세는 지극히 완만하여 뾰족이 솟은 곳이 없다. 늦겨울이어도 겨울 오후라 인적이 거의 없다. 경치 좋은 곳에는 늘 절이 있고, 그래도 절 구경 이력이 없지 않은데, 이 무량사는 왜 이토록 선參적으로 느껴질까. 더 좋은 표현을 찾고 싶은데 떠오르지 않는다. 내세우거나 강조점이 덜 보이는 무심한 정취. 편안한 풍경 속에 전각들이 덤덤하게 들어서 있다. 그것 모두를 아우르는 풍광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찬찬하게 가라앉는다. 

그곳에서 일본 교토의 료안지가 떠올랐다. 료안지 정원에 하얀 자갈이 깔려 있는 크지 않은 마당이 있다. 이 마당에 또 몇 개의 큰 돌이 있는데, 관광객들이 그 앞 마루턱에 앉아 무심히 돌들을 바라보곤 했다. 서양인들은 그 정원을 Zen Garden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때의 느낌이 저절로 연상됐다.  

극락전도 좀 특이하다. 겉으로 보면 2층인데 안쪽은 2층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불전 안을 보면 가운데 아미타불이 있고, 양쪽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있다. 이 삼존불은 흙을 덧붙여 만든 소조불로는 동양 최대의 규모라고 한다. 절에 대한 설명은 인터넷 지식에 양보한다.  

백문이불여일견이니, 지날 일 있으면 일부러라도 들려보길 권유한다. 그곳의 사계를 보고 싶다.  

    

삼호식당, 울방개묵


그런데 김시습이 왜 무량사에?


무량無量이라…. 세상사 헤아릴 수 없는 게 한두 가지랴. 목숨도 셀 수 없고 지혜도 셀 수 없는 곳이 바로 극락정토라는 풀이인데, 불자가 아니어선지 크게 마음에 닿지는 않는다. 그런 설명이 아니어도 무량이란 말의 울림이 웅숭깊다.  

그건 그렇고, 매월당 김시습이 왜 무량사에서 생애의 마지막을 보냈는지는 궁금하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이 말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어찌 몇 마디로 이해되겠냐마는. 김시습은 세조찬탈 이후 승려가 됐고, 이곳 저곳을 유람하며 살았다고 한다. 중간에 승려복을 벗고 결혼을 했지만 아내마저 죽고, 오십대에 이르러 어찌어찌 깃든 곳이 이곳 무량사였단다. 

덕분에 이곳 무량사 전각에는 진위는 알수 없지만 김시습의 초상화가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김시습의 사후 다비식을 치렀는데 사리가 나와 부도를 만들어 세워두었다니 그의 생애를 찾아 읽어보고 흔적들을 찾아보면 그 의미가 더 진하게 다가올 것 같다. 김시습의 삶을 더듬더듬 찾아 읽어보고 나니 김시습의 자취가 무량사에 있는 게 조화롭다는 느낌이다. 어릴 때부터 조정에까지 닿았던 천재의 삶. 그 뛰어남으로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니,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의 삶이 얼마나 허허로웠을지 조금 짐작이 된다.       

선배 부부와 무량사를 훑어보고 처소로 돌아와 맛있는 약주와 귀한 안주를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설핏 해가 기운다. 선배가 산무문전에 대해 해준 이 말이 떠오른다. 산등성이 위에 귀엽게 솟아 있는 나무 모양을, 이곳 부여에 내려와 살다보니 알겠더라고. 서둘러 인사를 하고 나오자 마당 저쪽 산등성이 위로 어둠이 내려앉는데, 아, 그제야 선배의 설명을 알아들었다. 낮은 산등성이들이 가지런히 이어져 있고, 산등성이 위로 나무들 솟은 모양이 얼마나 다정하던지. 모든 등성마다 눈썹 같은 나무들이 당연히 솟아 있지만, 부여의 산세가 낮아서 그런지 더 확연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일기장에 낙서처럼 그림을 그려뒀다. 카메라를 꺼내 찍어두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다시 한번 다녀가리라는 여운으로 삼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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