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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뜻 밖의 백수 Nov 18. 2020

04)실업자가 되었음을 처음 고백하던 날

10월 14일.

오래된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는 날. 약속시간은 가장 퇴근시간이 늦었던 나를 고려하여 여느 때와 다름없이 7시 반으로 잡았다. 사실 나는 더 이른 시간도 상관없었지만 친구들이 알고 있는 나는 아직 직장인이었기에 그냥 일곱 시 반에 만나기로 했다. 지방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같은 대학교를 졸업한 친구들. 대기업 들어가자며 같이 토익 시험도 보러 다니고 자격증 공부도 함께했던 친구들이다. 지금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한 명은 졸업 후 바로 취직한 회사를 여전히 다니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퇴사를 두어 번 정도 했는데 그 두어 번 다 이직이 확정된 퇴사였다. 

   

나는 이 날 낮에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직장도 잃고 남자 친구도 잃다니. 도대체 내년에 얼마나 운수 대통한 일들만 있으려고 올해는 이렇게도 지지리 운도 복도 없는 것일까? 정말이지 안 좋은 일은 왜 줄지어 일어나는 것일까! 

이별의 절차가 끝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화장을 했다. 흐르는 눈물에 얼굴에 발라놓은 파운데이션이 자꾸만 양쪽 볼에 11자를 그리며 지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약속이고 뭐고 집에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쓰고 해가 졌는지도 모를 때까지 누워있고 싶었다. 얘는 결혼해서 잘 살고 있고 쟤는 남자 친구와 한창이고, 둘 다 코로나에 잠시 휘청했지만 다시 평범한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만 코로나에 패배했고 연애도 실패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격지심이 꿈틀대는 것 같았다. 낮아진 자존감이 나를 괴롭혔다. 

'내 오랜 친구가 직장도 잃고 연인과 이별했다고 털어놓는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라고 입장을 바꿔 스스로 질문했다. '너 정도의 경력이면 다른 곳 얼마든지 갈 수 있어!', '그래! 완전 잘 헤어졌어!'라고 얘기하며 소주 나 한잔 더 마시자고 '짠' 할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쿨하게 털어놓고 속 시원히 얘기하면 마음이 좀 더 편해질지도 모른다. 자꾸만 슬픔의 구렁으로 힘 없이 빠져가는 나의 정신을 한 방에 차리게 해 줄 만한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른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화장을 계속했다.


약속 장소인 삼겹살집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한잔 기울이며 고기를 굽는 사람들로 이미 북적였다. 우리도 한 자리 잡고 앉아 삼겹살 3인분과 소주와 맥주를 한 병 씩 시켰다. 

노릇하게 익어가는 삼겹살과 함께 서른두 살 여자 셋의 수다의 꽃도 활짝 피어갔다. 술 병을 비워 갈수록 몇 시간 전에 이별하고 몇 주 전에 해고된 건 아무렴 괜찮은 것 같았다. 그때쯤, 12월 초쯤에 셋이서 호캉스를 가자고 누군가 제안했다. 수영장도 있고 라운지 바도 있는 호텔에서 1박 2일 쉬다 오자고 한다. 주말에 가면 호텔도 비싸고 사람도 많으니 한적한 평일에 가자고 한다. 추진력이 좋은 친구는 연말이라 호텔을 미리 예약해야 한다며 각자 연차를 쓸 수 있는 날이 언제인지 물었다.

"나는 언제든 상관없어. 사실 이번 달부터 회사 안 나가거든!"

한 번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거나 그만둘 거라는 얘기를 한 적 없는 내가 이번 달부터 회사를 안 나간다고 하니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한 친구가 혹시 코로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놀랐을 테지만 최대한 놀라지 않으려는 친구들의 얼굴을 잠깐 사이에 훑어봤다. 

"괜찮아. 뭐, 그동안 쉬지도 못하고 일만 했는데 이 참에 한번 쉬어보려고!"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말을 뱉었다. 사실 진짜 진심은 '막막해. 하루아침에 잘린 것도 억울해. 당장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였던 것 같다. 친구들은 내가 괜찮다고 하니 저마다의 스타일로 응원의 말을 쏟아냈다. 백신이 언제 나온다고 하더라, 내년 초에는 코로나가 괜찮아질 것 같지 않냐, 내 생각엔 곧 회복될 것 같다, 마주 앉은 친구 둘이서 내가 들으면 희망적일 수 있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이내 우리는 "괜찮아!"라며 소맥 잔 두 개와 소주잔 하나를 부딪혔다. 


우리의 취중 농담과 진담은 막차시간이 가장 빠른 친구의 마지막 버스가 끊기고 한참이 지날 때까지 이어졌다. 한 명이 막차를 놓쳤으니 공평하게 나머지 둘도 막차를 놓치기로 했다. 우리는 집에 가는 걱정 따윈 안중에 두지 않고 최근에 주식을 시작한 얘기, 고등학교 때 몇 반이었던 누가 결혼을 한다는 얘기, 대학교 때 우리 셋이 술을 얼마나 마셔댔는지에 대한 얘기를 하며 깔깔 웃고 술잔을 부딪히는 걸 반복했다. 그동안 백수가 된 후 혼자 시간을 보내며 쌓아두었던 우울함과 답답함이 소주와 함께 소화되는 것 같았다. 내일이면 나는 또 백수이고 친구들은 계속 직장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나의 이별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날만큼은 마음 통하는 오랜 친구들 덕에 잠시나마 나의 초라한 신분을 잊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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