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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Nov 13. 2023

기다릴 만큼 기다려야만

금 간 위장

계절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탓일까? 가을이 익어가는 구간에서 그만 위장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소화기 계통이 종작없다 보니 약간의 과함이나 거슬리는 냄새 한 점 든 음식에도 곧잘 탈이 나곤 한다. 한번 탈이 나면 3개월까지도 소화기관이 동력을 잃고 헤맨다. 금이 간 위장은 잔인하게 군다. 흐물흐물한 죽 몇 술에도 포만감에 도달할 정도로 기능을 앗아가는 놈이다. 고유의 기능이 감소하면 명치끝으로 통증이 올라오기도 한다.

 

살맛이 묻히는 건 당연지사다. 힘을 잃은 의욕, 풀린 매가리까지 그야말로 나사 박히듯 땅으로 돌돌 들어가는 기분이다. 밥도 빵도 커피도 그저 눈으로, 냄새로 먹어야 하는 처지에 서니 고된 신역에 동원된 사람처럼 하루하루 쇠잔해지는 느낌이다. 양방도 가고 한방도 가고 난리를 쳐댄 후에야 속이 좀 분노를 푸는 듯하다. 


신경 쓸 만한 이벤트가 있었냐고 묻는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 의사들의 공통된 진단 앞에서 읽기 어려운 문서를 납득해야 하는 것처럼 머리까지 무겁다. 무슨 스트레스일까 알아내기 위해 파고드는 것이 더 스트레스가 되는 느낌이랄까. 의식적으론 크게 문제 될 만한 것이 없는데 무의식에 웅크린 뭐가 있나 잠깐 또 고민에 빠졌더랬다.


그게 아니라면 환절기 탓이라고. 여름에 익숙해진 몸이 찬바람을 빠릿빠릿하게 수용하지 못했다는 게 그 이유. 환절기 때마다 부고 소식이 더 잦았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이젠 환절기에도 무너질 수 있는 시절이 왔구나에 당혹감마저 들었다.


계절과 동떨어진 내 상태가 한심해 욕지기가 날 것만 같았다. 차라리 매서운 겨울이든지 장대비 쏟아지는 마철이라면 이리 분개하지 않았을 텐데. 짧디 짧은 가을을 식도염으로 고생해 한다는 것이 억울해 신의 '빽'이라도 차용하고 싶었다. 앉은뱅이도 서게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분이니 손끝만 스쳐도 그 자리에서 속이 뻥 뚫리지 않을까 하고. 하루 만에 감쪽같이 나을 수만 있다면 심을 다해 아첨을 고픈 심정이었다.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크고 작은 일상들이 허공을 맴도는 나날들. 그 기다림에 미리 지쳐 스스로 일으킨 조바심은 나를 더 감질나게 만든다. 뚝딱 바뀔 상황이 아니라서 더 진력이 난다. 조급증으로는 될 것도 안 되겠다 싶어 마음을 좀  누그러뜨리는 중이나 '아직'이라는 위장의 신호에 자꾸만 힘이 샌다. 체리 씨앗은 아무 문제 없이 백 년을 기다리기도 한다는데 나의 기다림은 마냥 답답하고 갑갑하다.


가을이 화창하다고, 구절초가 한창이라고, 나와서 기분 전환하라는 사람들. 그들의 위로를 모조리 마다하고 산산한 날들을 지루하게 보내다 보니 시월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되풀이되는 시간일랑은 끊임없이 어딘가로 데려가는데 내 몸은 늘 제자리다. 겹겹이 막힌 위장 때문에 마음까지 갱지처럼 꺼칠하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말, 건강할 땐 날아가는 그 말, 잃고 나면 그때서야 후회하그 말. 그 말의 중심부를 비로소 들여다보게 되었다. 수도 없이 반복하여 듣던 말이건만 순식간에 걸려 넘어져서는 징징대는 꼴이라니. 수업이 끝난 후 고픈 배에 필요한 양분을 급하게 채운 것이 아마도 화근이라면 화근이지 싶다. 허기란 놈을 천천히 달래야 하는 체질이거늘 휘딱 채우다 보니 사달이 난 것이다. 


부모님은 약체로 태어난 딸이 안타까워 어려서부터 한약재나 특이 음식을 자주 챙겨 주셨다. 늘 신경 쓰고 애쓰는 것을 알기에 튼튼해지고 싶다는 건강 허기증 같은 게 있었다. 운동은 젬병이니 스트레칭과 걷기를 규칙적으로 꾸준히 하고 있는 데다 음식 조심은 항상 염두에 두 것도 그 이유다. 그런데도 부지불식간에 스며든 체증나도 어쩔 도리 없이 가떨어지고 다. 


식도염 하나로도 소중한 일상이 정지된다는 걸 일깨우기 위해 아름다운 계절을 관통하여 건강의 소중함을 전달한 것일 테다. 다시 한번 몸을 챙기라는 것으로 받아들였으니 시든 만큼 피어오르길 기대한다. 초조한 기다림과 조급증이 마음을 초췌하게 갉는다는 것도 알아차렸으니 불통으로 동여맨 묶음도 풀어주길 기대한다. 물러설 때까지의 시간이 아주 짧아서 기다릴 만하기를 기대한다.


아직은 위장이 개켜진 채 도도하게 움직이 중이다. 까불까불 잘 노는 그날까지 가을이 가까이 머물러주길 바란다. 아주 근사하게.




대문사진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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