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심리치료 수업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바삐 걷는 중 허리가 굽어 지팡이에 의존한 할머니가 불쑥 나타나 길을 막았다.
나랑 잠깐 얘기하다 가 젊은이
갑작스러운 일인 데다 당황한 나머지 곧이곧대로 거절하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수업 중에 그 상황이 몇 차례 떠올랐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낯선 이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의 사정이 짐작되어 송구했기 때문이다. 수업이 아니었어도 낯선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줄 만한 주변머리를 갖지 못해 구실을 찾았을 게 틀림없으나 자꾸 마음이 쓰였다.
식구들은 일터에서 저녁이나 돼야 돌아올 테고 돌아와도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줄 여력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매일매일이 혼자만의 시간일 테고 입을 열어 누군가와 대화할 짬이 없을지도 모른다. 식사나 제대로 챙겨 드실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요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인들을 돌보는 보호센터가 흔하게 있음에도 그 혜택마저 받을 수 없는 상황인 걸까? 온갖 상상을 그려 보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홀로 시간을 보냈던 엄마도 떠올랐고 언젠간 닥칠 나의 모습에도 가 닿으니 가슴이 빡지근히 저려왔다.
지금의 추세대로면 우리나라도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초고령사회로 접어들 거란다. 만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인 경우가 초고령사회다. 인구 5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셈이다. 여기에 따른 의료 인력도 확충해야 하고, 재가와 시설 서비스의 양적 · 질적 개선을 위해선 장기요양보험을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들린다. 노년 문제에 따른 새로운 정책도, 정비해야 할 시책도 부지기수인데 국가적 준비는 미흡한 상태로 보인다.
재정적 여유가 충분하다면 맞춤형 돌봄을 선택하여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겠지만 대다수가 요양원이나 보호센터의 도움이 필요한 실정이다 보니 현실은 녹록지 않다. 가족에게도 정상적인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돌봄 부담을 줄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시설의 필요성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종종 쇠약해진 노인들을 함부로 대하는 요양원이나 보호센터의 실태를 접할 때면 가족 입장에선 걱정될 수밖에 없다. 노인의 입장에서도 가족으로부터 충분한 돌봄을 받고 싶지만 가족의 경제 활동과 자유 시간까지 방해할 순 없으니 시설의 보호를 거부할 형편이 못된다. 힘없고 나약한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양질의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처지가 탐탁지 않지만 시설의 삶을 필수 과정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게 노인들의 실상이다.
'유퀴즈온더블럭(tvN)'에 '소풍'이라는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김영옥, 나문희 두 배우가 출연했다. 인생 막바지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담담하게 풀어가는 영화라고 하는데 실제 80세가 넘은 그녀들의 심정이 묻어나는 이야기라 몰입도가 높을 것 같다.
같은 날 개봉작인 일본 영화 '플랜 75'는 좀 더 현실 공포적 내용으로 마주할 듯하다. 75세 이상 고령자에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사회가 기본 설정이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존엄사를 홍보하고, 노인들은 사망 지원금 혜택을 비교하고.
노인의 삶과 고민을 담은 두 영화가 노인 문제를 개선할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낯선 이에게 불쑥 외로움을 내밀지 않아도, 몸이 불편해도 생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작년 12월 배우자를 하늘로 보낸 나문희 배우가 '유퀴즈'에서 '서른 즈음( 김광석 )'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옆에서 듣던 김영옥 배우가 눈물을 쏟으며 '이게 다 내 설움이지' 하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지라 순간 울컥했다. 흘러간 시간이 선사한 경험 덕분에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에도 고개를 주억거리게 됐다. 노년과 먼 사람들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그 말의 뜻을 헤아릴 날이 반드시 오게 돼 있다. 노인들을 위한 방책이 노년과는 먼 사람들의 시선에 달린 만큼 두 영화가 초고령사회의 실태를 제대로 짚어 그들이 세울 방침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초고령사회의 양극화, 사회 문제의 불만을 고령자에게 돌리는 분위기, 개선책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정부, 존엄사 지원 제도를 옹호하고 있다는 고령자들의 속마음, 간병 부담으로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노년, 이 모든 사항들이 순조롭게 해결되어 노년의 외로움이 아문 자리에 환한 낯꽃이 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