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지에서 모여든 청년들이 집합하라는 방송 한마디에 미적거리는 눈빛으로 두어 번 돌아보더니 연병장으로 냅다 뛰었다. 아들도 짧게 깎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그들 속으로 합류했다. 거친 세상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무서울 법도 한데 군대라는 특수성이 이미 각인되었던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빼듯이 달렸다. 나중에 물으니 눈물보일까 멋쩍어 그랬다고 고백했다.
처음 만나고 처음 겪는 사람들과 환경.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겠지만 20대 초반 아들들은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연병장으로 달려가던 그 순간부터 국가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얼마나 성장하여 돌아올지는 각자의 몫. 군생활에서 밴 습관과 정신력이 한 달이면 도루묵이 된다고들 하나 21개월이란(현재는 18 개월) 무수한 시간이 허송세월로 흩어지기야 할까.
<맡겨진 소녀 : 클레어 키건>의 어린 소녀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친적집에 맡겨진다. 소녀의 아버지는 딸을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수많은 절차를 생략했다. 마치 잠시 후면 돌아올 것처럼 작별 인사도,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도, 잘 지내고 있으라는 당부도 모조리 건너뛴 채 훌쩍 가버렸다. 소녀의 짐까지 그대로 실은 채.
어린 소녀는 처음 만난 친척 어른과 환경에 덩그마니 놓여 평소의 자기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에서 긴장감 속으로 홀연히 빠져들었다. 낯설고 두려워 전부 다 보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마음에 참을 수 있다고 암시를 깔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군인은 제대라는 합법적 종료를 고대할 수 있지만 소녀는 기한을 알 수 없었다. 더부살이가 될지 양녀가 될지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를 불확실한 삶이 시작된 그때 소녀는 증오라는 말조차 알지 못하는 어린애였다.
친척집에 딸을 맡기면서 소녀의 아버지는 "먹을 것을 엄청 축낼 테니 일을 시키라"고 강조했다. 딸을 맡기는 처지가 미안해서 한 변죽울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여러 가지 상황들을 조합해 보면 자신의 무능을 정당화하려는 수작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염치없이 맡기니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일반적인 아버지의 모습일 텐데 그에게선 애정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소녀를 책임져야 할 짐 정도로 여긴 아버지가 맞을 듯싶다.
"열두 달이 지나면 다 잊어버릴 거라고"도 했다. 무책임한 태도에 더해 냉정하기까지 하다. 친척집에서 어떤 삶을 이어갈지, 그 상황이 어떤 상처로 남을지 헤아리지도 못한 아버지다. 시간이 지나면 별일 아닌 것처럼 쉽게 잊힐 거라고 여기는 아버지의 발상은 죄책감 회피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그동안도 방치되다시피 살았을 딸일 텐데 맡겨진 동안만이라도 사랑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소녀를 맡게 된 킨셀라 부부는 봄빛이 무르익어 언 땅을 녹이듯 꽁꽁 얼어붙은 소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 어른이었다. 소녀는 킨셀라 부부로부터 평안을 얻었고 맘껏 삼킬 수 있는 사랑을 받았다. 배려의 대상이 되어 후한 대접과 따뜻한 돌봄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와는 대조적인 사람들로 소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어 앞으로 펼쳐질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아버지가 결핍의 상징이라면 킨셀라 부부는 사랑과 치유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름 끝에 소녀가 원래의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왔을 때 우물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나 삼일 더 친척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소녀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 보여주는 상황이 아니었나 짐작한다. 무관심과 방치의 환경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저항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구출되고 간호받으며 사랑의 힘을 다시 얻은 소녀는 집으로 가더라도 전처럼 상실의 대상으로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킨셀라 부부에게 받은 환대를 밑거름 삼아 당당하게 성장할 거란 기대감이 풍겼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데려다주고 떠나는 아저씨에게 달려가 힘껏 안긴 채 자신을 데리러 내려오는 아빠를 보며 한 말이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는 더는 자신을 방치해선 안 된다는 요구처럼 들렸다. -그를 부른다 아빠-에선 자신에게 헌신과 사랑을 베푼 아저씨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라고 불러본 것은 아닐는지. 소설 끝 마지막 대사는 소녀가 갖게 된 내면의 힘을 대신하는 강렬한 한 마디로 울리는 듯했다.
<맡겨진 소녀-클레어 키건>를 읽으며 <그리운 메이 아줌마-신시아 라일런트>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포리스터 카터>이 떠올랐다. 킨셀라 부부와 메이 아줌마, 체로키족 리틀트리의 조부모는 어린 주인공들을 사랑으로 감싼 어른들이다. 그들 덕분에 어린 소녀와 소년은 상실을 극복할 수 있었고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리틀트리의 조부모 외에 사랑과 치유를 베푼 주체는 혈연에 국한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힘이 돼야 할 가까운 혈연이 상실의 주체가 되는 것을 목격했다. 어린 주인공들의 시선에서 다룬 가족의 성분은 사랑과 관심이란 사실을 기억해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일 따윈 하지 말이야 할 것이다.
굴곡 없이 담담하게 써 내려갔지만 위안이 뭔지, 정서적 안정은 무엇을 통해서 오는지, 무관심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보도록 유도한 작품 <맡겨진 소녀>. 맡길 땐 맡겨진 입장을 보는 눈이 탁해선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