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 쬐며 단풍 진 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걷듯 뛰다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들린 동네 마트가 마침 5주년을 맞아 세일을 하고 있어 양상추와 계란을 아주 값싼 가격에 사 왔는데 버터를 넣고 계란 프라이를 하니 괜히 호화로운 느낌이다. 물을 너무 많이 잡아 어설프게 지어진 냄비밥에 아빠가 만들어준 강된장을 듬뿍 넣고 계란을 올려 촥촥 비볐다. 올초에 선물 받았던 핸드로션이 생각나 개봉하니 낯선 향기로움에 기분이 고조된다. 몸을 움직인 덕분인가, 머릿속을 스산하게 했던 잡생각이 흩어 빠져나가고 모든 것이 온전하고 따뜻한 느낌.
머릿속이 사나워질 때면 어리석게도 '나'를 지우고 주변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하여 누구는 무엇을 했고, 누구는 어디에 살며, 누구는 얼마를 번다-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이 끼어들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의 배역을 함부로 여기는 프로의식 없는 주연 배우는 비난받아 마땅하므로 오늘같이 안정을 찾은 날에는 자기 비하를 곁들인 반성을 하게 된다. 세 잎 클로버 더미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는 사람들을 두고 행운을 마주하기 위해 수많은 행복을 지나치는 중이라고들하는데 나 역시 행복은 지천에 있는데 오히려 손쉬워 존재조차망각하진 않았나.
얼마 전 다녀온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 한편에 간략하게 적힌 그의 일생 중 말년은 생활고로 힘겨웠으며 자신이 보모로 키웠던 아이들의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꾸렸다고 전하고 있었다. 평생토록 애정을 들여 쏟아낸 자신의 작품과 개인 수집품들을 창고 보관비용을 대지 못해 경매로 넘기고 난 후, 어떤 기분으로 매일매일을 이어갔을까. 전시물 영상에서 거리 사진가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사교성을 발휘하지만 실은 고독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나는 비록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것만 같았다. 피사체에게서 반짝거림을 찾아내고 사진기를 통해 세상에 드러내는 과정은 오로지 사진가의 몫이다. 사후에야 빛을 발하게 된 그의 사진에서 조용한 탐닉을 경험한다. 사유는 오롯이 고독하다.
전시물 중에는 그의 육성을 들려주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가 돌보았던 아이들이나 그 가족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한 것이었다. 이미 치매로 기억이 온전치 않은 할머니를 대할 때도, 답변이 미숙한 아이들을 대할 때도 그는 일정하게 차분했다. 추정컨데 인내심 넘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진에 녹아든 사람을 향한 시선에는 흑백을 뚫고 전해오는 유머러스함과 따뜻함이 있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종종 냉소 짓던 나조차 무장해제시키는.
나는 칭찬을 받아도 쑥스럽기만 하고 순수하게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전하는 나에 대한 좋은 평가가 진심임을 안다. 하지만 어딘가는 부족했겠지, 인사치레겠지, 여기고는 스스로가 한 일을 평가절하하곤 한다. 15만 장의 작품을 남기고도 은둔을 자처하며 보모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는 비비안 마이어 스스로는 자신의 사진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사랑하지 않는 일을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사랑한 것이 사진 그 자체였을까, 순간을 담는 행위였을까, 대상에 집중하는 예술가적 순간이었을까. 스스로의 작품을 혼자나마 자랑스러워했을까 혹은 그저 자격지심에 수없이 찍고도 덮어 두었을까.
평안한 하루를 보내고 나니 그런 의문들이 오히려 이상스럽게 느껴진다. 생전에 어떤 인정을 받았는가, 그리하여 어떤 부를 축적했는가에 집중하는 것은 오만하게도 주인공을 누락한 생각이다. 예술가로서의 가치는 그녀 개인이 아닌 관객과 평단이 정하는 것일 뿐, 내가 오늘 고작 가을볕에 감동받고 행복감을 느낀 것처럼 그의 일상 하루하루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보모로 돌보는 소년소녀가 건강하여 기쁘고, 그들에게 애정을 나눠 줄 수 있어 기쁘고, 그녀의 적성에 맞는 일로 생계를 꾸리다 사진이라는 꾸준한 취미를 할 수 있어 행복한. 적어도 그는 대단한 예술가로 발견되는 행운을 바라 주변의 행복을 가벼이 넘기는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관람 끝에 구입한 그녀의 작품이 담긴 사진엽서를 다시금 바라본다. 더없이 행복한 하루가 천천히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