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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영 Nov 06. 2018

테리베르카에서의 시간은

세상의 끝에서

북극러시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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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테리베르카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렸다.


콜라 반도


테리베르카는 인구 50명 가량 되는 북극해 연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러시아 영화 <리바이어던>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 출입금지구역이었으나 <리바이어던>의 개봉과 동시에 외국인 출입이 허용되었다.


테리베르카(Териберка)의 '테리'(терь)는 콜라 반도의 지역 언어로 '연안'이라는 뜻이고, 역시 러시아어로 '연안'을 뜻하는 베레그(берег)와 합쳐져 지금의 이름이 만들어졌다. 마을은 북쪽 부분과 남쪽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두 마을 사이의 거리는 약 4~5km정도 된다. 당연히 버스 따윈 없다. 북쪽에는 슈퍼가 하나 있고, 남쪽에는 식당이 하나 있다. 그게 끝이다.



도착하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팠다. 무르만스크에서 고작 점심 한 끼 먹은 뒤로 먹은게 없었다. 마을의 유일한 슈퍼는 밤 9시에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고, 내 가방 속에는 감자칩 하나랑 환타 한 병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없어졌고 나는 주린 배를 붙잡으며 텅 빈 호스텔 안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밖은 환했다. 자정이 가까워졌지만 딱히 졸리지도 않고 바깥도 밝고 해서 산책을 나왔다.


마을의 유일한 교회. 진짜 교회다.


호스텔은 그냥 거기 있던 아파트 하나에 가구 빼고 이층 침대 두 개를 넣은 구조였다. 관리인도 없이 나 혼자 그 공간을 차지했다. 좋을 것 같지만 아파트 건물이 너무 낡아서 공포 그 자체였다. 과장 없이 작년에 체르노빌 갔을 때보다 이 때가 더 무서웠다. 현관만 열고 나오면 보이는 어두컴컴한 계단에는 무슨 '쏘우' 같은데 나올법한 흉칙한 벽과 새까만 천장, 너무 어두컴컴해서 어디 쥐가 나올것 같은 공간을 빠져나와 밖으로 탈출했다.


저 건물 2층


밖에는 간간이 한 두 명이 돌아다닐 뿐 고요했다. 여기에 이틀 동안 있을 건데 북쪽 마을과 남쪽 마을 사이를 왔다갔다 해야 해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한 번 걸어가보기로 했다.


왓더....저건 대체 왜써놓은거....


얼마쯤 걸었을까. 영화에서 봤던 뱃무덤이 보였다. 한 때 북극항로를 지나며 여기저기 누볐을 배들은 이 곳에서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로 죽어있었다.



남쪽 마을까지 걸어가는 데는 약 한 시간 가량 걸렸다. 북쪽 마을에 소련식 아파트가 두 세개 있었다면, 남쪽에는 낡아빠져 쓰러져가는 주택들 수십 개가 흩어져 있었고 바닷가도 있었다. 모기도 많았다.


마을


바닷가에 나가보았다. 파도가 소리를 내며 치고 있었지만 죽은 파도였다. 이게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고 도저히 생각이 안되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게 새벽1시라서 다들 잠들었을 때였다)


북극해 도착!


무슨 '인류의 대멸망'(?) 이후 운좋게 살아남아 인간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니는...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는 주택들 중에 아 저기에는 사람이 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집은 정말로 단 한 개도 없었다. 마치 주택의 공동묘지 같았다. 마을 저 멀리 어디선가에서는 누가 무엇을 바깥에서 태우는지 회색 연기가 폴폴폴 나고 있었다.


뱃무덤과 주택무덤(?)을 보고 나니 이 유령 마을같은 곳에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하면 아무런 도움도 못 받겠구나 하는 불안함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냥 이런 집들이 수두룩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데만 걸어서 또 한 시간. 심지어 중간에는 언덕. 겨우 숙소에 돌아오니 새벽 두 시.


밖은 여전히 환했고 씻고 누웠는데 낮잠을 자는 느낌이었다. 피곤해서 바로 곯아떨어졌다.


오전 11시쯤 되어 다시 눈이 떠졌다.


핸드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는데, S 서기관님이었다. 뭐지 내가 또 무슨 사고쳤나 하고 갑자기 불안해져서 다시 전화드렸더니 그냥 같이 점심먹자는 것이었다. (카톡 상메를 휴가중이라고 써놔야겠다...)



어제 남쪽까지 걸어보고 안되겠어서 오늘은 호스텔 주인한테 전화걸어서 차좀 태워달라고 했다. 와... 차로 오니까 5분이면 오는 거리를 어젯밤에는 두 시간을 왕복했다니.


어젯밤의 바닷가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구름이 걷히면서 해가 떴고 새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마을의 유일한 식당에 삼삼오오 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굶주렸던 나는 메뉴를 보고 2~3인분을 시켜서 그걸 또 다 먹었다. 먹고 좀 살만 해져서 H에게 엽서를 쓰기 시작했고 과외숙제도 좀 했다.


그 때 한 러시아인 커플이 내게 말을 걸어와서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를 만드는 커플이었는데, 차로 러시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영화 촬영지를 물색하는 중이라고 했다. 여기를 대체 어떻게 왔냐고 내게 물어봤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화 <리바이어던> 얘기도 나누었다.


<리바이어던>은 러시아에서 꽤 논란이 되었던 영화로 러시아의 시골 지역에서 일어나는 부패 사건과 그에 맞서는 한 남자를 다루고 있다. 러시아 지방정부가 지방기업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그것을 노골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불편해하는 러시아인들이 꽤 많았다.


특히 리바이어던의 주요 촬영지가 무르만스크 주, 그 중에서도 여기 테리베르카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영화의 호불호는 여기에서 특히 명확히 갈렸다. 누구는 러시아의 부정적인 모습만 부각시켜 이미지를 깎아먹는다고 싫어했고, 누구는 실제 상황에서 조금도 과장하지 않은 그럴듯한 사건이라고 얘기했다.


이 영화에서 다룬 여러 특별한 오브제들(폐허, 죽은 배, 강렬한 북극의 파도 등)이 테리베르카에 널려있고 그 배경 속으로 직접 들어가 주인공이 느꼈을 법한 것들을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그들은 나와의 수다를 끝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인스타 주소를 남기고 떠났고, 나 역시 짐을 주섬주섬 챙겨 바깥 해변으로 나왔다.



해변가에는 벤치가 하나 있었어서 거기에 자리틀고 앉아 책을 좀 읽었다. 7월 초인데도 칼바람이 불어서 너무 시원하고 좋았다.


이보 안드리치 단편소설집


마을은 생기가 돌고 있었다. 폐허처럼 생겼던 집에서도 누군가가 살고 있었고, 군데군데 굴뚝에서는 연기도 났다.



신기한 마을이었다. 이 곳의 낮과 밤은 빛의 유무가 아닌, 삶의 유무였다. 이 작은 바닷가 마을은 낮에는 살아있고, 밤에는 그냥 유령마을이었다. 반면에 빛은 이 마을의 계절을 말해주었다. 밝은 기간은 여름, 어두운 기간은 겨울. 12월 경이 되면 낮이고 밤이고 이 마을에 빛은 거의 없다.


이 곳에서의 시간은, 빛과 어둠과 삶과 죽음이 함께 신기하게 얽혀서 지속되고 있었다.


다시 차를 타고 북쪽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의 북쪽 끝을 지나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트레킹 코스가 나오는데, 이 길을 쭉 따라가면 폭포가 나온다고 그랬다. 폭포는 역시 <리바이어던>에 나온 장면이기도 하다. 쭉 올라가다가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밤도 늦었길래 아무도 없는 바닷가 벌판 한복판에서 사진 한 방만 찍고 다시 돌아왔다.


삼각대 짱


다시 씻고 돌아와 누웠고 암막 커튼 하나 없이 밝은 방 안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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