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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영 Dec 11. 2018

볼가, 그리고 러시아

마더 러시아,  볼고그라드 (1)

볼가, 볼가.


1930년대 소련의 프로파간다-뮤지컬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볼가, 러시아의 ‘젖줄’ - 볼가.


<볼가-볼가> (1936)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I. 레핀. (1873)

볼가 강은 그 자체로 러시아 강을 대표한다. 나아가 러시아 자체를 상징한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 상징성이 실로 대단해서, 여러 문학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 그림 등 수많은 예술 작품에 등장한다.


본류 길이 3700km로 (한강은 500km(!))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강이다. 고대 러시아의 작은 도시국가들이 꾸물꾸물 생기던 중부 러시아 평원에서 발원하여 ‘황금 고리’라 불리는 러시아 중세 도시들(야로슬라블, 코스트로마)을 지나 (정작 모스크바는 지나지 않는다!) 니즈니-노브고로드, 카잔 등 굵직굵직한 도시들을 지나 남부의 거대한 평원을 흘러 마지막으로 아스트라한, 카스피해와 만나면서 끝이 난다.


드넓은 볼가 강


볼가 강이 관통하는 여러 도시들 중에서 대표할 만한 도시는 단연코 볼고그라드인 것 같다. 이름부터가 ‘볼가 강의 도시’. 러시아 남부 대평원 한 가운데 외딴 곳에 자리잡은 볼고그라드는 굽이치는 볼가 강변을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생겼는데, 예전 이름은 스탈린그라드(Сталинград), 짜리찐(Царицын) 등으로 불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볼고그라드의 상징, 조국-어머니 동상


6월 말, 대통령 국빈방문 행사가 끝난 뒤에 받은 휴가 동안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러시아 월드컵 호스트 시티 중 하나인 볼고그라드 행 비행기표가 싸게 풀려서(Pobeda 항공) 볼고그라드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볼고그라드는 관광도시는 아닌 것 같다... 러시아의 대표적 관광지(모스크바(+근교 황금고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치, 카잔, 크림 반도, 블라디보스톡 등)축에는 끼지도 못 한다. 다만 볼고그라드는 뭔가 '기억'을 위한 도시? 도시 자체가 하나의 동상처럼 박제된 느낌이랄까.


볼고그라드에는 딱히 산업이랄 것도 없고 관광자원도 없다. 그런데 그러면서 도시(비록 낡았지만) 지위를 유지하며 월드컵까지 호스트 할 수 있는 것은 나름의 존재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전쟁, 독일군 공습, 기근, 화재 등의 재앙이 닥친 '마마예프 언덕' 위에 올라 장검을 뽑아들고 눈을 부릅뜨며 사람들에게 부르짖는 '어머니-조국'의 동상. 그 동상 자체가 볼고그라드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출발 당일 저녁에 브누코보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탄 후 몇 시간쯤 남쪽으로 날아가 볼고그라드 공항에 도착했다. 어딜 가든 여행지의 첫 인상은 날씨다. 비행기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오는데 뜨거운 공기 때문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카스피해랑 흑해를 양 쪽에 끼고있으면서도 끔찍한 대륙성 기후라 겨울에 영하 30도, 여름에는 40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볼고그라드 공항은(사실 공항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도시인프라 자체가!) 월드컵을 맞아 새단장을 해서 매우 깨끗하고 편리하게 되어있었다. 그렇게 기분좋게 바로 공항을 나와서 (배낭 하나만 매고 와서 짐을 안부쳤음) 시내버스를 타고 도시로 들어가려 했다.


볼고그라드 공항


요금을 내야 해서 배낭을 열어보는데 지갑이 없다. 배낭에 주머니가 몇 개나 된다고 여기저기 다 열어봤는데 없다. 나는 성격상(칠칠이) 이런 일들을 매우 자주 겪는데(!), 이런 경우 일단 현실 부정이다. ‘아냐, 분명 여기 어디 있어... 잘 찾아보자 나ㅅㄲ야...’ 지갑이 없다는 현실을 인식한 뒤에는 눈 앞이 아득해진다. 일단 버스에서 내린다. 차분히 공항 대합실 의자에 앉아 기억을 되돌려 본다. 비행기에서 두고 내렸나? 분실물 센터에 가 보니 없다고 한다. 의자 틈새에 빠진 것 아닐까? 하지만 비행기는 이미 사람들을 태우고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가버렸다. 설마 공항에 두고 온건가... 분명히 비행기 타기 전에 물 사먹었는데.


아무튼 없는 건 없는 것이고, 또 앞가림은 다른 얘기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아본다. 다행히도 Yandex Taxi 어플(러시아판 카카오택시)에 카드 연동을 해 놓아서(구세주..!) 15루블짜리 버스는 못 타도 300루블짜리 택시는 타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지갑의 행방을 뒤로 하고 택시를 잡아 시내로 들어갔다. 이미 밤이 늦어서 호스텔에서 바로 짐을 풀려는데, 호스텔에 도착해서 돈을 내야하는데 지갑이 없...지만! 다행히도 미리 깔아놓은 Sberbank 어플로 호스텔 주인한테 숙박비를 토스해서 입금했다. (광고아님) 핸드폰 없었으면 정말 어쩔뻔... 이런 것이 진정한 21세기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사정을 설명하면서 돈을 조금 더 입금하고 현금으로 되돌려 받았다. 드디어 나에게도 현금이 생겼어... 약간 구걸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무일푼인 것은 매한가지.


아무튼 그렇게 닥쳐온 위기를 능숙하게 대처하나 싶더니, 외국인 숙박을 위해 여권을 통한 '거주 등록'을 하려는데 입국카드(миграционная карта)가 없는 것. 어디 흘린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사무실에 두고 온 것 같다. 문제는 원칙적으로 입국카드가 없으면 숙박시켜줄 수 없으며, 월드컵 기간동안 법 강화로 모든 외국인은 24시간 이내 거주등록이 의무다. 그냥 운수 좋은날 정도가 아니라 운수 대통에 잭팟 터진 것.


사정을 잘 설명하니 다행히 주인분이 좋은 분이어서 그냥 넘어가주셨다. 어차피 숙박도 이틀밖에 안하기도 했고. 하지만 서러울 틈도 없이 새로운 곳에 왔다는 설렘에 가득 차 침대에 드러누웠고,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감기가 걸렸다. 40도의 펄펄끓는 볼고그라드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호스텔 건물을 나왔다. 볼고돈스코이 운하 투어를 예약해놓아서 '중앙 광장'으로 가야 했다. 당연히 이동 수단은 택시. 돈을 아끼기 위해 택시를 타는 아이러니다. 카드가 없어서 ATM 인출도 못 하므로 현금의 중요성은 더욱 커 진다. 무전여행?



볼고-돈스코이 운하(Волго-Донской судоходный канал)는 이름 그대로 볼가 강과 돈 강을 잇는 운하다. 둘 다 러시아 남부를 흐르지만, 볼가 강은 카스피해로, 돈 강은 흑해(아조프해)로 빠진다. 이 둘을 잇는 운하가 만들어지면서 카스피해, 흑해-지중해, 발트해 나아가 북극해까지 뱃길이 뚫렸다.


도시 중심부(라고 하기에는 조금 초라한)인 레닌 광장에 도착해서 투어 버스를 기다렸다. 러시아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곧 도착한 버스를 타고 출발했는데, 나이드신 아주머니 가이드가 쉴새없이 설명을 하는데 처음엔 좀 들으려다가 포기했다. 러시아어 청해 힘들다... 여튼 버스를 타고 볼고그라드 시의 가장 남부에 위치한 구역인 크라스노아르메이스키 구역(Красноармейский район, 붉은군대 구역)으로 향했다.


동상 뒤쪽은 강이 흐르는 낭떠러지(?)이다.


누가 동상의 도시 아니랄까봐, 세계에서 제일 큰 레닌 동상이 이 뜬금없는 곳에 위치해 있다. 사실 러시아 곳곳에는 레닌의 동상이나 벽화가 많이 남아있다. 반면 스탈린의 동상은 1960년대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거진 대부분 철거 되었다. 특이한 점은, 동상이라고 하면 보통 광장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기 마련인데, 여기 있는 레닌은 뒤돌아서서 강 쪽을 보고 있는 것이다. 뒤통수 만 보이는게 이유가 있겠지 싶다. (그다지 노력을 들여 알고 싶지는 않았음)


레닌이고 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대체 눈을 뜰 수가 없다. 이놈의 날파리мошки들이 수 백마리가 얼굴이고 몸이고 팔다리고 들러붙어서 걸어다닐 수가 없다... 내가 문제인가? 해서 보니 옆에서 걸어가는 러시아 아줌마 등 뒤에는 수십마리가 이미 붙어있다^^;; 여기 사람들은 너무 태연하게 휙휙 팔을 내저으며 걸어다니고 있었다...


동상이 크긴 크다


그렇게 (날파리들이랑) 동상을 대충 보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볼고돈스코이 운하로 배를 타러 향했다. 러시아 남부의 광활한 황금빛 평원을 달렸다.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에 끝없이 펼쳐진 대지, 그 대지를 가로지르는 쭉 뻗은 도로, 그 도로가 향하는 반듯한 지평선, 이런 것이 러시아 아닐까 싶다. 이런 진부한 생각도 에어컨 나오는 버스 안에서 편하게 시원한 콜라나 꼴깍꼴깍 마시니 드는 것이지, 버스에서 한 발자국만 나가기만 해도 뜨거운 태양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터. 'утомлённые солнцем' 되는 것이다. 가이드는 계속 중얼중얼 무언가를 말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거 이어폰으로 노래나 들으며 계속 지나가는 평원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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