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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영 Jan 12. 2019

이건 다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소치...너는 나랑 안맞아...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공항철도를 타고 브누코보 공항(모스크바 제3공항)에 가는 길, 새로운 여행지에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도 잠시, 다음 여행지를 알아보고 있었다.

다음주 주말에는 또 어딜가나 하는 행복한 고민에 젖어있다가 싼 가격에 충동적으로 구매한 소치 왕복 항공권! ALROSA 항공이라는, 난생 처음들어보는 항공사였지만 일단 예약부터 했다.

여행을 갔다온 후,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뒤지며 소치 여행 관련해서 검색을 했다. 알고 보니 알로사 항공은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채굴회사 ‘알로사’(Almazy Rossii-Sakha)의 자회사로, 시베리아 한 가운데 있는 금광까지 노동자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만든 항공사였다...애초에 여행자들을 위한 항공사가 아니었음.

주말 이틀동안만 다녀오는거라 연착 안되고 제대로 갈 수 있겠지...?라는 불안감은 일단 넣어두고 토요일 아침, 도모데도보 공항(모스크바 제2공항)으로 출발했다.

다행이 연착없이 발권 성공했고 비행기로 다가가는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비행기였다. 에어버스도, 보잉도 아닌 소련에서 만든 TU-154M 기종으로, 끔찍하게 낡은 비행기였던 것이다.


ALROSA TU-154M


날카로운 칼을 가는 것 같이 귀가 찢어질 듯한 엔진 소음에, 꼬리꼬리한 냄새가 나는 기내, 충격적인 화장실까지... 창 밖을 보니 뒤통수 옆에 엔진 세 개가 달려있는데 안 시끄러운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륙할 때 봤던 흑해의 쌍무지개는 왠지 이번 여행이 좋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경기도 오산이었음)



소치 공항에 도착해서 나온 후 후텁지근한 공기를 뚫고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소치는 ‘소치 시티’와 ‘아들러(아들레르)’로 나뉜다. 두 도시는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내버스 기준 2시간이 걸린다. 공항의 경우 소치 시티까지 1시간 30분 가량이 걸리는데, 나는 투어를 오후에 예약했기 때문에 얼른 시내로 가야 했다.

시내버스는 도시로 향하는 사람들로 금세 만원버스가 되었다. 한 시간 반동안 만원 버스에서 서서 가는 것 실화...? 그 와중에 에어컨 안나오는 버스는 리얼 사우나 실화...? 버스인지 굴러가는 찜통인지 모른 채 어찌저찌 시간은 흘렀고 시내에 도착했다.



버스정류장 근처 싸구려 식당에서 점심을 대충 때우고 투어 버스를 기다렸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휴양지 느낌이 물씬 난다! 해안도로를 따라 곳곳에 늘어서 있는 고급 별장과 저택들, 야자나무와 온갖 빛깔의 장미, 선글라스를 쓰고 튜브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까지!

곧 버스가 왔고 투어를 시작했다. 이번 투어는 소치의 한 와이너리에 들러 시음을 하고(쇼핑일정?) 숲 속을 잠깐 산책한 뒤 아훈 산 전망대에 들러서 소치를 발 아래에 내려다 보는 것이다.


와이너리

와이너리에서 마신 와인이 진짜 맛있었다. 달달한 와인을 좋아하는 내게 딱이어서 한 병 사고싶었다.

숲 속으로 들어가니 옛날 메이플 스토리의 ‘엘리니아’가 따로 없었다. 흑해의 습하고 뜨거운 공기로 꽉 찬 소치 한 구석에 이렇게 시원한 숲에 있으니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훈산 전망대는 소치와 아들레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전망대로, 스탈린이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얼핏 보면 성벽의 일부가 남은 것처럼 보이지만, 애초에 저 건물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발 아래에 보이는 반짝이는 흑해와, 그 양 쪽으로 소치와 아들레르, 뒤 편으로는 넓게 펼쳐진 서카프카스 산맥을 볼 수 있다.


아훈 산 전망대


투어를 마무리하고 소치 시내로 돌아왔다.

이제 뭐하지...?

소치는 러시아의 대표적 휴양지이지만, 관광지로서의 매력이 뛰어난 곳은 솔직히 아니다... 그 말인 즉슨 할 거리가 많이 없다는 것. 인터넷을 뒤져봐도 우리 강산에서 충분히 보고 즐길 수 있는 익숙한 것들이다.

그래도 일단 이 뜨거운 날씨에 산책을 했다.



소치 항구에 가면 쭉 요트가 늘어서 있고 맛집이 많다. 늦은 오후 저녁 때가 되자 프랑스 음식점에 들러 달팽이요리와 파스타를 먹었다. 난생 처음 먹은 달팽이...너무 맛있었다. 짭조름 호로록!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야간 유람선을 타러 항구에 나갔다. 밝은 보름달은 흑해를 비추며 흰 빛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밤의 소치는 노란 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솔솔 바람부는 기분 좋은 저녁, 호스텔로 돌아왔다.



소치의 첫 날은 너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쿵짜풍짝 시끄러운 호스텔 룸메이트들... 잠을 못 잤다...후...

여기서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한다.

다음 날 새벽, 또 다른 투어를 가기 위해 호스텔을 나섰다.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아무래도 버스가 안와서 시간을 맞추지 못 할 것 같아 택시를 앱으로 호출했다.

곧 택시가 왔고, 투어 출발지까지 30분 정도를 달렸다. 버스 기다리면서 시간 알아보고 이른 아침 주변의 시선들 신경쓰느라 정신 없던 나는 택시를 타자마자 안심하여 긴장의 끈을 살짝 풀었다.

택시비는 앱으로 자동 결제 되니 일단 그냥 내렸다. 너무 목이 말라 슈퍼를 갔는데 응?

응???

지갑???

내 지갑 어딨지? 가방에 왜 없는 것이지...?

눈 앞이 까마득해진다.

아... 일단 앉아서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분명히 오늘 아침 버스정류장에서 손에 지갑을 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1) 가방 뒷주머니에 넣는 걸 보고 거기 버스정류장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슬쩍했을 가능성 2) 택시에 두고 내렸을 가능성 두 가지. 하지만 아무래도 2번이 가장 가능성이 크고 희망의 끈이 남은 편이었다.

앱으로 호출했기 때문에 기사 연락처가 있어 연락을 해 봤으나 아무리 간절한 기도도 먹히지 않았다. 없다는 대답... 있어도 있다고 하겠나..ㅠ

기적은 두 번 일어나지 않는다. 볼고그라드 갈 때 잃어버린 지갑을 찾았을 때 정신 차렸어야지...

일단 투어를 해야 하니 눈물을 머금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배를 타고 흑해 바다로 나아가 돌고래(!)를 구경하는 투어다.

나와 몇몇 러시아인들이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다로 나아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온통 지갑 생각으로 씁쓸했다ㅋㅋ



그래도 돌고래들 보면 신기하고 재밌겠지 했는데 불안하게도 가이드 표정이 좋지가 않다. 소치 바다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데도 돌고래는 커녕 미역 한 가닥 보이지 않는다.



...결국 실패하고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왔다ㅋㅋㅋ 아...소치....너와는 인연이 아닌 것 같구나.

모스크바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일정은 아들레르에 들르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진 ‘소치 동계올림픽’ 중 빙상경기는 바로 이 곳 아들레르에서 열렸다. 버스를 타고 올림픽 공원으로 갔다.



황량한 아스팔트 대지에 작열하는 태양, 죄다 탁 트인 공간이라 그늘 하나 없다.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 유령 도시 느낌? 현란한 구조물들 만이 민망하게 서 있을 뿐이다. 다만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당시 김연아와 소트니코바의 대결이 펼쳐졌던 스케이트장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때를 생각하며 아무도 없는 거대한 광장을 뙤약볕 아래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다가 지쳐 벤치에 좀 쉬었다. 그 와중에 또 매점은 문을 열었길래 시원한 콜라를 꼴깍꼴깍.

그러면서 생각한다. 러시아인들은 하나같이 소치를 찬양하는데 대체 왜?? 여기보다 ‘뺘티모르스크’(이전 글​ 참고)에 볼 거리가 더 많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

1. 가족 친구들과 오면 재미있다! 여행지가 특별하다기 보다는 따뜻한 기후와 별장 수영장들이 많아서.
2. 러시아에는 ‘해변’이 거의 없다. 러시아가 접한 해안이라고 해봐야 멀쩡한 해변이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흑해에 접한 소치가 너무 소중한 것?!

안되겠다. 소치에서 더 있다가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공항으로 향했다. 마침 비행기 출발할 시간. 미련 없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미련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 지갑... 이건 모두 내 부덕의 ‘소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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