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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자꾹 Sep 25. 2024

얼떨결에 태국?_그 세 번째

나를 구해준 것은... 그리고 남은 이야기

               

동생은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려고 최선을 다했다. 휠체어를 밀고 물리치료실에 데려다주면 시간을 꽉꽉 채워서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았다. 아침저녁으로 틈만 나면 목발 짚고 걷는 연습도 했다. 통증이 심했을 텐데도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던지,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눈물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잤다. 태국 병원에서 나오는 음식은 말 그대로 현지인들을 위한 음식이었다. 내게는 그 향이 참기 힘들 정도로 진했다. 동생은 병원에서 주는 음식이 푸짐하니까 나눠 먹자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동생은 음식을 버리는 게 아깝다며 고수 향이 그득한 그 현지식들을 다 먹었다. 하루하루 얼굴에 살이 붙고 표정도 밝아졌다.      


그 반면에 나는 하루하루 살이 빠져나갔다.

 병원에서 간호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생각보다 고된 노동이다. 특히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간호할 때는 늘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한다. 한 마디로 몸이 많이 축나는 일이다. 그래서 환자 보호자에게도 영양 보충이 엄청 중요한데, 나는 태국 현지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던 날에 사고 차 주인과 남편과 같이 갔던 식당에 다시 가봤지만, 메뉴판을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었다. 배가 고프니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나는 동생이 잠든 사이에 병원을 탐험해 보기로 했다. 층별로 구석구석 내려가며 다녀봤지만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파는 곳을 찾지 못했다. 결국 1층까지 내려갔다. 1층 병원 입구 한쪽으로 편의점이 보였다. 혹시 하는 기대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내부를 한 줄 한 줄 샅샅이 훑다가 일본식 도시락이 내 눈에 띄었다. 전자레인지에 잠깐 돌려서 먹는 것이었다. 정확한 금액은 기억이 안 나지만 값이 상당히 비쌌던 걸로 기억난다. 그렇지만 더 이상 먹지 않고는 한 시도 버틸 수 없었기에 주저 없이 하나를 골랐다.   

    

병실에 와서 포장을 뜯어 한 젓가락을 입안에 넣는 순간 ‘할렐루야!’ 교회에 다니지도 않는 내가 환희의 찬가를 부를 뻔했다. 동생이 깰까 봐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환호성을 온몸으로 내질렀다. 나는 일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때는 그 이상의 꿀맛은 없었다. 그때부터 그 편의점은 내 아지트이자 보물창고였다. 날마다 어떤 도시락을 먹을까 고민하는 게 행복했다.    

  

동생의 주치의는 아침마다 웃는 얼굴로 찾아왔다. 수술한 다리는 잘 붙고 있으니 열심히 걷는 연습만 하면 된다고 우리를 응원해 주었다. 간호사들도 늘 친절하게 돌봐 주었다. 나흘 정도 지나자, 동생이 한나절은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 지난번에 왔던 통역사를 불러 가이드 겸 방콕 시내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불편했다. 동생을 병원에 혼자 남겨두고 관광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었지만, 동생이 정신을 차리고부터는, 동생이 탄 휠체어를 밀고 병원 탐색도 하고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들도 나눴다. 우린 그리 살가운 자매가 아니었고, 내가 20대 중반에 결혼하고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았기에 별로 이야기 나눌 시간도 이야깃거리도 없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두런두런 옛날이야기도 하고 예비 신부인 동생에게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참고할 거리를 알려 주기도 했다.     


낮에는 동생을 보살피고 운동하는 걸 지켜보고 도와주면 시간이 금방 갔다. 하지만 밤이면 아이들이 생각나서 동생 몰래 울곤 했다. 어쩌다 한 번 통화하면 아이들도 엄마가 보고 싶다 했다. 남편은 애들이 학교도 잘 다니고 밥도 잘 먹는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둘째는 아직도 엄마 껌딱지라 맘이 더 아팠다. 하루빨리 돌아가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의사는 퇴원해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퇴원 수속이 예정된 전날 저녁 사고 차 주인이 다시 찾아왔다. 정말 잘 되었다며 나중에 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었다. 나도 꼭 그렇겠다고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날 밤엔 드디어 집에 돌아간다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사고 차주가 보내준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우리는 큰 불편 없이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했다. 휠체어를 타야 하는 동생을 차에서 타고 내리는 것도, 공항에서 해야 하는 수속 절차도 그쪽 분이 도와주어서 수월하게 마쳤다. 그때 동생과 나는 돌아가서 재활만 잘하면 아무 걱정이 없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열흘 정도 남았던 걸로 기억한다. 면세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활기찼다. 반액 할인도 많았다. 동생은 일주일 내내 병원에만 있던 언니한테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며 선물을 하겠다고 했다. 가방은 힘들어도 지갑은 사줄 수 있다고 했다. 나의 유일한 명품 지갑. 페레 ○○. 이제는 많이 낡았지만 쓰기에는 불편이 없다. 명품값을 한다고 해야 할까?     


동생의 휠체어를 밀고 비행기 탑승할 때 승무원들이 많이 도와주었고, 앞자리에 앉아서 동생이 발을 편하게 뻗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대만에서 작은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직항이 아니었다. 대만에서 잠시 멈춰 사람들을 내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태우고 이륙한다고 했다. 그 사이 승무원들은 청소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 전날 이 상황을 전해 들었고 비행기에 남아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승무원들은 어서 나가라고 했다. 다리가 불편한 동생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나는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성격이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실랑이가 이어졌다. 분명히 이야기된 줄 알았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불쾌하고 화가 났다. 짐을 다 챙겨서 동생을 휠체어에 다시 태우고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도저히 안 된다고 몇 번을 얘기하니,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그제야 어딘가로 연락하더니 자리에 있어도 된다고 했다.      


무슨 대단한 청소인가 했더니, 승객이 내린 자리의 물건만 정리하는 걸로 끝이었다. 그걸 보니 더 화가 났지만, 그냥 아무 말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불편함은 피했으니까 말이다.     

안내 방송이 나가고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다시 자리를 잡았다. 다시 비행기가 뜨고 두 시간 정도 지나자, 인천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얼마 만인가. 고작 1주일을 태국에 있었던 것뿐인데, 1년은 지난 것 같았다.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맘이 급해졌다.  

   

동생이 탄 휠체어를 밀고 나와, 짐을 찾고 1층 출국장으로 나오니 동생과 결혼할 예비 신랑이 있었다. 얼마나 마음이 놓이던지. 내 걱정은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해 질 녘에 공항에 도착했는데 버스에서 내려 하늘을 보니 캄캄했다. 아파트 단지가 보이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걸음을 서둘렀지만 여행 가방의 바퀴가 보도블록에 끼어 내 마음대로 구르지 않았다. 가방을 끌다시피 하면서 집 앞에 도착했다. 엄마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안길 아이들 생각에 배가 고픈지 힘이 든지도 몰랐다.      

현관문을 열고    

  

엄마 왔다!     


하는 순간 방에서 놀던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기대한 눈빛이 아니었다.  

   

“엄마? 왜 벌써 왔어?”


아이들의 눈빛은 실망 그 자체였다.

엄마는 일주일 내내 몸은 태국에 있었지만, 마음은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 혼자 대단한 착각을 했던 거다. 잔소리쟁이 엄마가 없던 날들이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휴가였나 보다.     

엄마의 사랑은 철저한 외사랑이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후기

동생은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정형외과에 갔습니다. 물리치료만 하면 될 줄 알았지만, CT도 MRI도 아닌 X-ray만 보고도 의사는 혀를 끌끌 찼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누가 이렇게 수술했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결국 동생은 심을 박는 큰 수술을 다시 하고 1년 내내 그 심을 박고 생활하다 1년 후에 제거 수술을 하고 나서야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날 그 경찰서에서 너무 쉽게 서명해 준 일이 동생에게 너무도 아프고 미안했습니다. 다행히 지금까지 후유증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 여전히 미안한데, 동생은 아직도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면 고맙기만 하다고 합니다.


사진은 실물보다 훨씬 멀쩡하게 나왔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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