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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자꾹 Sep 18. 2024

얼떨결에 태국?_그 두 번째

그날 경찰서에서


남편과 나는 낯선 태국 병원의 안내를 찾아갔다. 아는 거라곤 동생 이름과 교통사고로 입원했다는 사실 밖에 없었다. 외국인이라 입원 사실과 병실을 알아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 병원이 우리나라 대학병원처럼 크고 넓어서 병실을 찾아가는 게 문제였다.     


설명을 듣고도 이리저리 헤맨 끝에 엘리베이터를 찾아 타고, 동생 병실이 있는 층에 내려 간호사들이 상주하는 곳에 먼저 들렀다. 우리네 병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생 이름을 대고 교통사고로 입원했다고 하니 병실을 알려 줬다. 호수와 이름을 찾아서 병실 문 앞에 도착했다. 많이 다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병실 문을 밀었다.  한 밤중이었지만 동생은 깨어 있었다. 많이 아픈지 찡그린 얼굴이었다.     


내가 이름을 부르니, 동생은 놀랍지만 반가운 얼굴로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마취가 풀리면서 그 고통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지만, 한밤중에 구원군이 나타나 준 것에 안도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놀라고 무섭고 아팠을까. 동생은 천천히 지난밤에 일어났던 사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천운이며 감사할 일이었다.

     

동생은 그날 저녁을 잘 먹고 시장을 둘러보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길을 건너려고 했단다. 먼저 차가 오는지 살펴보고 두 어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데 갑자기 차가 와서 쿵! 여기까지가 전화로 들은 이야기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근데, 어쩌다? 어디서 차가 나타났다는 거야?”     


동생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내게, 자신이 놓친 부분을 설명해 주었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차가 달려왔어.”        

  

태국은 우리와 운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태국은 일본처럼 운전자가 차량 오른쪽에 앉고 우리랑 반대 방향으로 운전한다. 우리는 횡단보도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차가 오는지 살핀 후에 길을 건넌다. 동생은 그 순간 그곳이 태국이라는 것을 깜박하고, 습관처럼 왼쪽을 살피고는 길을 건너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차는 오른쪽에서 돌진해 왔다.


‘낮이었으면 또 다른 이들이 옆에 있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아쉬움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당시 태국에서는 교통사고가 나면, 경찰이 빨리 오지도 않고 사고를 낸 사람도 도망가기 일쑤였다고 한다. 내 동생도 그런 경우였다면 이렇게 병실에서가 아니라 영안실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천만다행으로 사고를 낸 운전자는 동생을 태우고 급히 병원으로 와서 입원시켰다. 병원에서는 동생의 상황이 심각하다며, 바로 수술을 한 거라고 했다.     


동생은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병원에서 깨어나 온갖 생각을 했다고 한다. 타국에서 사고가 났으니,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줄 거라고 생각해서 대사관에도 연락하고, 영사관에도 연락했단다. 대사관에서는 자기네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고, 영사관에서는 통역할 사람을 알선해 주는 정도로 자기네 할 일을 다했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타국에 와서 다친 자기네 나라 국민을 위한 조치가 그게 다라는 게 너무 화나고 분했다. 나머지는 본인이 알아서 하라기에 그 새벽에 우리 집에 전화했다는 것이다.     


오전에 수술 집도한 의사가 병실로 왔다. 의사는 무척 밝은 얼굴로 들어섰다. 부러진 왼쪽 발목은 수술이  잘 되었다며, 물리치료 잘 받고 걷기 연습을 열심히 하면 회복이 빨리 될 거라고 했다. 통역사가 오기 전이라 우리는 영어로 소통했다. 나도 그 의사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또박또박 천천히 발음하며 동생의 상황을 얘기하고 어찌해야 할 지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날이 밝으니 영사관에서 관계자와 통역하시는 분이 왔다. 영사관 관계자는 몇 마디 얘기하고는 잘 해결되기 바란다며 돌아갔다. 점심때쯤 사고 차량의 차주라면서 중년 여성이 왔다. 아들이 사고를 내서 정말 미안하다며 사과를 여러 번 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오지 않았다. 연신 고개 숙이며 미안해하는 그이에게 우리는 화를 내지 못했다. 그이는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한다며 병원 중간층에 있는 식당으로 남편과 나를 데려갔다.      


차림표를 봐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쌀국수가 있다 해서 그냥 그걸로 골랐다. 음식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가끔 먹던 국물이 흥건하고 구수한 쌀국수를 말한 건데 내 앞에 있던 쌀국수라는 음식은 볶음이었고, 향이 너무 강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팟타이였던 것 같은데. 고수 향이 너무 강했다. 한 젓가락 입에 넣고는 끝이었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그렇게 강한 향을 풍기는 음식을 끝까지 다 먹었다.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했다.   


식사를 끝낸 뒤에, 병원 안에 있는 찻집으로 갔다. 사고 낸 이의 어머니는 미안하다면서, 처리 절차가 남아있으니 잘 부탁한다고 했다. 나는 교통사고를 내거나 당한 적이 없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지 몰랐다. 그쪽에서 동생을 병원에 제때 데리고 와서 처치를 잘해준 것이 고마워 그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무렵 그쪽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갔다.  태국 경찰서였다. 그쪽에서 말한 절차가 경찰서에서 하는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했기에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경찰서를 가는 건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왜 그리 무서운지 모르겠다. 내게는 여전히 경찰이란 민중의 도우미라기보다 누군가를 잡아가는 사람쯤으로 여겨지나 보다. 양쪽 간에 합의만 하면 끝나는 건 줄 알았는데, 경찰서에서 작성해야 할 서류가 있었다.  

    

우리 앞에 앉아 있던 경찰 한 명은 무료한 얼굴로 무언가를 휘두르며 모기랑 날벌레를 잡았다. 전기가 통하는지 벌레가 잡힐 때마다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생처음 보는 그 물건이 신기하면서도 끔찍했다. 날벌레가 잡힐 때마다 내 몸이 움찔거렸다. 몇 년 뒤에 마트에서 그 물건을 봤다. '전기 파리채'란다. 그 순간 태국 경찰의 모습이 떠올라 씁쓸했다.

     

사고 차주 쪽에서 얼마간의 금액을 제시했다. 병원비는 물론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권도 제공한다고 했다, 남편과 내 것 까지도. 문제는 그곳의 분위기였다. 경찰서에는 허리에 총을 찬 군인도 있었다. 그쪽에서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는 공포를 느꼈다. 최대한 아닌 척하려고 애썼지만, 그들도 우리의 떨림을 느꼈을 것이다. 사고 차량의 차주는 태국에서 꽤나 지체가 높은 집안이라고 했다. 그들은 소문을 의식해서인지 빨리 수습해서 끝내고 싶어 했다. 사고는 그쪽에서 냈는데 그 종이에 서명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무언가 불리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통역하는 사람도 통역만 해줄 뿐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그 상황에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이방인인 우리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느끼는 공포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그들이 제시한 서류에 서명하고 병원으로 돌아오는 내내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닐까', '너무 성급했나' '동생이 제대로 보상을 받도록 한 것인가' 하는 자책과 온갖 잡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차에서 내려 병실로 돌아가면서 남편과 나는 고압적인 그 분위기에서 그게 최선이었다고 애써 서로를 위로했다.

     

동생에게 우리가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니, 동생은 그저 언니랑 형부가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남편은 어쨌든 큰일을 마무리 지었으니,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남편이 가고 나면 이제 내가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걱정이 됐지만, 누군가는 빨리 돌아가서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아쉽지만 남편을 먼저 보내기로 했다. 처제가 다쳤다는 말 하나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함께 와준 남편이 정말 고마웠다.


동생에게 제공된 병실은 1인실이었다.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쾌적했다. 푹신하고 안락한 긴 의자도 있었다. 그동안 우리나라 병원에서 보호자로 지낼 때 사용하던 딱딱하고 바퀴 달린 보조의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꽤 넓었다. 하지만 둘이 자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날 밤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불편해도 둘이서 새우잠을 자고, 남편은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사고 차량의 차주 언니분이 타이 항공 임원이라며 남편 항공권을 준비해 주고, 차주의 딸이 남편을 공항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그 전날 저녁 경찰서에서 고압적인 분위기로 우릴 재촉할 때는 괴물처럼 느껴지던 사람들이었는데, 내 남편의 귀국까지도 책임지는 걸 보고 마음이 많이 풀어졌다.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이 돌아간 뒤에 아이들과 잠깐 통화를 했다. 그때는 페이스타임도 카카오톡도 없던 시절이었다. 국제 전화 요금이 엄청 비싸서 집에 전화도 몇 번 못 했다. 남편이 안전하게 귀가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아이들 목소리를 들으니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동생은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다음 주에는 동생과 제가 일주일 동안 머문 태국 병원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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