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깨운 전화 한 통
미국 가는 딸아이 덕분에 만들어 놓은 여권이 장롱 안에서 곰팡내가 나기 직전 비행기를 탈 일이 생겼다. 그것도 새벽에 울린 전화 한 통 때문에…….
모두가 꿈결을 헤매는 시간에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처음엔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전화벨 소리는 그칠 줄을 모른다. 비몽사몽간에 거실로 비척대며 걸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동생이었다. 태국에 여행 간 동생이 무슨 일일까?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언니, 나 다쳤어. 아파…. 교통사고야.”
동생은 한 달 뒤에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결혼하면 마음대로 여행하기도 힘들다면서 혼자서 자유여행을 다녀온다고 그 며칠 전에 태국으로 떠났다. 처음엔 여행을 잘 다녔다고 했다. 전화하기 전날 밤에 혼자서 길을 건너다 달려오는 차에 받혔다고 했다. 분명히 차가 오는지 살폈는데 차가 없어서 길을 건넜는데 차가 달려와서 자신을 받았다고 했다. 동생은 아프기도 하고 정신도 없는지 횡설수설이었다.
결론은 누군가 자기를 데리러 와야 한다는 거였다. 처음엔 결혼하기로 약속한 그 사람이 갈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이는 여권이 없다고 동생이 말했다.
세상에나.
한 달 뒤에 결혼하는데 여권이 없다니.
오라버니는 가족과 함께 주재원으로 외국에 나가 있고, 엄마는 칠순이 넘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갈 사람이 없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소용이 없다. 가족에게 화살이 돌아온다.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두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 못 했다. 더구나 해외는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둘이 함께 또다시 고민했다. 결론은, 친정엄마께 아이들을 맡기고 남편과 내가 일단 태국으로 가기로 했다. 남편은 회사에 휴가계를 제출하고 바로 집으로 달려왔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엄마께 전화하고 우리는 정신없이 공항으로 달려갔다.
공항에 가서 그날 저녁 태국 가는 비행기를 수소문했다. 아는 게 대한항공밖에 없으니, 대한항공 직원에게 물어 물어서 비행기표를 구해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짐을 부치고 검문검색을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냥 동생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공항에서 간단하게 요기했다. 우리는 외국 가는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비행기에서 식사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런데 비행기가 뜨고 안정이 되자마자 승무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더니 저녁을 준다고 했다. 나는 비행기가 조금씩 흔들리기도 하고 온갖 걱정이 밀려와서 거의 손도 대지 못하고 다시 승무원에게 건네고 말았다. 남편은 그 와중에도 주는 대로 덥석덥석 잘도 먹었다. 먹는 게 남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도 안 하는 것 같아 얄밉기도 했다.
식사 시간이 끝나고 승무원들이 큰 카트를 끌고 오가며 정리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국에 도착할 거란 안내가 흘러나왔다. 태국 공항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엄청 화려했다는 기억은 선명하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선입견이 있던 때라 태국의 공항이 그렇게 크고 휘황찬란할 줄은 몰랐다.
짐을 찾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병원이었다. 동생이 알려준 것은 병원 이름이 전부였다. 시간을 보니 자정이 다 되었다. 우리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지만, 우선 공항에서 나가야 했다. 입구 근처에서 택시 기사들이 호객행위를 했다. 그중 한 젊은 기사가 다가왔다. 병원 이름을 대고 갈 수 있냐고 물으니 갈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대답만 믿고 택시를 탔다.
기사는 운전하면서 자주 뒤를 돌아보고 웃었다. 남편과 나는 뭔지 모를 공포를 느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무서웠다. 병원은 가도 가도 나오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손을 꼭 잡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택시 기사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머릿속에서는 또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었다.
컴컴한 길을 달리면 달릴수록 우리의 공포는 커졌다. 태국까지 와서 인신매매를 당하는 게 아닐까? 겁먹은 채 둘이 소곤거렸다. 갑자기 집에서 기다릴 우리 아이들이 떠올랐다. 무섭고 걱정되고 동생이 밉기까지 했다.
어떡해? 어떡하지?
왜 혼자 여행을 가서는, 이 사달을 내냐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서 팔다리가 뻣뻣해졌다.
공포가 극에 달할 무렵 저 멀리 환한 불빛과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좀 더 가까이 가니 병원 간판이 보였다. 동생이 알려준 이름이 맞는 것 같았다. 택시 기사가 도착했다며 차를 세웠다. 오는 내내 악마로 보였던 택시 기사가 갑자기 천사로 보였다. 달러였는지 태국 바트였는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지만, 기사에게 택시비를 건네고 내렸다. 택시 기사는 웃는 얼굴로 무어라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이고는, 운전사를 뒤로하고 헐레벌떡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동생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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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표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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