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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자꾹 Aug 28. 2024

나의 유일한 ‘비행‘ 일지


우리는 결혼한 지 5년 만에 24평 집을 마련했다. 남편은 24시간 때론 48시간을 집에도 오지 않고 회사에서 살았다. 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계부를 쓰면서 깍쟁이처럼 아끼고 살았다. 10원 동전 하나만 없어져도 난리를 치곤 했다.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순전히 우리의 노력 덕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인천 집값이 전국에서 최하위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너무도 많이 올라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회사에서 사원복지 차원에서 미분양 물량의 10퍼센트 정도를 마련해 놓아서 그중에 하나를 분양받을 수 있었다. 


처음 입주했을 때는 집집마다 집들이를 한다고 떠들썩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들에 비해 현저하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집들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행운을 얻었다. 대신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집을 일주일에 서너 번씩 방문해서 억지로 웃으며 장단을 맞추는 일을 해야 했다. 당시 나는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다. 죽도록 가기 싫었지만, 변죽이 좋은 남편은 형님들을 찾아 인사해야 한다며 나를 이 집 저 집 끌고 다녔다.     


우리 동 우리 라인의 10층에도 회사 분이 살고 계셨다. 어느 주말 밤 그 집에서 집들이 행사가 있었다. 그 집 부부는 인상이 좋고 품위 있어 보였다. 같은 라인이니 진짜 이웃사촌이라며 악수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그날도 역시 모르는 분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그래도 계속 끌려다니다 보니 조금씩 눈에 익은 분들이 있었다. 수줍게 인사하고 억지웃음을 짓느라 힘들었다. 나는 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지만, 남편은 선배들이 연방 따라주시는 술을 계속 마시며 좋아라 했다.      


술 취한 사람을 억지로 끌고 오느라 힘들었다. 우리 집은 2층인데, 3층이나 1층에서 내려 계단으로 걸어와야 했다. 자주 이용하지도 않는데, 엘리베이터 요금을 내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 관리실에 말하고 엘리베이터가 2층에 서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다. 아이 유모차를 들고 낑낑거릴 때는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짠순이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집들이 행사도 다 끝나고 가을이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다. 아침 준비를 마치고, 음식물 쓰레기 통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평소처럼 2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가 타지 않는데도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곤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10층에 사시는 남편 회사 선배분이 내렸다. 난 고개를 숙이고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인사를 하려고 입을 열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몸 전체가 앞으로 쏠렸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계단에서 구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굴러 떨어지는 대신 계단을 날아서, 1층으로 착륙하는가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진짜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그분이 


어!


하면서, 쏜살처럼 달려와 나를 받아 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외간 남자의 품에 안겨 버렸다.(상상은 자유에 맡깁니다.)   

 

그때 내 모습은 후줄근 그 자체였다. 다 늘어진 티셔츠에 헐렁한 반바지 차림이었다. 다행히 커다란 원피스 앞치마가 그 후줄근한 모습을 조금은 가려주었다. 하지만 내 손에는 음식물 쓰레기통이 들려있었다. 나는 쓰레기통이 열리길 바라지 않았지만 나와 함께 계단을 날아온 음식물 쓰레기통은 결국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그분은 팔을 풀어 나를 놓아주고는, 쏟아진 음식물 쓰레기를 다시 담아 주려 하셨다.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연신 괜찮다고 말하면서 어서 가시라고 쫓아버리듯 했다. 그리고 1층을 나서는 그분의 등 뒤에 대고 들릴락 말락 하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뒤에도 그분을  여러 번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지금까지 이 일을 남편한테 말한 적이 없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이 글을 쓰느라 어쩔 수 없이 남편한테 물어봤다. 그분은 나와 마주쳤던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남편은 그 형님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며 오히려 반문했다. 나는 그냥 웃었다. 

    

그때 그분이 그냥 지나갔으면, 나는 어마어마한 골절상을 입었거나 거꾸로, 뇌진탕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순간의 창피함으로, 고마운 이웃의 도움으로 나는 또 그렇게 멀쩡하게 살아났다.    

 

지금은 다들 그 동네를 떠났다. 어디에 살고 계시든지 복 많이 받으셨으면 좋겠다.    

      



후기: 솔직히 말하면, 결혼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의 남자 품에 안긴 소감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분이 미남형에 친절한 분이셔서였을까? 앞으로도 그분을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분은 그 일이 절대로 생각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편이 이 글을 읽으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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