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큰아이와 형님네 큰아이는 동갑이다. 두 녀석은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 용감하게 미국 큰고모 댁에 다녀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용기로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기에 초등학생 두 녀석을 태워서 보냈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녀석만 달랑 보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대한항공에 아이들만 탈 경우에 보호자에게 인도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큰 애는 ‘큰아이’니까, 어려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그때까지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남편과 나도 신혼여행 때 제주도에 가본 것 말고는 비행기를 탄 적이 없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 많았다. 우리는 우선 여권을 만들어야 했다. 사진관에 가서 네 사람 모두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가까운 구청에서 신청하고 발급받을 수 있지만, 그 당시, 2005년에는 꼭 시청에 가야 신청하고 발급받을 수 있었다. 시간도 지금보다 오래 걸렸다. 2주 정도 기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미국에 가려면 90일까지는 무비자로 다녀올 수 있지만, 그때 미국에 가려면 꼭 비자가 있어야 했다. 아이만 비행기를 탄다고 아이 것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광화문에 있는 미 대사관에 가서 직접 인터뷰하고 나서, 또 2주 정도 기다려야 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탈락하는 예도 많았다.
인터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서류도 준비해야 했다. 재직증명서와 소득 증명서, 통장 사본, 그리고 몇 가지 서류가 더 필요했다. 참 복잡했다. 우리는 각종 서류를 준비하면서 시부모님께 돈을 융통해 통장에 잔고도 채워 넣었다. 내 돈 내고 미국에 다녀오겠다는데 우리를 무슨 도둑놈으로 아는지 짜증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자 신청을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사람들 사이에서 비자 발급에 도움 되는 정보가 인터넷에 나돌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정보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니트로 된 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비자를 신청하러 오는 사람들이 니트를 입고 가면 더 호의적이라고 했다. 기가 막히긴 했지만, 큰돈이 드는 일이 아니니 속는 셈 치고 그것도 따라 해 보기로 했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 둘까지 넷이 모두 니트를 차려입고서 대사관으로 출발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앞세우고 광화문으로 갔다. 처음 가는 곳이었지만 대사관 밖으로 줄이 늘어서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날이 꽤 쌀쌀했지만, 우리는 밖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30분 정도 줄을 선 뒤에야 대사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를 지나 한국 안의 ‘미국’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안에 들어가서도 줄은 여전히 길었지만, 차가운 곳에서 안으로 들어오니 그래도 살 만했다. 겉옷을 벗고 보니 우리처럼 니트 차림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지푸라기 잡겠다고 그 말을 다 믿은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곳이 한국인가 미국인가 술렁거리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취급을 받는 것이 기분 나빴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믿음도 주어야 했다.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미국인들은 그렇다 치고 대사관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의 눈과 코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재크의 콩나무’를 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간 듯 보였다. 우리는 안에 들어가서도 한 시간여를 더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비자받기에 성공한 사람은 날 듯이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고, 실패한 사람은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생각보다 성공률이 높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 바로 앞에 있던 중년 남자와 여자와 아이의 차례가 됐다. 그 가족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다. 한참을 심각하게 이야기했지만 잘 통하지 않았는지, 급기야 남자가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심사하는 그들 앞에 자꾸 들어 보이며 호소하듯이 말했다. 한동안 그렇게 애원하던 그 남자는 결국 힘없이 돌아섰다. 미국에 가야 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무 쓸쓸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우리의 긴장은 최고조로 치솟았다. 남편과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바들바들 떨었다. 입도 바짝바짝 말랐다. 뭐라고 물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이것저것 물어봤고, 우리는 계속 대답했다. 취조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그 기분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사람들은 아주 고자세였다. 그러다 인터뷰 심사관이 남편 회사 관련 서류를 들춰보다 왜 이렇게 직원이 많은지 물었다.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남편은 인천제철에 다니고 있었다. 이름 때문에 인천의 작은 제철소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도 그런 느낌이었나 보다. 남편이 H 기업계열사라고 했다. 옆에서 통역하던 사람이 영어로 ‘H subsidiary’라고 하자, 갑자기 그 미국 심사관의 태도가 돌변했다. 미국 여행 잘 다녀오라면서,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우리 인터뷰는 그냥 그렇게 끝났다.
우리가 가져간 다른 서류들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니트 티셔츠는 개뿔, 그들에게 필요한 건 딱 하나였다.
에 다닌다는 사실. 기가 막혔다. 우리가 몇 달 동안 준비했던 나머지 서류들과 인터뷰 대응 방식, 통장 잔고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허탈해서 웃지 못했다. 대기업의 위력이 그렇게 크다니. 난 평소에 남편 회사를 대단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그때 입은 큰 은혜?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앞에서 절절하게 아이를 들고 또 들어 보이며 그들에게 애원하던 이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왜 그렇게 미국에 가는 게 간절했을까. 정말 씁쓸하고 또 씁쓸한 경험이다.
*사진출처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658725#polic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