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라고 기억되지만,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시부모님이 오셨다는 형님 얘기를 듣고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형님네로 갔다.
큰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형님네와 우리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남편과 아주버님은 같은 회사에 다녔고, 분양 공고를 보고 함께 신청한 형제가 같이 당첨되었다. 시시때때로 아들, 손자, 며느리를 보고 싶어 하시는 시어머니에게는 로또 당첨 같은 일이었다. 어머니는 때를 가리지 않고 오셨다. 형님네로 오시면 우리가 건너가고, 우리 집에 오시면 형님네가 건너왔다.
그래서 우리는 월화수목금금금 만나야 했다.
아무튼 그 시절엔 그렇게 살았다. 형님과 나는 버거울 때가 많았지만, 아이들은 행복했노라 말한다.
형님네 큰아이와 우리 첫째가 같은 해에 태어났다. 형님네 둘째가 세 살 터울로 태어났고, 그다음 해에 우리 둘째가, 그리고 형님네 막내가 그다음 해에 태어났다. 아이들은 올망졸망 잘 어울려 놀았다. 큰 녀석들이 잘 보살펴서인지 서로가 잘 맞아서인지 엄마들 손길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 집 둘째와 형님네 막내는 너무 어려서 낮잠을 자야 했다. 울 아들은 네 살, 형님네 막내는 세 살이었나 보다. 나이는 달라도 울 아들이 12월 말에 태어나고 형님네 막내는 3월에 태어났으니 둘 다 세 살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녀석을 형님네 안방에 재워놓았다. 큰 녀석들은 건넛방에서 평소처럼 깔깔거리며 잘 놀았다.
두 녀석을 재우고 나서 형님과 나는 본격적으로 식사 준비를 했다. 그날 메뉴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식구가 어른, 아이 합쳐 열 명이 넘다 보니, 좁은 부엌 가스 불 앞에서 궁둥이도 붙이지 못하고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던 기억만 난다.
점심 준비가 끝나고 상을 차렸다. 식구가 많다 보니, 식탁은 장식품이 되고 제사 지낼 때처럼 큰 상을 펴야 했다. 방에서 자는 두 녀석은 여전히 조용했다. 엄마를 도와주느라고 잘 자나보다 생각했다.
상에 둘러앉아 한 술씩 뜨는데 갑자기 관리실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남자아이를 데리고 있다고 했다. 얼른 엄마가 와서 데려가야 할 텐데 어쩌냐며 걱정을 하면서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는지 방송이 또 나왔다. 어머니는 별일도 다 있다며 남의 일 같지 않다고 걱정하셨다. 형님과 나는 자는 놈들도 밥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안방 문을 열었다.
안방 문을 열다가 나는 너무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아니 ‘악’ 소리를 질렀던가. 형님네 막내 혼자서 자고 있었다. 자다 깼으면 울기라도 했을 텐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었다. 너무 어렸기에 혼자서 문을 열고 나간다는 것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온 집안을 이 잡듯 뒤졌다. 식구들이 방마다 열고 헤집어 봤다. 앞뒤 베란다도 구석구석 다 찾아보았지만 아이는 없었다.
우리는 그 순간 서로 쳐다보았다.
설마 방송의 그 아이가 바로 우리 아이?
어른 여섯이 아이 하나 나가는 걸 몰랐다고?
형님네는 9층이었다. 어떻게 내려간 거지?
나는 기가 막혔지만, 앞뒤 따질 겨를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정신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날 듯이 뛰어 아파트 관리실로 갔다.
하면서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뛰었다.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그 길이 참 길게도 느껴졌다. 드라마 속 아이 잃고 애타게 찾는 엄마가 바로 나였다.
관리실로 뛰어 들어갔더니, 아이는 울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었다. 너무 기뻐서 아이를 보자마자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다행이던지. 하지만 아이는 어떻게 문을 열고 나갔는지, 왜 나갔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물어도 네 살 때 기억을 어떻게 하느냐고 되묻기만 할 뿐이다.
그날 시트콤을 한바탕 찍고 나서도 우리는 또 아들 녀석을 잃어버렸다.
녀석이 다섯 살이 되던 여름이었다.
큰아이가 토요일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하모니카를 배웠다. 딸아이를 강의실에 들여보내고 우리는 백화점을 둘러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여름 샌들을 장만하겠다고 남편과 둘째 녀석 손잡고 구두 판매장으로 갔다. 구두 매장은 1층에 있었다. 아들아이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해서 신기한지 이것저것 보며 좋아했다.
여러 매장을 돌아보다 한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샌들을 만났다. 나는 오랜만에 하는 사치라 살짝 들떠 있었다. 잠깐 걸어도 보고 디자인을 자세히 보겠다고 의자에 앉아서, 샌들을 신은 발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남편도 예쁘다며 온갖 추임새를 넣어 잘 어울린다고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수다를 떨던 남편과 나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반짝반짝 예쁘다며 조금 전까지 옆에서 쫑알대던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신발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아이를 찾아 나섰다. 구두 매장 옆에, 또 구두 매장 에스컬레이터 옆 가방 매장, 화장품, 손수건 매장까지 우리는 둘째를 찾아 백화점 1층을 돌고 또 돌았다.
아주 잠깐이었으니까,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고 애써 서로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나쁜 상상이 머리를 채웠다. 너무 무서웠다. 아이 이름을 부르며 사람들한테 인상착의를 알려주고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우리는 백화점에 미아 찾기 방송을 부탁하기로 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말했다.
“1층이니까 혹시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설마?”
하면서도 손은 이미 백화점 문을 밀고 나가고 있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무어라도 하고 싶었다. 열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내 아들처럼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오는 게 보였다. 너무 놀랐다. 아이 이름을 부르고 얼싸안았다. 아이는 역시나 천하태평이었다. 나만 가슴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렸다. 천신만고 아니 천우신조였다.
그분 말씀이, 백화점에 오는데 꼬마 녀석이 어른들 틈에 끼어 밖으로 나와 걸어가는 게 보였단다. 옆에 아무도 없는 게 이상해서 물어봤지만, 대답을 안 했단다. 부모가 걱정할까 봐 냉큼 아이 손을 잡고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열 번도 넘게, 크게 고개를 숙이고 폴더폰 접듯이 감사 인사를 했다.
우리는 그 조그만 녀석이 밖으로 나갈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더 어렸을 때, 현관문 밖으로 나가 동네 방송 탔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우리 불찰이었다. 친절하고 오지랖 넓은 그 아주머니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이를 정말로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아이는 왜 나갔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아들의 두 번의 외도(?)는 누구도 풀지 못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아들을 집 근처에서 또 공원에서 몇 번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다행히 그때마다 하늘이 돕고 이웃이 도와서 찾을 수 있었다. 나중에는 엄마 아빠를 식겁하게 만든 녀석이 너무 태평해서 얄밉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를 잃어버리는 상상만으로도 무섭기에,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여도 우리 곁에 있어서 얼마나 고맙고 또 감사한지 모른다.
자기가 원하는 길로만 가느라 엄마 속을 태우던 녀석이, 이제는 같이 길을 갈 때면 잔소리가 많다. 신호등을 기다릴 때면, ‘횡단보도 경계선을 넘으면 안 된다.’ , 길을 건너갈 때 횡단보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위험하니까 안으로 가야 한다’고 엄마 손을 잡아끈다. 손들고 건너라고 하지 않는 게 다행이다. 그래도 잔소리쟁이 아들이 곁에 있어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