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롱패딩
아담한 키를 자랑하는 용기 여사는 아무리 추워도 롱패딩만은 입지 않으려 했습니다. 겨울만 되면 롱패딩을 사수하는 따님에게 빌려 입어봤지만, 새까만 옷을 입고 종종거리며 걷는 자신의 모습이 펭귄 같아서 절대로 입지 않겠다고 맹세하듯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3, 4년 전부터 그 녀석을 입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녀석과 한 몸이 되어갑니다. 특히 무릎 아래까지 감싸주는 포근함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겨울 한 철이지만 그 사랑은 점점 찐해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깊이만큼 롱패딩은 낡아갑니다. 얼마 전부터 지퍼가 자꾸 말썽을 부립니다. 열고 닫을 때마다 낑낑거리기 일쑤입니다. 어떨 땐 길을 가다가 뛰기라도 하면 아래쪽 지퍼가 조금씩 벌어지곤 하더군요. 그래도 다시 지퍼를 잘 토닥여서 잠그고는 조심조심 걸어 다니면 됩니다.
입춘이 지나도 여전히 추위가 기세를 떨치기에 롱패딩을 벗을 수 없었습니다.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된 찬바람 때문에 식물들이 얼어 죽을까 봐 환기도 하지 못하고 창문을 꼭꼭 걸어 잠가두었었죠. 그날도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긴 했지만, 기온이 살짝 오르고 햇살도 기분 좋게 내리쬐길래 나가면서 집안에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 놓고 환기를 한다고 요란을 떨었습니다.
기온이 올라갔다고 하지만 장갑을 낀 손도 차고 뺨에도 찬기가 가득했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겉옷도 벗지 않고 따님 방 베란다 창문을 닫으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갔습니다. 창문을 닫으려면 일단 침대로 올라가야 합니다. 따님은 침대 프레임 없이 매트리스만 쓰기에 별로 높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발을 들어 매트리스에 올리는 순간, 옷에서 ‘드드득’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차차!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지퍼가 뜯어져 나간 줄 알고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롱패딩 아래쪽 지퍼가 ‘쫘악’ 아래에서 3분의 1 지점까지 벌어져 있더군요. 일단 창문을 닫고 뒤뚱뒤뚱 거실로 나왔습니다. 아래쪽 지퍼가 터져 옷을 벗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지퍼를 꿰맞춰서 옷의 지퍼를 내려야 옷을 벗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거실에 쭈그리고 앉아 낑낑거렸지만 중간에 걸린 지퍼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아 난감했습니다. 거실 베란다 문도 닫지 못해 찬바람이 들어왔지만, 추운 줄도 몰랐습니다. 안간힘을 쓰고 또 쓰니 결국 지퍼가 맞물리는 것 같았습니다. 10분 넘게 지퍼를 붙잡고 꿰맞추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얼굴에도 목 뒤쪽에도 땀이 한가득이었습니다.
그래도 성공했으니,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저녁을 먹고 운동할 겸 산책하러 가기로 했습니다. 날이 풀렸지만 밤이니까 롱패딩을 입기로 했습니다. 옷을 꺼내 양쪽 소매에 팔을 넣고 지퍼만 잠그면 되는데 계속 어긋났습니다. 옆에 있던 남편이 자세히 보더니 지퍼 끝부분이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온 힘을 기울여 성공했다고 자축했는데 온 힘을 다해 옷을 망가뜨렸던 겁니다. 지퍼 끝 부분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씩씩하던 용기 여사가 울상이 되었습니다. 3년이나 입은 옷을 무료로 AS 받을 곳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평소 바짓단을 줄일 때 이용하던 수선 가게가 떠올랐습니다. 동네 세탁소도 있지만 옷을 고치는 데는 수선 가게가 훨씬 일가견이 있습니다. 수선 가게에 맡기겠다는 용기 여사에게 남편은 당부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왕 수선하려면 버스나 의자에 앉을 때 편하게 지퍼를 여닫을 수 있도록 튼튼한 이중 지퍼로 하라고 말이죠.
다음날 수선집에 옷을 들고 가니, 사장님은 옷을 이리저리 보고 길이도 재더니 수선가능하지만 비싸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이중 지퍼는 가격이 훨씬 더 비싸고 구하기도 힘드니까 비용이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몇만 원 보태면 저렴한 새 패딩을 살 수도 있는 가격이었습니다. 용기 여사는 악마의 속삭임에 잠시 망설였지만, 수선 가게 사장님께 잘 좀 부탁한다며 고개를 조아리고 나왔습니다. 그러고는 아끼는 옷을 살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또 주었습니다.
옷을 맡긴 날 오후부터 다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그다음 날은 아침부터 다시 맹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옷을 맡길 때는 내년 겨울부터 입을 요량이었는데, 갑자기 추위가 닥치는데 롱패딩이 없으니 뚜벅이 신세 용기 여사는 허벅지를 살짝 덮는 외투를 입고 덜덜 떨어야 했습니다.
종일 찬바람에 고생하다가 저녁을 먹으며 속을 데우고 나니 수선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옷이 다 되었으니 찾으러 오라고 했습니다. 보통 땐 문자로 수선 내용을 간단하게 알려주는 데 전화가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튼 생각보다 빨리 되었다길래 신나게 달려갔습니다. 사장님 말씀이,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시간이 늦었지만 전화했다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추운 날 지퍼를 구하느라고 새벽부터 서울 가서 이곳저곳 수소문했다니 고마운 마음에 미안함이 보태졌습니다.
지퍼는 원래 것보다 훨씬 튼튼해 보였습니다. 재봉질도 깔끔했습니다. 이제는 절대로 뜯어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수선비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용기 여사는 옷을 다시 살렸다는 마음이 들어 뿌듯했습니다. 이제 '내 사랑 롱패딩'을 오래오래 입을 일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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