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도 고된 신고식

by 발자꾹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 도착했다. 창 밖에는 큼지막한 단풍잎이 그려진 비행기가 엄청 많았다. 인천 공항과는 사뭇 달랐다. 드디어 낯선 나라에 도착했구나 싶어 가슴이 콩닥 거렸다. 승무원들과 눈인사하고 통행로를 따라 걸어 나오는데 냄새도 소리도 낯설었다.


이제 시작이다! 숨소리가 쿵쾅대며 귓속을 울릴 만큼 떨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을 둘러보며 환승 게이트를 찾는 데 집중했다. 한국에서는 환승과 ‘Transfer’라고 쓰인 곳을 따라가면 되는데 토론토 공항에는 ‘Arrival’과 ‘Connection’만 있었다. 어쨌든 연결을 뜻하니까 맞겠지 싶어 ‘Connection' 문구를 따라갔다. 공항이 얼마나 넓은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부모님은 당신들은 걱정하지 말고 앞장서서 환승구나 잘 찾으라고 하셨지만, 나는 길은 맞는지 또 어르신들은 잘 따라오시는지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보곤 했다. 남편과 아주버니가 어련히 잘하련만 남의 나라에 오니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중간에 몇 번씩 쉬다 오셨지만, 걱정했던 것보다는 잘 따라오셨다. 10분 넘게 표식을 따라가니 통로 거의 끝부분에 미국 입국자들이 절차를 밟는 곳이 보였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마시던 물과 남겨두었던 버터, 빵들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 버렸다.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가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멀리서 손짓하는 직원들을 따라가 보니 우선 가방과 외투, 신발을 벗으라 했다. 바지에 허리띠를 두른 사람들은 그것도 풀라고 했다. 하지만 몸 검색 시간은 인천공항에서보다 빨리 끝났다. 그런데 가방이 나오지 않아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어머니가 부치는 짐 무게를 줄이려고 기내 가방에 물건을 많이 넣었다며 겸연쩍어하셨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다행스럽게도 하나도 책잡히지 않고 무사히 통과되었다.


저마다 검색이 끝난 짐가방을 받아 드니 통로에 있던 직원이 다음 방으로 가라고 했다. 그 방에는 사람은 없고 기계만 여러 대 있었다. 기계(지금은 다들 키오스크라고 하지만 그땐 그 이름도 알지 못했다.) 앞에 서서 화면에 보이는 대로 여권과 탑승권을 차례로 가져다 대니 세관 신고서에 작성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들이 보였다. 순서대로 답을 표시했더니 종이가 나왔는데 나랑 남편, 아주버니 것에는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불안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직원을 찾았다. 걱정 가득한 내 얼굴을 보면서 공항 직원은 무작위로 표시되는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인천에서 부친 짐의 개수를 확인하더니 다 되었다고 미국 입국 연결 통로로 가라고 했다. 우리가 X 표시를 틀렸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쫄았었나 보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가족들을 이끌고 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심사관들은 무척 까다로워 보였다. 질문받은 사람들이 쩔쩔매는 모습은 우리 가족을 또 불안하게 만들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저 여행하러 가는 길인데 이렇게 조마조마한 상황이 계속되니 정말 불편하고 싫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최대한 환하게 웃으며 심사관의 마음에 들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모두 함께 입국 절차를 밟고 싶었지만 같이 사는 사람만 같이 할 수 있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남편과 둘이 먼저 심사받았다.


심사관은 여권을 보고 다시 우리를 쳐다보더니 뜬금없이, “Are you"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 ~~ apples?"하고 물었다. ‘갑자기 웬 사과? 뭐라는 거야? 나한테 사과 가져왔냐고 묻는 거야?" 나는 기가 막혔다. 어이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No."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심사관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약간 신경질적으로 “Aren’t you going to Indianapolis?”라고 물었다. ‘아차! 너무 긴장해서 잠깐 귀가 고장 났던가 보다. 인디애나폴리스가 애플로 들리다니.' 너무 창피했다. 칠면조처럼 어디 가서 까만 비닐봉지라도 하나 주워다가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싶었다. 긴장해서 잘못 알아들었다고 “I’m really really sorry!”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연신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러곤 심사관이 묻지도 않았는데,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인디애나폴리스에 가는 거라고, 거기서 딱 일주일만 있을 거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심사관은 허둥대는 내 모양을 보더니 진심이라고 여겼는지 알겠다고 했다.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되련만 내 머릿속에선 자꾸만 Indianapolis가 맴돌았다. 지문을 찍으라는 말을 듣고 기계에 손을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잘 되는 듯했다. 그런데 오른손 엄지를 찍을 차례에 그만 손가락을 위로 들어 올리고 말았다.


“Try again!”


직원의 말에 다시 손을 올렸지만, 이번에도 엄지손가락은 어김없이 위로 올라갔다. 몇 번이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자 직원의 목소리가 점점 딱딱해졌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간신히 오른손 지문을 모두 찍었다. 하지만 왼손 차례가 되자 또다시 손가락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옆에 있던 남편은 양손 지문을 다 찍고 나서 허둥대는 내 모습을 보았다. 울상이 된 내게 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다시 해보라고 했다. 나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천천히 숨을 쉬고 나서야 양 손가락 지문을 무사히 찍을 수 있었다. 그때 남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로 미국에 가기는커녕 토론토 공항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 했으면서 나는 시부모님과 아주버니가 걱정돼서 문밖을 나서지 못하고 기웃거렸다. 직원들이 나가라고 성화를 부려서 쫓겨나다시피 입국장 밖으로 나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입국장 밖을 나온 아주버니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어 힘들었지만, 손짓발짓해 가며 간신히 심사를 마쳤다고 했다. 내 도움을 받지 못해 안타까웠다고 털어놓는 아주버니가 참 고마웠다.


해외에 나갈 땐 외국어를 잘하면 편리하겠지만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영어를 잘 못해도 온몸으로 당당하게 내 의사를 표현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영어에만 신경 쓰다 작은 실수에 생각이 갇혀 난감한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다.


내 생애 가장 길고도 고된 입국 심사 시간이었다.




*혹시 몰라 구글 AI에게 물어보니 캐나다나 미국 입국 심사 시 키오스크(자동 입국 심사 기기)에서 여권에 X표가 인쇄되어 나오는 것은 "자동 심사 통과 실패" 및 "심사관 직접 대면 필요"를 의미한다고 했다.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라 입국 심사관이 추가적인 질문이나 확인을 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너무 당황하지 말고, 안내된 절차에 따라 심사관에게 가면 된다고 했다.


암튼 그때 직원은 분명히 무작위(random)라고 했었다. 그 이후로 아직 가보지 않았으니 X 표시의 진짜 의미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게 없으면 그냥 당당히 질문에 대답하면 된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글을 쓰지만 그때 일은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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