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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연 May 28. 2021

[05.27] 자판기

뜨거운 피가 바닥으로 쏟아진다. 며칠 동안 계속된 산통으로 기진맥진했고 더 이상 줄 힘이 없다. 배 안에서는 생명이 나오려고 꿈틀대지만 산도가 막혀서 생명이 갇혀 있다. “이러다 둘 다 죽겠네. 몸을 열어봐. 새끼가 나오지도 못하고 죽겠네” 옆에서 발을 구르며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귓가에서 윙윙거릴 뿐 숨을 쉬기도 버겁다. 들숨마다 축 늘어진 배가 아린다. 나가고 싶다고 배를 걷어차야 할텐데 몸 속은 고요하다.      


“이 놈이 벌써 다섯 번째 출산이야. 매해 꼬박꼬박 새끼를 얼마나 잘 낳았나 몰라. 지난번에도 얼마나 실한 놈을 낳았는지 야박한 놈들도 값을 제대로 쳐줬지. 동네에서 돈을 제일 많이 받았어. 허허. 기둘려봐. 내가 새끼 낳으면 술한잔 살테니깨” 장씨는 가마니 당 이천원은 더 비싼 일등급 사료를 먹이며 정성을 쏟았다. 불룩해져가는 내 배를 보며 등을 쓰다듬으며 이번에도 믿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빚도 갚아야 하고 자식들 대학도 보내야 한다고. 나는 그의 밑천이다.  

    

두평 남짓의 축사에서 나는 하루종일 먹고 자면서 새끼를 밴다. 바깥으로 나가서 들판을 한번만 달려봤으면 싶지만, 내가 달려본 적이 있던가. 태어나서 바로 축사로 왔으므로 그런 경험이 없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모습은, 모두 상상이다. 축 늘어져 죽어가는 나를 향해 장씨가 소리친다. “멍청한 놈아. 새끼를 못 낳으면 너는 쓸모가 없어. 새끼를 잘 낳아야 너도 살고 나도 살지. 죽으면 고깃값 밖에 못 받을거야. 아이고. 아까워서 어째”      


나는 자식을 판 대가로 지금까지 살려졌다. 얼굴이 비춰지는 큰 눈동자를 가진 네 얼굴을 보고 싶고, 혀로 갓 태어나 축축한 털을 핥아주고 싶고, 젖도 한번 물려보고 싶지만.... 그런 헛된 욕망은 참아야지. 너를 사랑하므로 너를 놓아줄 수 없음을 알까. 마지막 힘을 내어 산도를 조여본다.  


         

*키워드 글쓰기는 매일 아침 친구가 던져주는 키워드에 맞춰 한시간 이내로 짧은 글을 쓰는 겁니다.      

떠오르는 단상을 빠르게 캐치해서 쓰는 글이니 가볍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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