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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연 May 28. 2021

[05.26] 만보계

허리춤에 달랑달랑 매달려서 세상 구경하던 때가 좋았지. 그때 방판하는 화장품 아줌마가 어찌나 기운차고 열심히 걷던지 하루에 2만보는 우습게 올렸지. 아줌마가 사람들을 눕혀놓고 마사지를 해주는 손놀림이 얼마나 정성스럽던지 손가락으로 얼굴을 휘감아 돌리면 푸실푸실 하던 사람도 단박에 팽팽해졌다니까. 한번 온 손님들이 단골이 될 수 밖에 없었지. 서울에 아직도 있을려나, 3호선 타고 구파발에 가면 겨울이면 눈썰매를 타도 될 정도로 가파른 동네가 있는데 골목은 좁고 좁쌀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 윗마을까지 올라가려면 얼마나 숨이 가파. 무거운 화장품 가방을 옆에 메고 중턱 쯤 올랐을 때 아줌마가 휴~ 하고 숨을 몰아쉬면서 나를 허리춤에서 꺼내 살펴보곤 했지. “아이고 벌써 만보를 걸었네. 운동도 하고 돈도 버니 얼마나 좋노” 다시 허리춤에 차고 언덕을 오를 때면 아줌마의 오른발 왼발에 맞춰 나도 자석추를 왔다갔다 하면서 숫자를 셌지. 저 언덕에는 어떤 손님이 기다리려나, 오늘은 얼마나 더 걸어야 집으로 가려나. 자석추를 너무 많이 흔들어대서 피곤해지는 어스름한 저녁까지 우리는 하루종일 함께였지.      


집에 가면 트럭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남편은 누워있지 애들은 돈 달라고 하지 언덕을 오를 때보다 숨이 더 가프고 마음이 갑갑했어. 애들은 반찬투정에, 나이키 신발 사달라는 소리만 해댔지. 나이키를 사달라고 막내가 일주일 내내 우는데 고집이 얼마나 세던지 시장 가서 나이스 사서 겨우 달랬지 뭐. 밤이 되면 안쑤신데가 없다고 하면서 돈 세는 재미에 고통을 잠시 까먹었지.      


아줌마? 은퇴했지. 그리고 지금은 요양원에 있어. 치매기가 조금 있어서 애들이 몇 년 전에 못 보시겠다고 요양원에 보냈어. 거기서 매일 앉아서 텔레비만 보는데 걸을 일이 있겠어. 나도 서랍 속에 한참 있다가 손자가 신기하다고 꺼내서 손바닥에 들어 올리더니 “아빠 이게 뭐에요? 만보계요? 우와 흔들어보면 소리가 나는데 돌멩이가 들어있나봐요.”라고 하네. 누가 다시 나를 허리춤에 차줄까, 세상 구경을 할까 싶어서 눈물이 살짝 나게 설렜는데, “아빠! 요즘 누가 이런거 써요? 핸드폰으로 다 되는데!”하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네.  

   

매립지에 묻히기 전에 아줌마 한번 보고싶네. 우리는 멋진 파트너였거든.  



*키워드 글쓰기는 매일 아침 친구가 던져주는 키워드에 맞춰 한시간 이내로 짧은 글을 쓰는 겁니다.      

떠오르는 단상을 빠르게 캐치해서 쓰는 글이니 가볍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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