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석가모니는 샤카족의 성자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샤카무니의 중국식 발음이다. 그것은 그를 기리는 말로서 후대에 그 위상에 걸맞게 부여된 것이다. 탄생과 동시에 죽음까지 그가 달고 다녔던 개별성의 징표로서 진짜 이름은 싯다르타 고타마이다. 나는 어릴 적 부처님의 본명이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배웠는데 고타마가 성씨고 싯다르타가 이름이니 그건 이름의 한국식 번안일까. 어쨌든 그 이름은 지금으로부터 2500년 경(정확히는 알 수 없다) 네팔 부근의 샤카국에서 태어나서 사상 처음으로 불교적 사유를 시작하고 정립한 철학자의 이름이다. 그리고 구도자로서 시작해 인도자가 되어서 약 2500년간 인간의 생과 사유가 빠질 수밖에 없는 어떤 심연을 메꾸어 주었던 위대한 인물의 이름이다. 성과 이름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역마다 시대마다 조금씩 이견이 있겠지만, 그 둘은 하나로 합쳐져야만 비로소 고유명사로 완전해진다. 부처님은 고타마이기도 하고 싯다르타이기도 하지만 그의 이름은 싯다르타 고타마이다.
헤세의 상상 속에서 싯다르타 고타마는 둘로 쪼개어진다. 부처님의 업적과 인도자로서의 모습 은 고타마가 된다. 부처님의 고뇌, 슬픔, 욕망, 등 인간적인 일면과 구도자로 모습은 싯다르타가 된다. 싯다르타는 인간성의 총합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부정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가슴을 갈가리 찢고 출가한다. 출가 후 탁발승의 무리에 합류해서도 유아독존의 오만을 은연중에 내비치며, 오만한 모습 그대로 스승을 제압하고 무리를 떠난다. 인간의 세계에 내려온 후 카말라를 만나고 사랑과 성을 그녀로부터 배운다. 돈과 허영심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과시적 인정투쟁의 세상에서 그 역시도 그렇게 된다. 탁발승의 무리에서 배운 단식의 능력(신체적 욕구에 대한 인내심)은 모두 바닥났다. 사색과 구도의 세계도 그를 떠나갔다. 말미 즈음에 아들 싯다르타를 쫓아 숲을 뒤지면서 그가 지었던 표정은 부정과 애착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오래전 싯다르타의 아버지가 지었던 표정이며, 수행의 세계가 품는 차가운 자비심과는 거리가 먼 뜨거운 절박함이었다.
싯다르타가 구도자로서, 그리고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육체성과 개별적 자아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을 때, 고타마는 완성자로서 가장 높은 위계에 머무른다. 고타마는 작품 내내 항상 위대한 완성자, 흠결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성인으로 모든 이에게 추앙받는다. 그의 표정에는 초연함이, 미소에는 자비심이, 걸음걸이에는 당당함이 서려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완성자가 되었는지 헤세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싯다르타의 다른 모습이고, 싯다르타는 그의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서로의 과거와 미래이면서도, 현실의 시간에서 각자 존재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둘의 만남에서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마음의 평정을 머나먼 이상향으로 인식하여, 그에 닿지 못한 모든 순간이 부족의 상태가 된다. 탁발승들을 따라 숲속에서 보았던 피골이 붙은 자들의 광경, 인간 세상에서 보았던 카말라의 육체, 사람들의 곡소리와 환호성의 풍경, 풍경의 소실점에는 언제나 고타마가 있었다. 구도의 끝에 이른 사람. 자기 자신의 완성.
인간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싯다르타가 어떻게 고타마가 되는가. 특이한 점은 헤세가 ‘완성자’라는 직접적인 표현으로 인간을 완성되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완성자는 세계의 단일성을 체화한 존재다. 세계의 단일성이란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것. 돌멩이와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것. 미래와 과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만물을 인연의 끈으로 묶고, 시간성과 공간성을 제거해버린 상태. 그건 상태라기보다는 하나로 중첩된 무수히 많은 세계의 거대한 겹침이겠지만 이는 완성자의 마음의 상태로 실현된다. 역사적 부처의 현신인 고타마를 제외하고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은 바주데라와 싯다르타 두 명이다. 바주데라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선지자로서 ‘데미안’과 아주 비슷하다. 바주데라의 미소를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데미안이 으레 풍겼던 특유의 신비의 냄새뿐이다. 한편 싯다르타는 역사 뒤편에 감추어진 부처가 겪었을 인간적 고뇌의 현신이다. 그는 젊을 적의 번영과 이후의 연속된 몰락 끝에 바주데라에 다다른다. 이 점에서 헤세는 완성을 위해서는 싯다르타의 방황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듯하다.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던 고빈다가 후에 싯다르타를 경배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 마지막 장면. 인간의 희노애락을 모르는 존재가 어떻게 완성될 수 있겠는가. 내려오는 부처의 경건하지만 일면적인 전설에 대한 헤세의 답이다.
헤세가 말하는 완전성의 개념이 정확히 어떤 정신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부처를 다룬 이야기인 만큼 저변에 흐르는 사유는 대체로 불교적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윤회를 넘어서 새로운 완전성(해탈)을 지향해야한다. 누군가가 대신 인간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 구원하는 존재다. (예수가 원죄를 진 인간을 대신해서 고통을 감수했다는 기독교의 구원관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어떤 거대한 존재로의 합일을 갈망한다는 점에서, 나를 포함한 만물에 대한 사랑이 특별히 강조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뉘앙스가 보이기도 한다. 불교냐 기독교냐를 떠나서 헤세가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싯다르타> 등에서 보여준 것은 구원을 바라는 자들의 인간적인 투쟁이다. 전해오는 부처나 예수의 이야기에서 그들은 완벽한 성인여서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몰락은 단 한 줄도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그래서 헤세를 읽는 사람들은 특별하고 질서정연한 완전성에 대한 교리가 주는 부담에서 자유롭다. 그저 헤세가 그리는 인간들의 아름다움을 느끼면 된다.
그는 철학자의 신비한 언어로 소설을 쓴다. 단일성, 자아, 아브락사스, 세계, 등 <싯다르타>에서만 봐도 자아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그 말은 때로는 욕망이나 충동, 때로는 사유를, 때로는 인식을 나타낸다. 그의 언어는 두루뭉술하고 때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무거운 언어가 동화와 같은 서사와 합쳐질 때 느낄 수 있는 신비의 효과는 놀랍다. 그의 글을 읽으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걷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신과 악마가 싸우고 마법이 존재하는 육체적이고 현상적인 환상이 아니라 정신적이면서 은밀한 신비의 세계. 그가 전달하는 것은 신비라기보다는 신비로운 느낌이다. 헤세는 이제 더 이상 동화의 신비를 믿지 않게 된 회의적인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쓴다. 언젠가 느꼈던 동심으로의 회귀, 어딘가 나를 이끌어주는 신비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고개를 드는 믿음, 스스로에 대한 성찰. 그런 감정들 때문에 마음이 간지럽다. <데미안>의 새와 알에 대한 유명한 비유처럼, 헤세의 문장에는 스쳐서 지나가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가 묻어있다.
이 책을 읽다가 서사가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여러 사건의 전개가 뜬금없었다. 카말라는 갑자기 아들을 낳는다. 탁발승 무리에서 나올 때 싯다르타는 갑자기 마법을 사용한다. 이처럼 서사는 충동적이고 갑작스럽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이렇게 글을 쓰게 되는 지금에서야 나는 이 이야기의 서사가 촘촘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야기는 고빈다와 출가하는 데서 시작해서 고빈다의 절을 받는 장면으로 끝난다. 아들이 아버지를 이기는 장면은 처음과 끝에서 정확히 대응한다. 카말라와의 인연은 사랑과 죽음으로 끝났으며 그녀는 바주데라의 아내가 죽은 자리에서 죽었다. 싯다르타가 고타마와의 만남을 끝내고 건넜던 그 시작의 강이 <싯다르타>의 마지막 장면이 된다. 마음씨 좋은 뱃사공은 사실 구도자였고, 영적 형제였으며, 더 놀랍게도 이미 깨달은 자였다. 젊음의 패기와 말년의 초라함, 아버지와 아들, 깨달은 자(고타마, 바주데라)와 구도자(싯다르타, 고빈다), 생과 사, 만물에 대한 무관심과 만물에 대한 사랑. 싯다르타의 일생을 이루는 것은 모조리 이러한 대응이다.
문득 하루키가 어디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서사나 개연성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는 것. 자신의 세계 속에서, 작품 속에서 개연성이 있다면 그걸로 서사를 쓰기에는 충분하다는 것. 헤세의 세상이 그렇다. 무자비한 리얼리즘 소설이 개연성이라는 이름으로 가두어 두었던 이야기의 아름다움, 노스텔지어를 헤세의 소설에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