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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Aug 19. 2020

조르바가 남긴 메시지, 수양하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결 


오르한 파묵은 이렇게 말했다.


‘세월이 너무 빨리 바뀌니 오늘날의 책은 100년 후에는 아마 잊힐 겁니다. 극소수만 읽힐 거에요. 200년 후에는 요즘 쓰인 책 중 다섯 권 정도만 살아남겠지요. 내가 그 다섯 권 중에 들어갈 책을 쓰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작가란 무엇인가/ 오르한 파묵
 
이런 문제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행복한 작가다. <조르바>는 적어도 100년은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1947년 나온 작품이니, 100년까지는 30년이 남았는데 거뜬하다. 현대인은 조르바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현대인은 정확히 조르바에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운명과 조건에 대한 끊임없는 불평불만과 행동하지 않는 팔다리, 욕망과 능력의 불일치, 망상과 현실의 괴리. 먹고 싶을 때 먹고,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하고, 침 뱉고 싶을 때 침 뱉고, 손가락 자르고 싶을 때 자르고. 타인의 시선, 도덕, 허영심, 중독, 정치적 올바름, 눈치 등등 현대인을 묶어두는 것들을 일일이 다 나열하기도 힘들다. 온갖 속박을 걷어낼 생각은 못하고 속으로 전전긍긍 궁시렁궁시렁대는 그들에게 조르바는 새로운 영감을 주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제도와 정해진 생활양식과 연일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자극에 녹아들대로 녹아든 현대인들이 <조르바>를 읽는다고 얼마나 스스로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현대인들은 두려움에 중독되어 있다. 기회비용의 세상에서 상식에 어긋나고, 자본논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바보짓’으로 매도된다. 


그렇지만 바보짓이 없으면 조르바도 없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이 잡것이!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p429
 
마지막 문장을 내 식대로 해석해본다. ‘질러야 인생을 보게 되는데!’ 위대한 말이지만 무책임한 말이다. 기업 입사를 포기하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조르바의 좋은 예다. 남의 여자를 사랑해서 그 여자와 결혼한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좋은 예로 인정해줄 수도 있다. 도자기를 빚으려 손가락을 자른다. 조금 기괴하긴 하지만 멋진 예다. 짝사랑하는 여자를 성폭행한다. 안 된다. 평소 동성애자가 싫었는데, 조르바를 보고 동성애자를 죽인다. 이것도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평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조르바를 보고 성차별적인 행위를 밥 먹듯이 한다. 안 된다. 조르바는 자유의 선봉장이자 도덕의 파괴자이기도 하지만, 조르바로 바글바글한 사회에는 얼마나 떠들썩할지 걱정이 된다. 조르바처럼 웅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면, 그 시대는 바야흐로 멋진 영웅이 시대일 것이다. 귀가 잘려도, 직장을 잃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모두 돌아오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삶을 고양시키는 멋진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수양이 낮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조르바의 말이 파괴적인 형태로 진화할지 누가 알까감정적으로이념적으로 쉽게 휩쓸리고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 이데올로기, 대중매체, 권력자 같은 악당들이 그들을 쉽게 놔두지 않는다. 경제 불황이 닥치면 어김없이 차별적이고 약자를 공격하는 고약한 사상이 떠오른다. 역사상 가장 정치, 경제적으로 발전했다는 21세기의 미국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해결할 수 없는 경제 불황 앞에서 사람들은 도덕을 말하는 정치인들을 위선적이라 비난하고, 거리낌 없이 모든 불행을 사회적 약자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았다. 이런 맥락에서 주목해야할 인물은 오그레다. 오그레는 여러모로 찌질하고 부족하게 묘사되는 인물이지만, 이 인물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모든 악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 자신의 욕망, 파괴적인 서양 근대 사상, 공상적 사회주의, 불교까지. 모두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밟았던 노력의 징검다리였다. 그리고 조르바를 만났다. 조르바는커녕작중 화자만큼의 수양도, 결단도, 사유도 없는 사람들에게 영웅의 자유는 언감생심.
 
조르바의 이야기는 21세기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전달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자유를 추구하라면 수양을 닦을 것. 모든 존재에게 연민을 가질 것. 자유를 추구하면서 삶을 사랑할 것.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멋진 사람이 될 것. 인물들의 구체적인 말과 행동으로 차가운 진리가 따듯해진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읽어야하는 책이다. 우리 인격의 보존을 위해, 우리의 지향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 인생이 끝없는 수양이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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