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뒤편에 얽혀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역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와 블라디미르 푸틴. 두 사람은 이름이 같다. 두 사람이 배다른 형제라거나 하는 비사는 없다. 그저 우연이다. 블라디미르(볼로디미르)라는 이름은 슬라브권에서는 흔한 남성 이름이다. 통치한다는 뜻의 '블라디'와 탁월하다는 뜻의 '매루'가 결합된 단어라고 한다. 이름이 갖고 있는 뜻은 위대한 통치자쯤 되겠다. 다만 그 위대한 통치자라는 두 지도자가 서로에 총포를 겨눈 채 저주를 퍼붓고 있는 구도가 묘하게 공교롭다.
이런 우연은 톺아보기엔 일차원적이다. 이 두 국가가 인접해 있고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자산이 많았기에 그다지 특별한 우연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번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김아무개라는 사람이 당선됐다 하자. 그러면 북한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수장인데 남한도 '김'아무개가 그런 위치이니 지도자의 이름에 대한 우연은 말만들기를 좋아하는 나 같은 호사가들이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기엔 기이하다. 나는 세상이 실제로 발현될 수도 있었던 여러 가능성의 줄기가 이리저리 얽히는 장이라 본다. 그런 만큼 때때로 우연과 필연의 경계도 뚜렷하지 않은 일들이 생긴다. 일용직으로서 현장에서 일하던 김씨 아저씨가 짐을 나르다가 우연히 작업장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지면 동료들은 '어휴 김씨 아저씨가 운이 나빴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 자리에 바나나 껍질이 떨어져 있었는지 파고 들다보면 현장 관리나 감독이 사실 부실했다는 필연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이름의 우연 뒤편에도 '역사의 필연'이 숨어 있다. 두 국가의 역사가 전개된 궤적을 보면 블라디미르와 볼로디미르가 싸우게 된 경위에 어떤 필연성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볼로디미르라는 이름의 내력은 양 국 역사가 엉키게 된 시작점과 연결돼 있다. 그 말도 엄밀히는 옳지 않겠다. 볼로디미르라는 이름이 슬라브권에서 흔해질 정도로 세상에 널리 알려질 무렵에는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없었다.
대신 그 무렵에는 두 국가가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다고 하는 옛 국가가 있었다. 중세 동유럽의 키이우(키예프) 루스 공국이다. 이 국가는 이름부터가 현대의 관점에서 모순적이고 이질적이다.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의 수도로 젤렌스키 대통령이 도망가지 않고 머물겠다고 결심한 바로 그 장소지만, 뒤의 '루스'는 러시아의 국명이 유래된 단어다. 본래 이 키이우 루스 공국은 당대 루스 공국이라 불렸지만 오늘날 러시아와 국명 상 혼동을 없애기 위해 임의로 옛 중세 국가를 키이우 루스 공국으로 호명키로 했기 때문이다. 이 이질적 결합처럼 두 국가의 역사는 10세기 무렵부터 한동안 겹쳐진 채 흘러갔다.
이런 까닭에 키이우 루스 공국은 누구의 것인지 문제가 줄곧 떠올랐다. 이 국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중 누구의 역사인가. 이런 의문을 안고 키이우 루스 공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바로 볼로디미르의 내력을 먼저 마주치게 된다. 일단 볼로디미르(혹은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시조가 누군지는 분명치 않다. 지금까지 발견된 사료상으론 893년에 죽은 블라디미르 라사테라는 불가리아의 군주의 이름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역사상 이름의 진짜 주인이라고 칭할 만한 인물은 그보다 약 100년 뒤에 등장한다.
거란의 성장으로 한반도에서 고려의 근심이 깊어지던 978년 볼로디매루 스벵토슬라비치(고대 동슬라브어)가 키이우 루스 공국의 군주로 등극했다. 형제들과 골육상쟁 끝에 공국을 장악하는 그는 주변의 다른 7개 공국으로 칼끝을 돌렸고, 모두 복속시켰다. 이런 업적으로 그는 키이우 루스 국가 전체의 수장이라는 뜻에서 11세기부터 '볼로디매루 대공'이라 불렸다. 이 대공이 현대의 우크라이나-벨라루스-모스크바를 포함한 러시아 서부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땅의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역사에 최초로 등장시킨 것이다.
볼로디매루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성(聖)공'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종교를 검토한 끝에 988년 기독교, 그 중에서도 동방 정교를 국교로 지정했다. 그 드넓은 땅을 하나로 묶어주는 종교, 신앙, 종교적 예술과 성직자 집단이라는 접착제를 이식한 것이다. 특히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정교를 택해 이후 공국에서 분리되는 러시아가 가톨릭·개신교의 유럽과는 문화적으로 구별되도록 역사의 경로를 노정한 셈이 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도 대부분 국민이 분리 독립한 정교 분파인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믿는다. 두 국가의 문화적 동질성 역시 러시아어로는 블리다미르, 우크라이나어로는 볼로디미르로 번안되는 이 인물의 업적인 것이다.
볼로디매루에서 비롯된 양 국의 역사는 그의 죽음 100여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12세기에 이르면 키이우에 머무는 군주의 지위가 약해지면서 거의 독립하다시피한 10∼15개 공국이 나타난다. 그 중 하나가 동북부의 '로스토프 수즈달' 공국인데, 이 곳이 러시아로 이어지는 모스크바 공국의 전신이다. 그보다 또 한 세기 뒤인 13세기 중반부터는 키이우의 힘은 침체되는데 반해 모스크바가 세력을 키우는 추세가 뚜렷해진다. 13세기 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사의 중요한 장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몽골 고원에서 부흥한 몽골이 키이우 루스 공국에 들이닥친 것이다. 공국들은 차례로 패퇴했고 키이우도 1240년 함락됐다.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역사가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는 중세 키이우 공국의 종막을 이때로 본다. 찬란한 역사가 끝난 것이다. 반면 새롭게 등장한 몽골 중심의 질서에 모스크바 공국은 잘 적응했다. 이들은 몽골 치하에 순종했고, 몽골은 모스크바에 다른 공국에 대한 징세를 맡겼다. 이 과정에서 유복해진 모스크바는 훗날 제국으로 대두하는 최초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이후 모스크바 공국은 ‘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소비에트 연방까지 연속적 경로를 밟으며 현대 러시아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키이우 공국 이후 우크라이나는 역사에서 이렇다 할 강력한 국가의 모습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이런 지리멸렬의 주요 원인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외세의 개입 때문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스크바 공국이 성장한 ‘루스 차르국’이 우크라이나 지역의 공동체를 가장 억누르는 악역이 됐다.
키이우 공국 멸망 후 15세기 무렵 우크라이나 땅에는 민족국가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었던 ‘코자크’라는 자치 무장 집단이 등장한다. 볼로디매루 성공 외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또 다른 대영웅으로 꼽히는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바로 17세기 이 코자크의 수장이었다. 최초에 그가 투쟁했던 대상은 우크라이나 땅에 사는 주민들을 농노화시키려 했던 폴란드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같은 ‘정교도’였던 루스 차르국을 끌어들여 폴란드를 상대하고자 했다.
폴란드 압제의 극복을 염원하던 흐멜니츠키는 루스 차르국과 결국 페레야슬라프 조약이라고 불리는 논란의 협정을 맺고 만다. 군사 지원을 받는 대신 차르의 권위를 인정하겠다는 게 골자다. 이는 차르의 지배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만큼 이 조약에 대한 양 국의 입장이 천양지차다. 러시아는 양 국 국민이 본래 한 민족인데 잠시 갈라졌다가 이 조약을 계기로 다시 자국에 통합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우크라이나는 이를 흐멜니츠키가 폴란드와 투쟁을 위해 짜냈던 무수한 동맹 중 하나라고 본다.
역사가들은 이 조약이 러시아가 되레 우크라이나를 집어삼키는 첫 걸음이 됐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이후부터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한 루스 차르국의 간섭이 노골적으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이를 깨달은 흐멜니츠키는 스웨덴을 꾀어내 루스 차르국에 대적하기 시작했다. 흐멜니츠키 사후 등장한 지도자 이반 마제파도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와 대치했다. 1709년 드디어 코자크-스웨덴 연합군은 우크라이나 중부 폴타바에서 루스 차르군과 정면으로 맞붙는 데 이르렀다. 여기서 우크라이나는 대패했고, 이로써 러시아와 결별하려 했던 전근대의 마지막 기회도 무산됐다.
10여년 안에 스웨덴까지 제압한 표트르 ‘대제’는 1721년 러시아 ‘제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러시아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러시아가 유럽의 강국으로 커가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예속도 강화해갔다. 예카테리나 2세는 아예 1783년 우크라이나의 현 미콜라이이주, 오데사주, 헤르손주, 크림반도 등과 함께 현재 양국의 교전이 벌어지는 돈바스 지역을 묶어 노보로시야(새 러시아)라는 자치령까지 뒀다. 우크라이나라는 자치 공동체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부정된 셈이다.
이후 러시아 제국이 혁명을 거쳐 소비에트 연방으로 변하면서 우크라이나 역시 연방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이런 까닭에 우크라이나라는 국가가 안정된 모습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건 결국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였다. 소련 말인 1980년대 후반부터 이미 우크라이나에서는 독립의 열기가 무르익어 갔다. 그 징표로 사람들은 볼로디매루 성공의 삼지창을 상징하는 문장을 가슴에 달고 다녔다. 결국 1991년에야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분리 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이 보여주는 건 1991년 마무리된 줄 알았던 양 국의 얽힌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볼로디미르와 블라디미르의 이름에 얽힌 우연이 말해주는 것도 바로 이런 사실이다. 볼로디매루 성공을 함께 받드는 양 국의 공교로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의 이름을 쓰는 러시아 대통령은 전쟁 3일 전인 2월 21일 우크라이나가 단순히 이웃 국가가 아니라 자국과 역사, 문화, 정신세계에서 분리될 수 없는 일부라고 주장했다. 볼로디미르의 이름을 받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자국의 독립적 지위와 주권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내가 취재했던 우크라이나 집권당 ‘국민의 종’(영어명 Servant of the People)의 원내부대표인 예베니아 크라우추크(36) 의원도 이런 역사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의 전쟁이 곧 러시아에 맞선 자국의 오랜 투쟁의 연장선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 역사는 수백년간 러시아와 맞섰던 기록입니다." 크라우추크 의원은 양국의 얽힌 역사에 대해 묻자 열을 올렸다.
"지금 우리는 독립된 국가를 가져 본 역사상 첫 번째 시기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화면 속에서 그의 말이 점점 빨라져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크라우추크 의원은 지금이야말로 오랜 러시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러시아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했기에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지금 우크라이나라는 국가도, 국민도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군대가 있고, 지도자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크라이나라는 정체성으로 설 수 있게 됐죠."
(끝)
*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구로카와 유지 저)와 '우크라이나의 역사'(허승철 저), '우크라이나의 역사 1,2'(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책을 주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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