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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Nov 04.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2-귀접(5)>




 은미 씨는 에어컨을 켰다. 아니, 아까 내가 켜놨었는데 언제 또 껐대? 나는 그녀와 마주 앉으며 툴툴거렸다.


 “지난번처럼 더위 먹고 골골거리지 말고 에어컨 켜 놓고 있어요.”


 “그치만 실외기가 두 대나 돌아가니까 너무 시끄럽단 말이에요. 머리가 웅웅 거려요.”


 거 참. 얼마 시끄럽다고. 혼자 조용한 곳에서 오래 지내 와서 그러려니 했다. 사실 내가 오고 에어컨을 달고 우민이까지 합류하니 호은당은 늘 시끌벅적했다. 혼자 적막할 정도로 고요한 호은당에 살았던 은미 씨에게는 시끄러운 환경일 수도 있겠다. 이해했다.


 “그나저나, 이제 말씀하시기로 결정하신 거예요?”


 그럼 그렇지. 알고 있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 설명은 필요 없겠지.


 “끝까지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조금 전에 친구 놈 와이프가 연락이 왔어요. 도와달라고. 친구 놈이랑 정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친구 놈은... 배 안 고프고 안 죽고... 잠만 계속 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고... 와이프는 그 귀신인지 뭔지 모를 걸 좀 떼어서 정상인으로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이혼은 안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은미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빈 상을 두리번거리는 걸로 봐서는 입이 여전히 심심한가 보다. 과자 먹었잖아요. 내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 약과라도 가지고 올게요. 하는데 누가 문을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문이 사르르 열리고 우민이가 씩 웃으며 들어왔다. 녀석의 손에 들린 쟁반에는 시원한 수박 주스와 한과, 약과가 담겨 있었다. 은미 씨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너 최고다! 정우 씨보다 백배 나아!”


 뭐야, 그래서 나 자르는 거 아니죠? 저 종신 계약 아니었습니까?! 우민이는 배시시 웃으며 상 위에 주스와 간식을 올려놓았다.


 “주스는 아까 형이 만들어 둔 거예요. 상담실에 손님이 들어가면 이렇게 해야 하잖아요. 그쵸, 형?”


 야, 난 손님 아니다. 하지만 은미 씨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잘했어! 손님, 약값은 현금으로 지불하시면 조금 깎아 드릴 수 있어요.”


 그럼 그렇지. 이럴 때는 죽이 차암 잘 맞다. 왠지 나 빼고 세 사람이 원래 남매인 것처럼 잘 논다. 그래. 난 얘네 아빠였지. 깜빡했네. 자식들 사이가 좋으니 이 아빠는 행복하구나. 허허허...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지. 에휴.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수박 주스를 쭈욱 마셨다. 우민이는 시원한 상담실에서 나가기 싫은 눈치였다.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사랑채에 에어컨 켜고 있어. 문 열어두고, 손님 오면 그때 나오면 되잖아.”


 “아싸!”


 우민이가 나가고 장난스럽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나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일단, 친구 놈이 말하는 약은... 있어도 제가 반대합니다. 정상으로 돌리는 법, 있습니까?”




 은미 씨는 약과를 맛있게 먹었다. 약과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 나는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하나를 다 먹은 은미 씨가 방긋 웃었다.


 “진맥부터 해야죠. 귀신이 한 짓이라면 연화가 나서야 할 거고요.”


 그럼 그렇지. 불가능한 일이다. 놈을 불러서 진맥하고 연화가 나서서 푸닥거리를 하면, 놈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러면 지금 그 귀신같은 것에게 홀려버린 상태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지금까지 왔던 귀족 나부랭이들 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근데 그랬다가는 난리가 나겠죠? 절 죽이니 살리니, 정우 씨도 죽이니 살리니. 어쩌면 호은당에 불을 지를지도 몰라요.”


 불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전에 살던 집에서 불이 났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은미 씨는 가만히 앉아 하얀 접시에 담긴 한과와 약과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가?


 “그 접시는 정우 씨만 아시네요.”


 무슨 접시? 갑자기 접시 이야기가 왜 나와? 뜬 구름 잡는 엉뚱한 소리에 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은미 씨는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조용하던 방문이 열리고 은미 씨가 다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호리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효과는 꽤 좋지만... 그분을 제가 직접 못 봤으니 한 병으로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요. 일단은 한 병만 드릴게요. 약을 먹고 난 다음의 반응을 보고 한 병 더 먹이던지. 그렇게 해야죠, 뭐.”


 탁. 상 위에 올려진 작은 호리병은 딱 표주박처럼 생겼다. 하얀 도자기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흔한 무늬 하나 없었다. 종이를 끼워 나무마개를 단단히 끼워 놓았는데, 냄새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전에는 한약들의 냄새가 참 좋았는데. 내 코가 변했나. 나는 약병을 받았다. 바닥에 호은당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복신산(茯神散)입니다. 이것을 먹이는 사람은 반드시 반려자여야 합니다. 즉, 친구 분의 부인이 직접 먹게 하셔야 하는 겁니다. 제가 제조한 것은 분말 형태지만, 바로 먹일 수 있도록 물에 탔어요. 꿈에서 귀신과 교접하는 경우를 치료하는 약이에요. 그런 귀신을 흔히 몽마라고 하는데, 몽마에 씌면 보고 듣는 것이 음란하고 난잡해지죠. 몽마는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어요. 하지만 굉장히 영악하고 똑똑한 놈이라, 그 정기를 몽땅 빨아먹어서 죽게 만들지는 않아요. 시들시들하게, 살 수는 있게 합니다. 그리고 꿈에 나타나는 횟수를 천천히 줄이죠. 그러면 몽마에 씐 사람은 더욱 그 몽마를 갈망하게 됩니다. 현실에서 몽마를 대신할 것들을 찾아다니다가 점차 옳지 못한 길로 빠지게 됩니다.”


 몽마라. 들어 본 적 있다. 그거, 옛날이야기나 어디 중세 유럽에나 나오는 악마 아니었나? 서큐버슨지 인큐버슨지 하는 그거. 그게 동양에도 있구나. 그런 본능을 이용해 사람을 타락시키고 악하게 만든다는 그런 맥락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같은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려 하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잠깐만. 내가 왜 이렇게 쉽게 납득하고 간단하게 이해하는 거지? 이거 정말 심각한 건데.


 “얼마 뒤 몽마가 아예 나타나지 않게 되면, 몽마를 대신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을 찾아다니다 끝에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지요. 그렇게 사람을 나락으로 밀어 넣은 뒤, 몽마는 다시 찾아옵니다. 그때의 인간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정기는 없는 상태입니다. 이미 인간이 아닌, 몽마와 같은 원초적 본능만 남은 영혼이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몽마는 그 인간의 남은 정기를 모조리 흡수해서 죽여 버립니다. 그 몽마는 더욱 강해지겠지요. 인간쓰레기...라고 하는 말, 아시죠? 몽마는 그런 인간쓰레기를 만들어서 그 쓰레기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만 골라 먹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주 악질인 성범죄자들의 영혼을요. 운이 좋아 영혼이 다 먹히지 않고 살아남는다거나, 몽마의 성에 차지 않아 먹히지 않았다 해도, 그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 됩니다. 더는 사람도, 인간도 아닌 쓰레기. 그것이죠. 사회 악. 살 가치도 없는 것. 숨 쉬는 그 공기조차 아까운 것들. 존재 자체가 죄악인 것. 모든 범죄자들이나 악인들이 귀신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몽마는 그런 놈들을 만들어내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는, 암 덩어리입니다.”


 오늘따라 은미 씨는 왠지 상당히 감정적이다.

 은미 씨는 그 어떤 환자의 사연에도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폭언을 퍼붓고 호은당을 욕보이면 눈이 히떡 뒤집어져서 난동을 부리지만, 환자의 사연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은미 씨는 조금... 그래. 감정이 선명히 보였다. 분노하고 경멸하고 있다. 호은당과 자신을 향한 모욕 때문에 일어나는 화가 아닌, 몽마라는 것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과 분노와 증오가 진하게 배어 있다.


 어지간한 일로는 감정을 드러내거나 표출하지 않는 그녀와 반년이 넘게 지내다 보니, 나 역시 그들의 삶과 사연에 얽매이지 않게 된 지 좀 됐다. 그래서 지금의 내 반응 역시 좀 이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절친한 친구의 일인데. 이렇게 손님 이야기 듣듯 무감정하고 냉정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화는 난다. 화도 나고 어이도 없고 걱정도 된다. 하지만 이 화는 친구 놈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몽마라는 것을 향한 화였고, 이 걱정은 몽마에 쓰여 허우적거리는 멍청한 친구 놈을 걱정하는 불쌍한 와이프에게 가는 거다. 어이가 없는 것은 등신 천치 같은 내 친구 놈이고. 그냥 환자들 이야기를 들으며 느끼는 그 감정과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내가 무감각해진 것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온하며 언제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니, 상황을 냉철하게 보고 판단할 수 있으며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근의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무감각해진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평정을 유지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실상 멍청한 거였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던 거였다. 상황을 냉철하게 보고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른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서당개가 풍월 따라 월월 짖는 것뿐이었다.


 내 감정 소모하기 싫어서 남들을 보지 않았다. 내가 아닌 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고, 내가 아닌 일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고고한 학인 척했지만, 실상은 그걸 흉내 내는 뱁새보다도 못난 놈이었던 거다. 내가 아닌 남에 대해서는 만사가 건성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잘 난 맛에 푹 빠진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눈을 감고 귀를 닫은, 나만 아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천지 최고 등신은, 친구 놈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 한 어리석은 인간 주제에. 나는 성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그랬다. 텅 빈 머리가 무식인 것도 모르고 그것이 평온인 줄 알았다. 텅 빈 마음이 무감인 것도 모르고 그것이 해탈인 줄 알았다. 나는 멍청이였다. 든 것 없는 빈 깡통인 주제에 귀한 척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 주제에 친구 놈을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에 똥칠하고, 그것도 모르고 남 흉을 보고 있었다.


 “귀신은 마음이 병들었을 때 옵니다. 몸이 허해지면 마음이 약해지고, 그렇게 되면 귀는 쉽게 들어옵니다. 거기에 나쁜 감정들이 모여들게 되고, 그것은 더욱 크고 강한 귀물을 모읍니다. 그때가 되면, 저도 연화도 손을 쓸 수 없게 되고요. 마음의 병은, 마음으로 치료하는 겁니다.”


 은미 씨는 빙긋 웃었다. 가만히 그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던 나는 수박 주스를 단숨에 비웠다.


 “은미 씨, 저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약은 식전에 먹는 겁니다.”


 은미 씨는 방긋 웃으며 차키를 내밀었다. 나는 낯익은 키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사랑채의 방문에 걸터앉아 있던 우민이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지만 나는 우민이를 향해 손만 휙 저어주고 달려 나갔다.


 “혀, 형! 점심 먹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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