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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Nov 03.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2-귀접(4)>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남편 휴대폰으로 전화했었는데 안 받으시고... 남편은 지금 자고 있어서... 으흑...


 남편이 잔다는 말을 하다 말고 여자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아, 아니, 저기. 제수씨! 진정, 진정하시고예...”


 나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 나갔다. 친구의 부인은 애써 눈물을 참는 것 같았다. 훌쩍임이 줄었다.


 -죄송합니다. 앞뒤 사정은 다 아실 테니... 다른 말씀은 안 드릴게요. 우리 그이, 정상으로 돌릴 방법이... 정말로 없을까요? 그이가 소사님을 뵙고 왔는데... 그런 약은 없다고... 그랬다고...


 이 새끼. 구라 한 번 진하게 깠네. 끝까지 자기 마누라한테는 다정하고 착한 남편으로 남겠다? 웃기고 있네. 다 불어버릴까 보다.


 “저, 그게... 사실은... 하아... 그런 약이 있는지 없는지, 저는 약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런 일이 한약으로 치료가 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제 지식으로는 알 수 없으니 방문해서 진맥이라도 받아보라 했는데... 예약이 많아서 제가 아직 짬을 못 만들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몇 달 전부터 예약하신 분들이라 쉽게 조정할 수가 없어서요. 은석이, 많이 안 좋습니까? 밥은 먹고 있습니까?”


 -으흑. 흑... 밤낮없이 잠만 자요. 제대로 먹지도 않고요. 소사님 만나고 온 뒤로는 회사도 그만두고 아예 내내 집에서 잠만 자고 있어요. 일부러 자는 건지, 못 먹어서 힘이 없어서 자는 건지 모르겠는데... 며칠 사이에 사람이 새카맣게 변했어요. 눈 밑도 새카맣고 핼쑥하고... 살이 갑자기 다 빠져버리고... 제가 억지로 먹이면 선식이나 조금 먹고요. 이러다 진짜 죽을까 봐 너무 무서워요.


 와... 이 새끼, 아예 작정을 했네. 욕이 튀어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지 부인이 이렇게 걱정하는데, 지는 귀신하고 떡이나 치고 있고! 아오! 시발! 당장 달려가서 신나게 두드려 패고 싶었다. 아, 짜증 나.


 “... 아마 못 자게 말리면 더 난동 부리고 험한 짓 할지도 모르니까... 그... 이 번호, 제수씨 번호죠?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흐느껴 우는 친구 놈의 부인을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다시 연락하겠다고만 했다. 방법이 없었다. 하... 성실하고 착한 놈이었는데. 정말 꿈 많은 놈이었는데. 가정을 꾸리면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늘 환상에 젖어 사는 놈이었는데. 정말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놈이었는데. 진짜... 내 친구지만 진짜 진국인 놈이었는데. 왜 저렇게 됐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났다. 은미 씨가 방법을 알까? 연화가 할 수 있을까? 제수씨를 호은당으로 불러야 하나? 은석이를 부를까? 부르면 난동 부릴 것 같으니 우민이더러 운동을 좀 하라고 할까? 단기 호신술 같은 거라도 배울 데 없나?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내가 왜?

 짜증이 났다. 즐거운 마음으로 만난 오랜 친구가 내게 이런 똥을 던졌다. 이 똥 같은 새끼. 그래도 친구라고... 그놈의 우정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다. 꽁초만 남은 담배를 던져버리고 나는 단골 마트로 들어갔다. 이것저것 물건을 사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변해버린 은석이와 흐느끼는 제수씨 목소리만 남아 있었다.

 아, 이건 왜 담았지... 나는 과자 봉지를 내려놓았다. 이거, 은석이 놈이랑 학교 다닐 때 내내 달고 살았던 그 과잔데. 나는 가만히 과자를 바라보다 바구니에 같이 담았다.


 돌아오는 길, 정육점에 들러 불고기감을 사고 휴대폰 매장에 들어갔다. 나는 여기 직원을 모르지만 여기 직원들은 나를 아는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겠지. 이 동네에선 꽤 유명 인사니까. 반갑게 맞이하는 그들에게 나 역시 아주 친한 척 반가이 인사하고 들어가 휴대폰을 보여 달라 했다. 최신 기종과 그것과 비슷한 보급형, 아주 색다른 디자인의 휴대폰까지 몇 개가 앞에 놓였다. 내가 원래 쓰던 폰이 뭐냐고 묻길래 보여주었더니, 직원들이 무슨 고대 유물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왜? 이거 6년밖에 안 썼는데. 직원은 같은 회사에서 나오는 같은 라인이라며 최신식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음. 크기는 조금 더 크지만 훨씬 얇고 가벼웠다. 좋네. 나는 그 휴대폰에 새 번호를 넣어서 하나, 사과 폰으로 하나 더 달라고 했다. 아까 우민이가 보고 있던 휴대폰이 최신형 사과 폰이었다. 와, 더럽게 비싸네.

 약정이 어쩌고, 요금제가 어쩌고, 뭔 부가서비스와 구구절절 이야기가 길어졌다. 음... 이래서 은미 씨랑 연화가 거두절미하고 일시불! 하고 외치는 거구나. 나는 빙긋 웃고 24개월 약정에 체크했다.

 새 휴대폰 두 개와 장바구니를 들고 호은당으로 가는 길. 아직은 여전히 뜨거운 여름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결국 휴가 안 갔구나. 휴가 가고 싶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조용히 쉬고 싶다.

 어, 그러고 보니... 여름에 비우면 안 된다고 했던 게 우민이 때문이었나?


 호은당에 돌아오니, 마침 손님이 나오고 있었다. 얼마 전 약을 타 갔던 손님인데, 약을 달일 줄 모른다며 밤낮으로 전화해서 날 괴롭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결국 전기 약탕기를 샀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실패한 만큼 새로 사가는 것 같다. 누런 봉투가 묵직했다. 저거, 돈은 받았나 몰라. 연화가 보내주는 손님 아니면 약값을 제대로 받는 꼴을 못 봤다. 은미 씨는 그게 적정 가격이라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땅 파서 장사하는 것 같았다. 적자 난다고. 망한다고요. 내 월급 깐다고 하기만 해 봐라.

 손님을 배웅하고 장바구니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며, 테이블 위에 올려둔 쇼핑백 하나를 가리켰다.


 “우민아, 둘 중에 마음에 드는 걸로 써.”


 그 말에 눈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이는 은미 씨였다. 아니, 댁은 지난주에 새 폰으로 바꿨잖아요. 그것도 진상 귀족 나으리가 공짜로 준 거면서. 물론 그 귀족 나으리가 은미 씨 폰을 박살 내는 바람에 사 준 거긴 하지만. 그래도 최신식 폴더 폰이다. 뭔 브랜드랑 콜라보까지 한 한정판이라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는 그것. 거기에 뭔 무선 이어폰이 무선 충전기 등등해서 풀세트로 뽑아다 줬잖아요. 애 꺼 뺏지 마요. 애 꺼 뺏는 어른이 제일 추접스러워.


 은미 씨와 우민이는 눈을 반짝이며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나는 장바구니를 정리하며 웃었다. 와! 우와! 멋지다! 하는 탄성이 계속 들려왔다. 부스럭거리며 장바구니 바닥에서 나온 과자봉지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 과자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우민이는 둘 중에 뭘 골라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받는다는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운 눈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나도 이 폰은 업무용으로 돌릴 거라서. 뭐, 이것저것 넣으니까 공짜라더라. 나도 둘 다 마음에 들어서 뭘 쓸지 못 정했거든. 네가 골라 봐.”


 “그... 저...”


 나는 과자 봉지를 주욱 찢어 테이블에 펼쳤다. 은미 씨의 손이 번개처럼 날아와 과자를 집어 갔다. 바삭바삭. 나도 과자를 입에 넣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은미 씨는 씩 웃었다. 아니, 왜 애 겁을 주고 그래요? 요금은 열심히 일 해서 번 돈으로 내라고 했다. 나는 단지 명의만 빌려 준 거라고 말이다. 나중에 밖에 나갈 수 있게 되면, 그때 명의 변경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우민이는 자신이 영영 이 호은당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알고 있다.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미 나락에 떨어진 아이에게 더 큰 절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고민하는 우민이에게 사과 폰을 던져주고, 나는 국산 폰을 쥐었다. 원래 쓰던 것과 같은 회사 제품을 쓰는 편이 나도 적응하기 쉬울 테니까. 우민이는 정말 기뻐했다. 당장 휴대폰을 들고 조물락거리는 걸 보니, 애는 애다. 나이가 스물이면 뭐 해. 사회에 나와 본 적도 없는 꼬꼬마 애긴데.

 나는 우민이의 도움을 받아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새 번호를 돌렸다. 이전에 쓰던 번호로 만든 코톡에는 호은당 대문 사진을 찍어 올리고 호은당 박정우라고 바꾸었다.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바뀐 번호를 알리고 나니, 한참 동안 정신없이 코톡과 전화가 울렸다.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은 이들도 꽤 있었다. 나는 새 휴대폰에 은석이 놈의 부인 연락처를 저장했다. 그리고 은미 씨에게 조용히 눈짓을 주었다. 과자를 먹던 은미 씨는 손가락을 쪽쪽 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미 씨가 먼저 상담실로 들어가고, 나는 휴대폰을 만지느라 정신없는 우민이의 머리를 콩 때렸다.


 “인마. 밤에 봐도 돼. 코톡만 네 아이디로 로그인 해 놓고 친구들이랑은 나중에 연락 해. 형은 약사님이랑 이야기할 게 있어서 잠깐 들어갔다 올 테니까, 손님 오면 어떻게 하는지 알지?”


 “에, 헤헤. 네, 형. 말씀 나누시고 오세요. 모르는 거 주문하시면 갈게요.”


 우민이는 똑똑했다. 차 우리는 법을 금방 터득했다. 녀석은 휴대폰을 소중히 꼭 안고 나머지 가방들을 사랑채에 가져다 놓았다. 나는 빙긋 웃고 상담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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