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2-귀접(3)>
“어, 형. 일찍 오셨네요.”
호은당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또 마당에서 예능을 보고 있었나. 텅 빈 마당에서 우민이가 프로젝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어질러진 테이블을 정리했다.
“어디, 갔어?”
“아, 누나가 떡볶이 먹고 싶다고 해서요. 떡볶이 정도는 제가 만들 줄 아는데...”
“아. 그거, 너 못 만들어. 미친 듯이 매운 떡볶이만 먹거든. 알지? 그 개매워 떡볶이. 그것만 먹어.”
“아아.”
우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크린을 두르르 말았다. 장비들을 챙겨 대청마루의 벽장에 넣어 두고 마당 정리를 끝내자 두 사람이 돌아왔다. 나를 보자마자 연화는 얼굴을 찌푸렸다.
왜, 또 뭐. 왜.
“어휴. 정말. 냄새 나!”
뭔 냄새? 술 냄새? 땀 냄새? 안 나는데. 술 냄새난다는 소린가. 나는 킁킁 거리며 몸 여기저기 냄새를 맡았지만 땀 냄새보단 향수 냄새가 더 진했다. 아, 혹시... 친구 놈을 만나고 온 걸 알고...?
그럴 수도 있다. 연화는 진짜 무당이니까. 나는 연화를 끌고 사랑채 뒤로 달려갔다.
“아, 왜! 냄새 나! 저리 가!”
“너, 내가 지금 누구 만나고 온 건지 알지? 그렇지?”
“뭐? 몰라. 아빠, 친구 만나고 온다며?”
“아니, 그거 말고.”
“몰라. 아빠가 말 안 하기로 했으면 하지 마. 이야기 끝! 아, 씻어! 빨랑! 냄새 지독해!”
연화는 손을 파닥파닥 흔들며 도망쳐 버렸다. 귀신 냄새가 씻는다고 없어지긴 하냐... 에휴. 나는 옷가지를 챙겨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 사이 마당에서는 세 사람이 신나게 야식을 먹었다. 우민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그거, 진짜 개 매워.
이 이야기를... 정말로 하지 말아야 하나. 그래도 제일 친한 대학 동기인데. 유일하게 같은 서울에 살면서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됐던 친군데. 정말... 모른 척해도 될까? 고민이 너무 많았다.
씻고 나오니 우민이는 매워서 죽었다며 물병 하나를 끌어안고 사랑채 마루에서 뒹굴고 있었고, 연화와 은미 씨는 맵다고 쌕쌕거리면서도 그 벌건 국물까지 숟가락으로 떠먹고 있었다. 대단하다, 정말. 나는 시원한 우유를 한 사람씩 나눠 주었다. 세 사람 모두 순식간에 우유를 비워 버렸다. 내일 분명히 속 쓰리니 어쩌니 할 거야. 그러면서도 왜 먹나 몰라.
땀을 뻘뻘 흘리는 은미 씨와 연화는 대청에 누워 있고, 나는 그들이 초토화시킨 떡볶이 그릇들을 치웠다. 와. 국물까지 다 먹었네. 결국. 내일 아침은 숭늉이다. 나는 냉동실에 넣어 둔 누룽지 두 장을 꺼내 물을 부어 냉장실에 옮겨 넣었다. 비척거리며 들어온 우민이는 배가 아프다며 징징거렸다.
“너는 특히 조심해야 할 애가 그런 거 겁도 없이 먹냐? 으이그. 이리 와. 위장약 줄게.”
나는 일전에 사 두었던 짜 먹는 위장약을 한 포 주었다. 우민이는 냉큼 빨아먹고는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래. 지금 많이 싸라. 내일이면 똥꼬에 불붙을 테니까. 내가 그랬거든. 죽는 줄 알았다. 정리를 마치고 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은미 씨가 나를 불렀다. 갑자기 왜? 언제 들어갔었는지, 안채의 상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거요. 주무실 때 머리맡에 뒀다가 눈 뜨자마자 물이랑 같이 먹어요. 엄청 엄청 귀한 약이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드셔야 해요. 이거 지인짜 비싼 약이에요.”
아니, 뭐 그렇게 비싸고 귀한 약을 주고 그래요? 왜? 아. 아까 친구 놈 만나고 온 거 때문이구나. 그 귀신이 나한테 붙었나? 아오! 난 그런 쓸데없는데 에너지 낭비하기 싫은데! 난 사람이 좋지 귀신은 싫다고!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그녀가 내미는 주머니를 받았다. 아주 보드라운 비단 주머니 안에 동그란 약이 만져졌다. 은미 씨는 지인짜 귀한 거예요!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래. 저 정도로 강조하는 걸 보니, 노비 계약 자동 연장이구나.
나는 구시렁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은미 씨와 연화도 이내 자러 들어가고, 핼쑥해진 우민이도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곧 잠에 빠졌다. 술은 확 깨버렸지만 내 몸에 남은 술은 나를 금세 재웠다. 그리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일어난 나는 눈을 뜨자마자 욕을 했다. 아, 시발. 기분 진짜 더럽네. 얼른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플라스틱 물병에는 먹다 만 물이 절반 정도 들어 있었다. 나는 물병을 꺼내고 어젯밤에 받아 둔 약을 입 안으로 던져 넣어 꾹꾹 씹었다. 맛이 뭐 이래. 우웩.
입 안에 남은 약까지 깨끗이 헹궈 삼킨 뒤, 나는 우민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새벽 다섯 시. 아침도 아니다. 더러운 꿈을 꾸었다. 정말, 기분이 너무 더럽다.
형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야살스러운 소리를 내며 내 몸을 더듬어댔다. 와, 진짜.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깨지 못했다. 내가 안 깨려고 안 게 아니라, 깨어나 지지가 않았다.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내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큰 소리를 내서 우민이까지 깨울까 봐 어떻게든 풀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허연 안개 같은 것이 내 옷 속으로 들어올 때는 얼마나 차갑고 미끄러운지 소름이 돋아서 미칠 뻔했다. 악착 같이 깨어나려고 손가락을 움직이려는데, 방문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꽝 하고 대문을 힘껏 차는 소리, 혹은 자동차가 어딘가에 세게 갖다 박는 소리, 아니면... 그래. 엄청난 벼락이 땅에 떨어지는 그런 소리.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고, 그 허연 연기 같은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땀으로 축축했고 창호지 바른 살문 너머는 푸르스름했다.
약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대청에는 소복 차림의 은미 씨가 앉아 있었다.
아오, 놀래라! 그 잠옷 좀 평범한 걸로 바꿀 수 없어요?!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마루에 털썩 앉았다. 은미 씨를 향해 어색한 아침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일어나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힐 때까지, 그녀의 눈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문 사이로 사르륵 사라지는 그녀의 손에 은빛의 무언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지만, 무엇인지는 정확히 보지 못했다.
새벽 공기가... 이렇게 차가웠던가.
며칠이 지났을까. 처음 친구를 만나고 왔던 밤, 나에게 왔던 그 허여멀건 연기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잠도 잘 잤고 꿈도 안 꿨다. 친구 놈은 그날 밤부터 지금까지 정말 뻔질나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정말 간절하게 설득도 하고, 진짜 죽여 버릴 것처럼 협박도 하고, 눈물로 호소하며 애원도 했지만 그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녀석은 오직 딱 한 가지 만을 원했다.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은, 오래 잠을 잘 수 있는 약. 오로지 그 꿈속의 여인과 더욱 오래, 더욱 깊게 함께 할 방법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보름이 넘게 녀석과 씨름하다 결국 나는 전화를 피하게 됐다. 하지만 전화기를 꺼 둘 수가 없었다. 호은당의 업무와 관련한 연락도 내 전화기로 오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전화기 하나 새로 살까... 안 그래도 바꿀까 하는 참이었는데. 액정도 금이 가고 기능도 엉망진창이라 요즘은 정말 문자가 되는 전화기일 뿐이었다. 고민하고 있는데 우민이가 웬 종이를 주워 들고 왔다. 대문 아래로 누가 밀어 넣은 광고지였다.
“오, 형! 정육점에 세일한대요! 고기 먹어요, 고기!”
정육점 세일 광고지, 마트 세일 광고지, 휴대폰 가게 광고지, 학원 광고, 네일숍 광고... 참... 알뜰살뜰 모아서 넣어주셨네. 한 번에 넣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마트 세일 광고지만 빼두고 나머지를 구겨 치우려는데, 우민이의 눈이 휴대폰 광고에 박혀서 떨어질 줄 모르는 것이 보였다. 아. 이놈, 폰이 없지. 이전에 쓰던 휴대폰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정지를 하든, 해지를 하든, 혹은 새로 만들든 우민이가 직접 신분증을 들고 가야 하는데... 지금 얘는 신분증도 없다. 재발급을 받으러 가려고 해도 대문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뭐가 마음에 드는데?”
내가 빙긋 웃으며 묻자 우민이는 씩 웃으며 광고지를 접었다.
“그냥요. 또 새 폰이 나왔구나. 해서 봤어요.”
“요즘 자고 일어나면 새 기종이지, 뭐. 고기 먹자고? 점심때 그럼 불고기 덮밥 먹을래?”
“아싸!”
“쉿, 손님. 이 녀석아.”
안채의 상담실에는 약방 손님이 와 있었다. 환호하던 우민이가 입을 꽉 막았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고 장바구니를 챙겼다.
“심부름 잘하고 있어. 인사 깍듯하게, 예쁘게 하고. 알겠지?”
우민이에게 호은당의 뒷일을 부탁하고 대문을 나서는데 또 전화기가 울렸다. 친구 놈이다. 참 징하다, 이 새끼야. 이 정도로 씹으면, 나라면 자존심 상해서 안 하겠다. 아이고. 나는 또 수신거부로 돌려버렸다.
담배 하나를 빼물고 골목을 나가는데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낯선 번호다. 분명히 친구 놈이겠지. 일 때문에 낯선 번호는 받아야 한다는 걸 이 놈도 아니까. 나는 조용히 전화기를 귀에 댔다.
“예. 호은당 소사 박정웁니다.”
-......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야, 김은석. 고마해라. 일 좀 하자, 새끼야.”
친구 놈이겠지. 나는 친구에게 한숨과 짜증이 섞인 욕설을 툭 뱉어내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저기, 저기...!
그 순간 희미하게 들려온 목소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이건 또 누구야? 김은석, 이 새끼. 수법을 바꾼 거야? 내가 가만히 있자 작은 목소리의 여자가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 호은당의 박정우 소사님... 맞으시지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친구 녀석이 장난을 자꾸 쳐서... 아하하! 호은당 소사 박정우 맞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오. 그 새끼 때문에 실수했다! 거래처 거나 손님일 텐데. 제엔자앙. 이 자식, 다시는 안 볼 테다.
-저... 김은석 씨 와이프 되는 사람입니다.
어... 네?
나는 골목 한가운데 우뚝 멈추어 버렸다. 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내 모든 사고는 정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