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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30.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2-귀접(2)>




 우리는 택시를 타고 멀리까지 이동했다. 친구가 선택한 조용한 술집은 호텔의 바였다. 이 자식, 이런 고급진 데도 다니는구나! 나는 한 번도 못 가봤는데! 근데 이런 데 시끄럽지 않나?

 상상했던 것처럼 북적이지도 않았고 젊은 사람들만 있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한 칵테일 바 같은 느낌이었다. 단지 아아주 고급스러워 보일 뿐. 나와 친구는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친구는 양주 한 병을 시키더니 조용히 있고 싶다며 직원에게 팁까지 줬다. 이 놈, 자주 온 놈이군.


 “뭐 그래 밑 작업이 많노! 인쟈 불어라.”


 친구는 내 재촉에 대꾸도 없이 술을 드르륵 따 잔을 채웠다. 주문한 과일과 고기 요리, 해물 요리 세 가지가 앞에 다 차려질 때까지, 친구는 입을 떼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술만 마셨다. 더는 찾을 일 없을 거라는 듯, 직원이 깍듯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친구 놈 뒤에 세워져 있던 파티션이 착 펼쳐졌다. 이야. 확실하네.


 “이게... 나는 사실 아직도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


 친구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최근 일본으로 한 달간 출장을 다녀왔다고 했다. 꽤 긴 기간이었지만 빠듯했던 일정 탓에 정말 바쁘게 움직이느라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일을 마치고 온 호텔에서도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고, 새벽부터 일어나 자료를 정리하고 조사하느라 끼니를 거른 적도 많았다. 2주 정도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는데, 3주가 넘어가니 눈에 띄게 지치더라고. 업무 특성상 접대도 많았는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나간 접대 자리에서도 졸기 일쑤였다고 한다. 너무 지쳐 현지 병원에서 링거도 맞아 보고 약도 먹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정말 놀랐다. 체력이라면 어지간한 운동선수보다 훨씬 나은 녀석임을 알고 있다. 덩치도 크고 자기 관리도 철저한 녀석인데, 그런 녀석이 쓰러질 정도라면 정말 많이 아픈 것이다.

 깨어나니 병원이었는데, 다행히 동행한 후배가 마무리를 잘해 주어 사흘 정도 쉴 수 있었다고 한다. 일의 시작은 퇴원 한 이후에 벌어졌다.


 퇴원한 날의 밤. 곤히 자는데 귓가에서 누군가 속살거리며 유혹을 하더란다. 처음에는 와이프의 장난인가 싶어 무시하고 잤는데, 이튿날 아침에 물어보니 와이프는 기겁했다. 아파서 쓰러진 사람에게 그런 장난을 칠 사람으로 보이냐며 오히려 서운해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자기 부인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미안하다 하고 그냥 넘어갔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매일 밤마다 나타났다. 나중엔 자기 양물에 손을 대는 것도 느껴졌다고. 기겁하며 깼더니 와이프는 깊게 잠들어 있었고 집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사나흘 그렇게 잠을 설치는데, 와이프가 일 때문에 사흘 출장을 갈 일이 생겨 혼자 남게 됐다고 했다. 혼자 밤을 보내는 그 날, 웬 아름다운 여자가 홀연히 나타났다고 했다. 누구라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아름답고 요염한 모습으로, 그 여자는 친구를 유혹했단다.

 친구는 당연히 꿈이라고 생각했고, 꿈이니까 뭐 어때. 하며 그냥 저질러 버렸다고 한다. 꿈이었지만 너무나 생생하고 또 너무나 좋았다고. 와이프와 관계할 때보다 수십, 수백 배는 좋았다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놈의 얼굴은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밤이고 낮이고 찾아왔다. 낮에 티브이를 보다 까무룩 잠들어도 찾아와서 유혹했고, 밤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친구는 꿈이니까.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열렬히 여자의 요구에 응했다고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욕을 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미친놈이야. 쓰레기지. 하고 잔을 비웠다.


 친구는 와이프가 없는 사흘, 그 여자와 뜨거운 시간을 갖기 위해 계속 잠을 잤다고 했다. 너무 좋아서, 너무 황홀해서 깨기 싫었다면서 말이다. 내 친구지만, 진심으로 역겨웠다.

 새끼야, 너 그게 바람피우는 거야.라는 내 말에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프에게 너무 미안한데,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돼. 모기가 날아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흘 동안 그 정체모를 꿈속의 여자와 관계를 잇다 보니, 와이프와의 잠자리는 마음에 차지도 않았고, 자꾸만 그 여자를 찾게 되더란다. 그러는 사이 저도 모르게 와이프와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녀석의 와이프는 업무 특성상 출장이 잦았다. 전에는 그 출장이 너무나 싫었는데, 그 무렵에는 출장 안 가나 하며 출장 가는 날을 기다리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와이프가 출장을 가면 회사에는 연차까지 써서 쉬고 밤낮없이 그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다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놈을 때리고 싶었다.


 “또라이 새끼야. 너 벌 받아. 벌 받는 다고!”


 “그래... 벌 받고 있다.”


 녀석은 지금 이혼 절차를 밟는 중이라고 했다. 결국 와이프가 바람을 의심했고, 친구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꿈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다고. 그 여자와 깊은 관계가 됐다고. 와이프는 미친놈이라며 욕했고, 꿈은 꿈일 뿐이라며 친구를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친구는 이혼을 요구했다. 바로잡아서 괜찮아지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자신의 마음으로는 당신을 바로 볼 수 없다면서 말이다.


 핑계다. 이 새끼, 혼자 살면서 그 꿈속 여자랑 계속 살 생각이구나.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꿈속 여자 이야기를 할 때 놈의 눈빛은 조금이지만 달라졌다. 이미 그렇게까지 흘러가버린 일을, 어째서 호은당의 도움까지 받아 가면서 바로잡으려고 하는 거지?


 “정우야. 내가 진짜... 진짜 쓰레기 같고 미친놈 같겠지만... 한 번만 부탁하자. 제발. 우리 우정을 봐서라도... 딱 한 번만. 부탁 좀 하자.”


 “... 귀신 쫓는 거라면 다른 사람,”


 “아니, 그거 말고. 안 먹어도 배 안고픈 약, 오랫동안 잠잘 수 있는 약을 사고 싶다. 오래, 아주 오래 자도 괜찮은, 오래 자도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죽지 않는 약. 죽지 않고 오래 잘 수 있는 약. 거기, 그런 것도 만들 수 있잖아. 그렇지?”


 “이 미친놈.”


 나는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술이 확 깼다. 뭐? 안 죽고 오래 자는 약? 이 새끼가 진짜.


 “이 또라이 새끼야. 내가 친구로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한다. 정신, 차려라.”


 “아니, 정우야!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그간의 우정을 봐서라도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안 한다. 약사님한테도 말 안 한다. 무덤까지 가지고 갈 테니까... 다시는 연락하지 마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바를 빠져나왔다. 뒤에서 나를 부르며 욕하는 친구의 목소리와 그를 진정시키려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닫힘 버튼을 눌렀다. 저 멀리 바 입구에서 달려 나오는 친구 놈이 보였다. 닫히는 문 사이로 마지막으로 본 얼굴은, 내 친구가 아니었다. 내가 알던 그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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