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2-귀접(1)>
<에피소드 12-귀접>
우민이는 꽤 일을 잘했다. 힘도 좋고 체력도 좋아서 내 일을 곧잘 거들었다. 다만 여기저기 아픈 곳도 있고 열흘간 고생하며 얻은 상처들이 많아서, 그걸 치료하느라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잔병 정도는 평생 달고 살아야 할 거라는 은미 씨의 말에도 이제는 상처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굉장히 긍정적이고 밝은 녀석이었다. 비루한 거지꼴이 되어 온 그 날 이후, 마음이 많이 복잡할 텐데도 우민이는 밝고 활발하게 잘 지냈다. 그 모습에 고마울 지경이었다.
녀석이 온 지 1주일이 지났다. 적응도 빨리 하고 잘 웃긴 했지만 여전히 어두운 녀석을 위해 잡생각을 털어버릴 수 있는 일거리를 주었다. 텃밭 가꾸기. 토마토와 너무 길게 웃자란 상추들을 뽑고, 그 자리에 배추를 심을 예정이다. 그 옆에는 상추도 새로 심고 파도 심어 두었다. 자그마한 텃밭은 우민이가 정성을 다 해 가꾸고 있었다.
“우민아. 형 마트 갈 건데. 뭐 사다 줄까?”
우민이는 대문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어제, 시험 삼아 나서보겠다는 우민이를 말리지 않은 것이 너무나 후회됐다. 우민이는 대문 밖으로 두 발을 딛자마자 지나가는 자전거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대로 나뒹군 덕분에 이마가 까지고 코피를 쏟고 손목을 삐고 다리에 멍이 들었다. 우민이는 답답하더라도 호은당 안에서만 지내는 것에 대해 온전히 수긍했다. 나가서 아픈 것보다는 조금 답답한 것이 낫다면서 말이다.
이마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우민이가 돌아보며 웃었다.
“그럼, 나 아이스크림요! 너무 더워요! 그거, 슬러시, 짜 먹는 거 그거 먹고 싶어요!”
“이 자식. 그거 비싸잖아!”
그러면서도 나는 순순히 돌아 나왔다. 녀석이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다 사주고,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다 구해 주었다.
우습게도, 인터넷 쇼핑으로 물건을 사도 우민이는 문제가 생겼다. 주문이 누락되거나 구매 후 품절이 되거나. 중고나라에서 산 물건은 모든 것들이 사기였다. 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결국 우민이가 말하면 내가 골라서 보여주고, 마음에 든다고 하면 내 아이디로 주문해야 했다. 조금 번거롭고 귀찮긴 하지만, 사기를 당하거나 같은 일을 서너 번 반복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우민이는 꽤 쓸 만한 일꾼이기도 했고.
나는 저녁에 먹을 생선과 야채들을 조금 사고 녀석이 말 한 아이스크림을 열 개 정도 샀다. 털레털레 호은당으로 돌아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응? 연환가?
전화기를 꺼내보니 친구 놈 이름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오, 이 놈. 오랜만인데?
“여. 안 뒤지고 살아 계셨습니까?”
-그래, 인마. 자식이, 형님한테 꼬박꼬박 안부 전화도 안 하고 말이야, 응?
오랜만에 연락이 온 친구는 반갑게 내 장난을 받아쳐 주었다. 대학시절 절친했던 녀석인데, 유일하게 서울에 있는 친구였다. 몇 년 전, 결혼한 이후로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평일엔 무조건 칼퇴, 주말엔 무조건 부인과 보내는 엄청난 애처가가 되었다. 그래. 그래야지. 결혼식 때 보니 부인이 엄청난 미인이었다. 무슨 쇼핑몰 하는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기억은 안 난다. 아무튼 친구 놈과 떠들면서 오다 보니 호은당에 도착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우민이의 입에 물려주고, 은미 씨에게도 하나 가져다준 뒤 주방으로 들어가 통화를 이어갔다.
“그래가꼬? 병원은 갔다 왔나?”
얼마 전에 출장을 다녀와서 크게 아팠다며 엄살을 떨었다. 내가 약방에서 일한다는 것을 친구들은 다 알기 때문에, 아무래도 약이 필요해서 그런가 싶었다.
-갔다 왔지. 그냥 물갈이 같은 거라데. 좀 지나면 낫는대서 한 사흘 입원해서 푹 쉬었지.
“자식. 꿀 빨았네.”
-야, 그건 그렇고 니는 장가 언제 가노?
“소개팅이라도 해 주고 그따위 소리해라, 이 양심 없는 유부남아.”
친구는 킬킬 웃었다. 이 자식. 지는 깨 볶고 잘 산다고 남의 가슴에 대못 박으면 쓰나. 내가 투덜거렸더니 녀석은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약속을 잡았다. 마침 내일이 쉬는 날이니 잘 됐다며 나는 저녁에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반가운 친구 녀석과 삼 년 만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은 안색도 별로 안 좋았지만 살이 꽤 많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런 인사는 생략하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야, 인마 이거, 장가가더니 얼굴이, 응? 아주 그냥 광난데이?”
“마. 부러우면 장가가라. 참한 아가씨 없나? 너거 그 약방 사장님, 아가씨라매? 좀 어떻게 해 봐라, 인마!”
“인마 이거, 사상이 위험한데? 제수씨 번호 어딧노! 내 당장에 다 꼬발라뿌야지! 어데 고용주하고 고용인을 그렇고 그런 사이로 엮을라 카노!”
“마! 새끼야! 마눌님한테 혼난다. 하지 마라이.”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며 우리는 맛깔나게 익은 돼지껍데기와 알싸한 소주로 회포를 풀었다.
고향 친구라서 일까. 우리는 만나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사투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정감 있는 대화였는데, 듣는 사람들은 아니었나. 싸우는 게 아닐까 수군거리며 돌아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야 할 것 같았다.
“야, 근데... 내 사실은 니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가 보자 했다.”
“내가 니보다는 마이 알지. 그래, 히야한테 여쭤봐라.”
“확, 씨. 느그 약방 말이다. 알아보니까 아무나 못 가는 약방이드만. 예약제로 운영하고 뭐 회원제로 운영하고 그란다메.”
뭔 소리여. 거기 직원인 나도 모르는 걸 니가 어디서 들었냐. 회원제는 무슨. 그냥 귀족 나부랭이들 기분 좋으라고 묶어 놓은 쓰레기 봉지지. 어쨌거나 네놈은 은미 씨의 진맥이 필요하다, 이거구만?
“아이다. 회원제 하는 거는... 거, 있다. 브이아피. 쩌어기 위에 잘나신 분들 특별 관리해주는 그런 거고. 일반인은 아무 때나 와도 된다. 요새는 더버가꼬 예약받는 기고. 땡볕에 기다리면 디다 아이가.”
“아, 맞나. 그랬나... 그면... 나도 예약 좀 해줄래? 니가 받나? 예약.”
허. 멀쩡해 보이는데 뭔 일이람. 일단 예약을 받는 건 내 일이니 알겠다고 했다. 지금은 스케줄을 확인할 수 없으니, 내일 확인해 보고 가장 빠른 날에 잡아 두겠다고 했더니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뭔데, 근데. 니 아픈 데는 없는 거 같은데.”
“너거 거기... 몸 아픈 거 말고 다른 거도 본다매.”
뭔 소문이 도대체 어떻게 돌길래 평범한 직장인인 이 친구 놈까지 이런 소릴 하는 거지? 나는 되물었다.
“아니, 잠만. 이써바라. 야, 니 우리 약방에 대해서 도대체 뭘 어떻게 알고 묻노? 우리 그냥 한약방이다.”
“마. 친구한테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나간다이? 다 들었다. 거, 브이아피 회원 중에 한 명이 우리 와이프 회사 투자자라가꼬... 와이프가 물어보고 얘기하드라. 근데 거 니 있는 게 딱 기억나데. 그래가 전화했지. 아무나 안 받는다는데... 니한테 부탁하면 혹시 될란가 해서...”
아. 또 저어기 웃전 분들이 은혜를 베푸셨네. 무슨 큰 인심 쓰는 것처럼 알려줘 놓고, 거기 아무나 못 가. 나 정도는 돼야지. 하면서 바람 빠지게 만드는 일을 참 즐기는 것 같다. 그래 놓고 뒤로 돈 받고 소개해 주고 그러지. 그러니 내가 귀족 나부랭이라고 싸잡아 욕하지. 꼬옥 한둘이 물 흐린다니까. 에이그.
“마, 그런 거 아이다. 예약만 하면 아무나 와도 된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온다아이가. 전화번호하고 주소 하고. 그 번호로 걸어서 예약하면 된다. 무슨... 약방이 무슨 금방이가? 웃기고 자빠졌네. 그래, 아무튼. 무슨 일인데?”
나는 소주 한 잔을 쭉 들이키고 물었다. 친구의 얼굴은 제법 어두웠다. 무슨 일이... 뭐 큰 일인가...? 녀석은 안주도 없이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비우더니 일어났다.
“조용한 데 가서 한잔 더 하자. 이모님, 저희 계산이요.”
사투리로 떠들던 놈이 갑자기 표준어로 말하니 우습기도 했고 오글거리기도 했지만, 나는 별 말없이 일어났다. 아, 돼지껍데기. 아깝다. 맛있는데... 다음에 은미 씨랑 연화랑 우민이 데리고 와야겠다. 여기도 잠재적 맛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