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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28.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1-살아가기만 하는 남자(E)>



 마트에서 속옷, 양말, 슬리퍼, 티셔츠와 반바지 등을 사고 덤으로 세일하는 반찬거리까지 사고 나오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아, 진짜. 깜짝 세일은 피할 수가 없다니까. 하지만 싸고 좋은 고기를 잔뜩 사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콩국수 먹으니까, 내일 불고기 해야지.

 카운터에 줄을 서고 나서야 그 남자가 생각났다. 아. 그렇지.

 혹시 그 남자도 이렇게 간단하게 사람들에게 잊혀진 걸까? 그렇게 강렬했던 첫 만남을 이렇게 쉽게 잊게 되다니. 정말 수명 말고는 남은 게 하나도 없구나.


 서둘러 호은당에 돌아왔을 때, 남자는 정말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은미 씨는 방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남자를 데리고 욕실로 갔다. 새 칫솔 하나를 뜯어 남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저기, 저 하얀색 바구니 안에 있는 목욕 용품들 써. 내거니까. 수건은 여기 있고, 로션은 네가 뭐 쓰는지 몰라서 안 샀어. 내 거 그냥 써도 돼. 저쪽 안쪽 선반에 있는 것들이 내 거다. 면도기도 있고... 어지간한 건 다 있으니까. 그리고 속옷이랑 옷, 지금 입고 있는 것들은 그냥 버려. 세탁한다고 깨끗해질 것 같지는 않네. 덩치가 나랑 비슷하니까 내 옷 같이 입으면 될 거 같고... 일단은 이거 입고 나와.”


 남자는 훌쩍훌쩍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 안쪽, 욕실의 문을 닫고 나온 나는 은미 씨를 찾아 안채로 들어갔다. 붉은 실로 묶인 그 책을 읽고 있던 은미 씨는 내가 들어오자 얼른 책을 덮었다.

 예예, 그래요. 그 부부한테 얼마 받았는지 확인하고 있었겠지. 신경 안 쓰니까 은미 씨도 신경 쓰지 마요. 그건 그렇고, 저 꼬맹이는 어쩝니까?


 “쟤는 어떡하려고요?”


 “어쩌긴요. 호은당 대문 밖만 나서도 앞으로 고꾸라져 뒤통수가 깨 질 앤데. 정우 씨 조수 생겼다고 생각하시고 알뜰살뜰 부려먹으세요.”


 뭐? 데리고 산다고? 쟤를? 아니, 은미 씨. 이봐요, 사장님. 여기 사장님 집이라고요. 사장님 여자거든요? 나 같은 노비가 있어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데, 쟤까지 들이면 어쩌자고요? 저 놈이 나쁜 마음 품으면? 그리고 쟤가 잘 방은 또 어디 있는데요? 와, 진짜. 안됩니다. 위험해요.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뭔 남자를 자꾸 들여?


 “걱정 마세요. 그런 일 없게 정우 씨가 잘 가르치면 되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보였나. 은미 씨는 킬킬 웃었다. 와. 진짜 대책 안 서는 사람이다. 정말... 전에는 뜸이라도 들이고 폭탄선언했는데, 요즘은 뜸 들이고 뭐고 없네. 그냥 앞뒤로 후려갈기는구나. 삼청동 핵주먹이야. 와. 대단하다.

 어이가 없어 웃는 날 보고 은미 씨는 노비의 노비가 생겼네요. 하고 웃었다. 아니, 내가 그래서 웃은 거 아니잖아요. 아오, 골치야.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입은 늘어나고. 돈 쓸 일만 많아지고. 연화는 요즘 손님도 안 보내주고 뭐 하는 거야? 좀 크은 거 하나 물어다 주지.


 어느덧 저녁때가 됐다.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서는데, 꼬질꼬질했던 남자가 멀끔해져서 나왔다. 와. 역시 금수저는 겉이 잘 빠져야 하는구나. 얘도 잘생겼네. 인기 많았겠다.


 “저... 감사합니다.”


 “박정우. 내 이름이야.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아, 네. 형... 저는 최우민이라고 해요.”


 나는 응, 그래. 하고 대꾸해주고 손에 든 지저분한 옷가지들을 챙겨 쓰레기 봉지에 넣었다.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왜, 이거 명품이냐?


 “안에 들어가 봐. 약사님이 할 이야기 있다고 하시더라. 예의 바르게 잘해라. 응?”


 나는 조금 전에 날뛰던 그 모습이 떠올라 괜히 눈에 힘을 주었다. 우민이는 한껏 쪼그라든 어깨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큰 냄비에 물을 가득 받았다. 이따 연화도 올 거고... 쟤도 먹는 양이 장난 아니던데... 나는 소면 봉지를 뜯었다. 겉면에 12인분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린 네 명이다. 하지만 그중 두 명은 혼자서 3인분 먹는 사람들이다. 지금 안채로 들어간 쟤도... 내 기억이 맞다면 축구하는 애라고 했는데... 쟤는 혼자 5인분도 먹겠지. 다 삶자. 내 몫이 있긴 할까.


 “내가 사람을 키우는지 짐승을 키우는지. 어휴.”


 오이 두 개를 꺼내 깨끗이 씻고 곱게 채를 썰었다. 준비하는 양만 보면, 열 명은 먹을 양인데. 이게 4인분입니다, 여러분. 하하하하하. 끔찍해라.




 한 시간쯤 지났나. 면을 삶아 헹궈 커다란 놋그릇에 각각 담은 채 시간만 지났다. 연화는 지친 얼굴로 들어왔고, 그즈음 은미 씨와 우민이가 방에서 나왔다. 우민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빠, 나 굶어 죽을 것 같아.”


 연화의 말에 우민이는 움찔했다. 나는 또 헐벗은 차림새로 들어온 연화를 안채로 밀어 넣으며 옷 갈아입고 오라고 빽 소리쳤다. 연화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순순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사랑채에 에어컨을 단 기념으로, 우리는 작은 사랑방에 둘러앉았다. 시원하게 살얼음이 낀 콩물을 붓고 있는데 우민이가 들어왔다.


 “형, 거들게요.”


 “아서라. 들고 가다가 엎을라.”


 “약사님이 여기서는 괜찮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저도 밥값은 해야죠.”


 딴 사람 같네? 은미 씨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처음 봤을 때보다는 밝아 보이니 잘됐다.

 사랑채에 가는 동안 정말 넘어지지 않을까 엄청 불안했지만, 우민이는 무사히 서빙을 마쳤다. 나는 넉넉히 삶은 면을 채반에 받쳐 가져 갔다. 마음껏 드세요.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미 씨와 연화는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나는 아직 세 젓가락도 못 먹었는데.

 우민이도 만만찮았다. 내가 은미 씨와 연화의 그릇에 면을 더 덜어주고 손을 닦는데, 우민이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이고, 이놈아. 먹는 걸로 눈치 보는 거 아니다. 나는 얼른 면을 가득 덜어 그릇에 담아 주고, 콩물도 넉넉히 부어 주었다.


 “설탕 넣으면 맛있지만 소금만 넣어도 맛있어. 경상도에서는 소금만 넣어 먹어.”


 우민이는 잠시 고민하다 소금을 조금 떠 섞었다. 연화도 눈치를 살피다 소금을 넣었다. 은미 씨는 꿋꿋이 설탕만 넣었다.


 “소금을 넣으면 콩물 본연의 단 맛이 살아나서 훨씬 고소하고 부드러워. 땀을 많이 흘리거나 많이 피곤할 때는 단 것도 좋지만, 염분을 보충해 줘야 빨리 회복되고.”


 그렇게 설명하면서 댁은 왜 설탕만 넣는데요? 괜히 심술이 나서 소금을 툭 넣어줬다. 은미 씨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릇을 빤히 노려보다 그냥 후룩후룩 먹었다. 연화가 깔깔 웃었다.


 “좋다는 거 알면서 안 먹으니까 아빠가 화내잖아. 단 것만 먹지 말고 좋은 거 알면 잘 좀 챙겨 먹어.”


 그래. 좀 드세요. 좋은 거 알면서 꼭 입에 단 것만 찾는다. 가끔 고삼차 마시는 것 말고는 주로 시럽 엄청 넣은 커피만 마시고 군것질을 얼마나 달고 사는지. 손님들한테는 좋다고 좋은 거 먹으라고 권하고 설명도 잘해 주면서 정작 자기는 입에 단 불량식품만 좋아한다. 내가 일부러 챙겨주지 않으면 내내 과자만 먹고살 것 같은 사람이다.

 연화는 우민이가 있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우민이는 갑작스러운 연화의 등장에 의아해했지만, 은미 씨도 연화도 소개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우민이는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콩국수 세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대단하다. 너, 분위기 더 좋았으면 다섯 그릇도 가뿐히 먹었겠다. 아무래도 식비가 크게 늘어날 것 같았다. 내 월급, 깎이는 건 아니겠지?


 저녁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겠다며 우민이가 나서 준 덕분에 나는 편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사이 의상점 사장님이 왔다. 나와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훨씬 더 세련되고 서양식 의복 같은 한복을 들고 왔다. 아니, 사장님. 저도 이런 걸로 주시지. 서운하게.

 설거지를 끝낸 우민이가 차 한 모금을 마시기 무섭게 사장님의 손에 이끌려 사랑채로 들어갔다. 우민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일곱 벌의 옷을 입고 벗길 반복 했다. 역시. 몸이 좋으니 어떤 옷이든 예쁘구나. 부럽다, 저 젊음이. 의상점 사장님도 옷이 제 주인을 찾았다며 아주 기뻐했다. 와. 나 때랑 리액션이 다르잖아? 섭섭한데. 하지만 뭐... 잘 어울렸다. 예쁘네. 괜찮네. 우민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은미 씨는 이거 다 빚으로 달아 둘 거라며 톡 쏘아붙였다. 지은 죄가 있어서일까. 우민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의상점 사장님이 가지고 온 일곱 벌의 옷은 내 옷장에 같이 걸렸다. 당연하게도 우민이와 나는 한 방을 쓰게 됐다. 이 자식, 월세 반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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