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1-살아가기만 하는 남자(2)>
“다 알고 계시는군요. 다 알고... 제가 이렇게 될 걸 알고...”
남자는 당당하게 말하는 은미 씨를 노려보다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이내 그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죽지도 못 하고 살아 있는데! 살아도 사는 게 아닌데!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었어?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였어? 완전 미친년이잖아!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네가 뭔데 날 이 꼴로 만들어!”
나는 얼른 일어나 그를 잡았다. 비쩍 말라 보였지만 힘은 아주 셌다. 내가 조금이라도 힘을 뺐다간 은미 씨를 때릴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힘과 엄청난 분노를 뿜어내는 그의 앞에서 은미 씨는 그저 고고하게 웃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듯, 고래고래 소리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다 죽었어! 키우던 개까지 죽었다고! 우리 집은 완전히 망했어! 십 원 한 푼 남은 거 없다고! 당신 때문에 우리 가족이 다 죽고 회사도 박살 나고! 나는 출처도 모르는 빚이 산더미 같이 생겼다고! 며칠을 굶었는지 몰라! 자살이라도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살아! 죽지도 못하고 거지가 돼서 이러고 있다고! 당신 때문에! 너 때문에! 이 미친 여자야!”
“이, 이봐요. 진정하고...!”
“진정하게 생겼어?! 저 년 때문에 우리 가족이 다 죽었는데! 부모님 다 죽고 회사도 박살 났다고! 세상에 나 혼자! 빈 몸으로! 알거지가 돼서 남겨졌다고!”
도대체 뭔 소리야, 이게? 나는 남자를 꽉 안고 은미 씨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은미 씨는 고고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고 소리를 지르던 남자는 결국 목이 쉬었다. 나중엔 바닥에 엎어져 엉엉 울었다.
“말 다 했습니까? 속에 든 화는 다 풀었습니까?”
“... 뭐? 화를 풀어? 니가 한 짓이 무슨 짓인지는 아는 거야?!”
남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내가 잡을 틈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은미 씨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미친놈이!”
야 이 미친놈아! 대낮에 살인이야! 이 또라이 새끼가!
나는 얼른 남자의 다리를 걸어 패대기치고 은미 씨를 살폈다. 넘어지긴 했지만 은미 씨는 괜찮았다. 칼! 칼! 하며 내가 소리치자 은미 씨는 씩 웃으며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바닥에 과도 하나가 깊게 박혀 있었다. 소름이 돋아나 비명을 질렀다.
“이 또라이 새끼야! 너 무슨 짓 하려고 한 건지 알아?! 개새끼야! 콩밥 뒤지게 처먹게 해 주마!”
얼른 전화기를 꺼내 경찰을 부르려는데 은미 씨가 말렸다. 아니, 왜요? 은미 씨 죽이려고 했는데! 은미 씨는 바닥에 널브러져 울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자, 이제 내가 말할 차례니까 넌 아가리 닥치고 자알 들어. 알겠지? 네 천명은 지난주 네 생일에 끝날 운명이었어. 넌 그 생일상도 받기 전에 뒤질 운명이었다고. 만 열아홉이 되기 전날 뒤질 팔자였단 말이야, 이 꼬마야. 그걸 안 네 부모님이 나랑 이 형아를 미친 듯이 괴롭혔고, 나는 결국 네 부모님에게 널 살리는 방법이 있다는 걸 가르쳐줬어. 그게 내가 한 전부야. 그 뒤는 어떻게 됐냐고? 네 부모님은 북두성군과 남두성군을 만났겠지. 그리고 그분들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겠지. 그래서 네 팔자를 바꾼 거야. 네 명줄을 길게 늘려 주었다고, 내가 아니라 네 부모님이. 이 멍청한 인간아. 네 복은 어차피 열아홉 번째 생일 이후로 없어. 그때 죽을 사람이니 그 이후에도 네게 갈 복은 없지. 너는 네가 누리던 모든 것들을 잃었을 뿐이야. 네 부모님이 남겨주신 거라곤 네 목숨을 늘리는 것뿐이었으니까. 알겠니? 이 어리석은 인간아. 천명이야, 천명. 하늘이 정해놓은 목숨. 인간은 천명대로 살아야 해. 그걸 바꾸었으니 네 팔자라고 정상적이겠어? 내 탓이 아니야. 널 살리고자 했던 네 부모님의 욕심일 뿐이니까. 천명을 거스르려고 한 네 부모님이 만든 거라고. 기껏 도와줬더니 이따위 대접이라니. 이래서 난 인간이 싫어.”
이게 뭔 소리여...? 그럼, 저번에 왔던 그... 아들 살려달라고 했던 그 사람들의 아들? 그럼 성공한 거라고?! 진짜 신을 만난 거라고?! 미친. 진짜였어?!
“열아홉이 되면 천명이 끊어지니, 너와 이어져 있던 모든 것들이 끊어졌지. 부모 복도, 먹을 복도, 배울 복도, 돈 복도. 하다 못해 길을 가다 넘어져서 다치지 않을 복까지. 네가 누릴 수 있었던 그 모든 복은 열아홉에 끝이라고. 남은 건 억지로 늘려 놓은 수명뿐인 거야. 아무리 아프고 다쳐도, 절대 죽지 못하는. 운이라고는 개미새끼 눈곱만큼도 없는. 자살이든 사고사든, 죽을 운도 없는 인생. 널 그렇게 만든 건 네 부모님이라고. 네 부모라는 인간들은, 널 살리려고 자기들 목숨을 버린 거야. 이 멍청한 것아.”
좀... 잔인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웃으면서 하냐. 그럼 끽해야 이제 스무 살인 어린 애란 소린데... 부모님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한테 너무하는 거 아닌가. 나는 남자를 일으키고 몸에 묻은 풀잎과 흙을 털었다. 남자는 쉬어버린 목으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쯧... 여기까지 오면서 어디 안 부러지고 피 안 보고 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거다. 인간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어. 자신의 마음이 애정인지 욕심인지 구분도 못 하고. 이기적이야.”
지는 인간 아닌가. 흥. 괜히 심술이 났다. 어린애한테 너무 냉정하고 야박했다. 조금 전에만 해도 배부르게 먹이라더니. 나는 남자를 의자에 앉혔다. 쉰 소리만 나오는 울음을 그치게 하고 싶었지만, 이렇게라도 실컷 울어야 할 것 같아서 앙상한 어깨를 손으로 꼭 잡아 주었다.
잠시 뒤, 조금 진정이 됐는지 남자는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미수 혐의에 대해 사과했다. 냉큼 무릎을 꿇고 죄송하다고 조아리는 것을 보니, 귀족 나부랭이 집안 자식 치고는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 같았다. 무릎 꿇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그때의 그 부부가 떠올랐다. 그 부모의 그 자식인가. 아니면 귀족 나부랭이 인간들은 다 저런가. 한바탕 때려 엎고 나서야 자신을 낮출 줄 알게 되는 걸까. 나는 보리차를 한 잔 더 내주었다.
“어쨌거나... 너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든 팔자가 됐어. 그건 인정하지?”
끄덕끄덕.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미 씨는 팔짱을 끼고 앉아 한숨을 쉬었다.
잠깐 풀어놓았던 이야기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혼자 지낸 날은 고작 열흘이었지만, 십 년 치 고생을 몰아서 한 것 같았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부랴부랴 병원에 달려가다가 오토바이에 치이고, 부모님 상을 치르기도 전에 회사 간부가 기밀을 싹 빼들고 경쟁사로 튀어 버렸다.
거기다 함께 회사를 꾸려가던 삼촌이라는 작자는 없던 유언장까지 만들어 전 재산을 깡그리 가로챘고, 아들인 이 남자에게 남겨진 것은 수십억에 달하는 빚이었다. 다행히 보험금이 나왔지만, 보험금에 집과 차를 비롯한 모든 사유재산이 차압됐고, 모조리 빚쟁이들이 가지고 가 버렸단다. 자기 명의로 있던 번화가의 작은 빌딩 역시 빼앗겨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고 했다.
회사를 담당하던 변호사는 남은 채무라도 놓게 하려고 유산 포기각서를 쓰라고 했고, 그것으로 모든 빚이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숨겨둔 부모님의 재산이 더 있었던 것이다. 그 재산은 고스란히 삼촌과 변호사가 챙기고 빚만 남겨 두었단다. 이 남자의 집은 그렇게 폭삭 주저앉았다.
우여곡절 끝에 상을 치르고 집에 왔더니, 집에는 도둑이 들어서 기르던 개 두 마리도 죽여 놓았고, 애지중지 기르던 비싼 물고기도 훔쳐갔다고 했다. 집에 남은 모든 가구와 세간에는 빨간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쳐들어온 빚쟁이들을 피해 맨몸으로 도망쳤다.
그 와중에 휴대폰도 지갑도 잃어버리고, 주머니에 삼백 원이 전부였다고. 사탕이라도 먹으려고 편의점에 갔는데, 포장을 까자마자 하수구에 빠트렸단다. 남은 거라곤 어머니의 지갑에 남아있었던 호은당 명함 한 장뿐이었다.
그걸 보고 길을 찾고 물어물어 오다가 자괴감이 들어서 한강에 뛰어들려고도 했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이 말려서 실패하고, 깨진 거울 조각을 주워 손목을 그으려고 하는데 청소부가 와서 위험하다며 유리조각을 빼앗아 갔다고 한다. 높은 빌딩에 올라가 뛰어내리려고 했지만 빌딩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고, 우연히 외진 곳에서 발견한 허름한 오층 빌라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마침 나오던 주민이 그를 수상하게 여겨 경찰을 부르는 바람에 또 실패했다고 한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배고프고 목이 말라 난생처음 도둑질을 했다가 걸려서 흠씬 두들겨 맞고, 공원에서 신문지라도 덮고 자려고 해도 노숙자들이 달려와 내쫓았다고 한다.
고작 열흘, 그 열흘이 지옥 같았던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정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였더라면 살아낼 수 있었을까.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어린 나이에 이게 무슨 일이람. 나는 남자의 어깨를 살살 도닥였다. 또 훌쩍훌쩍.
아직은 부모님의 손이 필요한 나이인데. 아직 사회에 나오기에도 미숙한 나이인데. 더 빨리 사회에 나올 수는 있겠지만, 복이란 복은 다 떨어져 나간, 그저 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불쌍한 남자가 무엇을 했을까. 돈을 벌려고 해도 못 벌었을 거다.
“그래서 네가 날 못 죽인 거야. 넌 사람 하나 죽일 운조차도 없는 거지. 너는 숨 쉬며 사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남자는 또 엉엉 울었다. 아, 거 참. 그만 좀 하지. 불쌍한 애한테 왜 자꾸 그래요? 내가 눈치를 주었지만 은미 씨는 고개를 팩 돌릴 뿐이었다. 그때 그 부부한테 돈 많이 받아놓고는. 야박하긴.
그나저나... 얘를 어쩐다. 성인이라 시설 같은 곳에도 못 가고. 이렇게 복이 지지리도 없는데 밖에서 혼자 살 수도 없고. 참 난감하네.
“일단... 의상점 사장님 불렀으니까 옷부터 새로 사고. 정우 씨, 죄송한데 얘 속옷이랑 뭐 그런 소소한 거 있죠? 그런 것 좀 사다 주실 수 있을까요? 비용은 법카로.”
아. 더운데... 은미 씨는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냈다. 암요, 냉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키를 받았다. 주방에 들어가 법인카드를 챙기고 나와 남자의 손을 꽉 잡았다.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알았지? 잠깐 나갔다 오는 사이에 우리 은미 씨나 여기 호은당에서 사고 치면... 너 진짜 죽을 때까지 괴롭혀 줄 거야. 그 열흘 치 고생들, 여기서 매일매일 겪게 해 준다. 알겠냐?”
나는 괜히 인상을 팍 쓰고 겁을 주었다. 의외로 순순히 먹히는 듯했다. 열흘 동안 엄청나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고개를 파닥파닥 끄덕였다. 나는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좋아. 여기, 씨씨티비 다 있다. 꼼짝 말고 여기 앉아 있어. 알겠냐? 갔다 와서 확인할 거야. 그리고... 사이즈, 얼마냐?”
은미 씨는 하품을 길게 하고는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래. 문이라도 잠그고 있어요. 나는 남자에게 협박에 가까운 당부를 하고 얼른 차에 올랐다. 은미 씨에게 후다닥 코톡을 보내 문 꼭 잠그고 있으라고 했다. 은미 씨는 잠자는 토끼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아, 진짜... 난 불안해서 죽을 맛인데. 나는 얼른 가장 가까운 대형마트로 향했다. 제발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