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5-고향 가는 길(3)>
“그, 어... 저기... 어디로 내려? 요...? 집이 어디... 아, 진짜. 내가 귀신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휴게소 좀 갑시다. 화장실이 급해서.”
대구는 가까워졌고, 공포와 함께 때려 부은 녹차 한 병과 아까 원샷 한 에너지 음료 두 개 분의 물이 내 몸에서 나가기 위해 발광을 하고 있었다. 무서우니 더 지리겠다.
뒤에 귀신이 있다! 뒷좌석에 귀신이 있어!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그 존재에 대한 공포 덕분에 나는 정말 완벽하게 안전한 운전을 한 것 같았다. 귀신 보고 오줌 싸는 사람들이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진짜 아니다. 싼다. 똥도 쌀 것 같다. 정말 무서우면, 지린다. 그게 정상이야.
나는 가장 가까운 휴게소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면서도 귀신에게 할 말은 다 했다.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나오지 마. 요. 돌아다니다가 엉뚱한 사람 쫒아가서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 내,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후다닥 차 문을 닫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 편의점에 들어가서 한참을 고민했다. 으음. 일단 여자였는데. 커피는 아까 줬고... 여자들은 이런 거 좋아하나? 은미 씨나 연화는 이런 거 안 먹으니까 잘 모르겠다. 아니, 근데 이런 거 사 줘야 하나? 에이, 모르겠다. 사 주면 얌전히 있을지 또 모르지.
“저기요, 혹시 이런 거 좋아하십니까? 제가 취향을 잘 몰라서요.”
내 질문에 졸음 가득한 얼굴로 서 있던 캐셔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가 들고 있는 자몽 어쩌고 하는 음료수와 내 얼굴을 몇 번 번갈아보던 그녀가 생긋 웃었다.
“어... 저는 개인적으로 레몬 맛을 좋아해요. 복숭아 맛도 맛있다고 하는데... 저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아. 그렇구나. 근데 귀신도 알레르기 있나? 뭐, 상관없나? 아니지, 혹시 자기가 못 먹는 거 사 왔다고 난동 부리면 곤란하다. 나는 결국 세 가지 맛을 모두 사기로 했다.
“저기...”
캐셔 아가씨는 하얀 봉지에 음료수들을 하나씩 담았다. 마지막으로 레몬 맛 음료수를 손에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가야 되는데. 귀신이 기다리고 있다고요! 나는 얼른 음료수를 낚아채 봉지에 담고 후다닥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수고하세요!”
어째 뒤통수가 또 간질간질한데. 또 귀신이 따라붙은 건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차로 돌아온 나는 이번엔 용기를 내어 뒷문을 열었다. 다행히 뒤엔 아무도 없었다. 약이 든 가방 두 개만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약이 든 가방을 잘 추슬러 발치에 놓고, 좌석 가운데 있는 팔걸이를 내려 음료수를 하나씩 꽂았다. 이거, 설마 따 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까 커피도 안 따줘서 안 먹었나? 멀쩡한 캔 커피가 의자 위에 그냥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복숭아 맛 음료수와 레몬 맛 음료수를 땄다. 음료수 홀더에 하나씩 꽂아 넣고, 자몽 맛과 캔 커피는 팔걸이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그, 저... 뭐, 무슨 맛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복숭아 알레르기 있을지도 모르고. 뭐, 암튼 그래서 이거 사 왔어. 요. 점원이 레몬 맛도 괜찮다 하더라고. 요. 입맛대로 먹고. 요. 한 삼십 분 하면 대구 도착하니까... 일단은 갑시다.”
나 지금 뭐 하는 거냐. 하... 텅 빈 차에 대고 혼자 중얼중얼 거리는 이 꼴이, 귀신 마시라고 음료수를 사다 바치는 내 꼴이,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지난 8개월, 내 몸에 베인 노비 근성 탓이다. 그놈의 노비 근성은 이제 본능 같았다. 그리고 뭐... 귀신이든 뭐든, 일단 하기로 했으니 제대로 해야지. 다시 운전석에 올라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목적지까지 안내를 시작합니다. 잠시 후, 직진입니다]
“악!! 시발! 악! 놀래라!!”
내비게이션 설정을 한 적도 없는데! 시동이 켜지기 무섭게 내비게이션 누나가 말을 했다! 아, 시발! 사람 놀라게 하지 말라고오!!
내비게이션은 친절하게도 대구시의 어딘가로 나를 안내했다. 분명히 저 귀신이 한 짓일 거야. 부디 곱게 집에 데려다주고 가자. 제발. 제바아알!! 빨간 저 줄, 설마 저승 가는 길은 아니겠지...?
조용한 차 안, 나는 한껏 긴장한 어깨를 늘어뜨리지도 못 하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대구를 향해 달렸다. 나들목을 통과하고 우회전, 좌회전, 직진. 이리저리 열심히 달렸다. 대구에 들어와서도 삼십 분을 넘게 돌아다닌 것 같다. 여기가 어디야?
나는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어느 단층 주택 앞에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내비게이션 누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순간, 안내를 종료합니다.라는 그 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세상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나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도착, 했어요. 잘 가요.”
차 안은 조용했다. 내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차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탈 때도 알아서 탔으니까 내릴 때도 알아서 내렸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룸밀러를 움직여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살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텅 비어... 응? 안 비어있는데?! 저건 또 뭐야아아악!! 뒷좌석 가운데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까는 없었는데!
아! 소름, 소름, 소오름!!!
뭐, 기름 값인가? 나는 목을 쭉 빼 뒤를 보았지만 잘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내려서 뒷좌석 문을 열었다. 반짝이는 것은, 작은 초록색 보석이 박힌 깃털 모양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뒤쪽에 D.Y라는 이니셜이 찍혀 있는 평범한 목걸이였다. 이거... 뭐지? 그 여자 귀신 건가...? 나더러 가지라는 건 아닌 것 같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연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벌써 새벽 2시인데, 자고 있으려나?
-아빠. 잘 데려다줬어?
아, 안 잤구나. 다행이다. 나는 휴게소에서 있었던 일부터 음료수를 사 준 일, 내비게이션이 혼자 안내를 시작한 일까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은미 씨와 우민이가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목걸이가 있어.”
-응. 집에 데려다줘야지. 집까지 보내 줘.
뭔 소리야! 또! 소름 돋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다시 홱 던졌다. 의자 위에 톡 떨어진 목걸이는 실내등 불빛 아래에서 노랗게 빛났다. 이게, 그러니까... 귀신? 이게? 그 귀신이라고? 내가 이 목걸이를 갖다 주려고 이 시간에 그 쇼를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새벽 두 시에 무슨... 그냥 여기 집 문 앞에 걸어두면 안 되냐?”
-아빠가 데려다준다고 했다면서? 할 거면 끝까지 해. 책임 못 질 거면 애초에 시작도 하면 안 되는 거야.
연화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하... 진짜. 이 새벽에 초인종을 누르라고? 미친 거 아니야? 초인종 눌러서 뭐라고 하는데? 따님 모셔왔습니다, 그래? 목걸이 배달이요! 그래? 경찰 안 부르면 다행이다. 하. 진짜 난감한데... 근데 이거, 왠지 안 주면 진짜 큰일 날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하다. 무섭다. 무서워!!
그래. 귀신이 무섭지 사람이 무섭냐. 차라리 미친놈 소리 듣고 한 대 맞고 말지. 귀신 태우고 다니는 것보다 백만 배는 낫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대문 앞에 섰다. 시커먼 철제 대문 앞에서 나는 고민하다 초인종을 눌렀다. 삐로리롱. 하지만 반응은 없었다. 다시 한번. 삐로리롱. 두 번째 벨이 울리고 철컥하며 인터폰을 켜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새벽에 무슨... 누군교!!
“어, 저기... 죄송합니다. 설명하기 좀 곤란한 일이긴 한데... 잠시만 나와 주실 수 있을까요?”
-추석 앞두고 술 째리가 실수하는 거면 이해하니까, 갈 길 가소.
“그게 아니라요! 제가 오는 길에 누굴 태우고 왔는데, 그게 귀신인데, 그... 목걸이가 있어서...
-귀이시인? 미친놈 아이가! 니 음주운전이제? 거 딱 있어라! 마, 시발. 경찰하고 같이 보자! 내 지금 나간다! 이 쉰 새벽에...!
그러고는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누군가가 계단을 다다닥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이 벌컥 열리고 러닝셔츠 차림의 반대머리 아저씨가 씩씩거리며 나왔다. 나는 꾸벅 인사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일단 본론부터 말씀드리면, 서울에서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웬 여자분을 태웠습니다.”
“뭔 헛소리고?! 오밤중에 술 처묵고 운전했제? 경찰 부르라 캤으이 얼마 나오나 함 불어보자!”
아저씨는 내 말은 전혀 듣지도 않고 우악스럽게 내 손목을 잡았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 아프다.
“예, 예. 경찰 와도 괜찮으니까. 일단 이거 좀 받으세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내밀었다. 아저씨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그것을 받았다.
“이기 뭐꼬? 이기, 마! 젊은 놈이 할 짓이 그래 없나! 이 새벽에 뭔 미친 짓거리고!”
“그... 일단 제 말 좀 들어 보실래요? 경찰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거고, 저도 나쁜 뜻으로 한 게 아니니까 일단 들어나 주세요. 다 듣고 난 다음에 때리든지 말든지 하시고요. 저도 이 나이 먹고 할 일 없어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나는 씩씩거리는 아저씨의 손아귀에 붙들린 내 손을 힘껏 빼냈다. 아오, 아파라.
뒤이어 뭡니꺼, 하며 아주머니 한 분과 키 큰 청년이 나왔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인상을 잔뜩 쓰고 위협적인 몸짓을 하며 앞에 섰다.
“이누마 이기 이런 거 들고 와서는, 서울서 여자를 태우고 왔다 안 카나! 귀신이 어쩌고 캐삿는데, 인마 이거 또라이 아이가!”
“보입시더.”
아저씨는 목걸이를 아주머니에게 던지듯 건네고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건가. 나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안 맞은 게 어디야. 쌍 욕 안 들었으니 됐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도 믿어지지 않지만, 서울에서 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서 잠깐 눈을 붙이는데... 앞머리 이렇게, 이렇게 하고, 머리가 이 정도 오는 아가씨가... 금색 동그란 안경을 끼고, 한쪽 볼에 보조개 있는 여자였는데...”
“자, 잠깐만. 새끼야, 니 지금 똑바로 말해라이.”
“거, 댁이 나보다 어릴 것 같은데 욕이나 반말은 하지 맙시다.”
“니는 뒤로 빠지라.”
아들로 보이는 남자가 당장이라도 칠 기세로 달려들자 아저씨는 그를 밀어내고 내 앞에 섰다. 아주머니는 희미한 불빛에 목걸이를 이리저리 비춰 보고 있었다.
“계속 말해 보소.”
아저씨의 말투가 조금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버럭버럭 욕설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던 사람이 갑자기 나직한 목소리로 존대했다. 나는 재킷 자락을 매만지며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진지한 얼굴로, 절대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한껏 드러냈다.
“예. 아무튼, 십 년 만에 고향에 가야 하는데, 차가 고장이 나서 꼼짝도 못 하고 있고... 보험사에서도 지금은 못 온다면서, 곤란하다고 가는 길에 좀 데려다 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성주로 가는 길입니다. 대구라 길래 어차피 가는 방향이니까 하고 태웠는데... 그게 귀신이었습니다. 저 술 안 마셨고 제정신입니다. 아니지, 제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게 더 신기합니다. 아무튼 오기 전에 마지막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나니 내비게이션이 저절로 이 집을 가리켰습니다. 블랙박스든 내비게이션이든 직접 확인해 보셔도 되고요. 거, 내가 뭐 혼잣말도 하고 그러긴 했지만, 못 믿겠으면 확인하시고... 아무튼 올 때까지 분명히 뒤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방금 보니 저 목걸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저걸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초인종을 누른 겁니다. 그 점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냥 갈 수가 없었습니다.”
“보, 보소! 찬이 아빠! 이거 연이 거 아인교?! 당신이 전에 연이 취직하고 사 준 그거!”
아주머니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목걸이를 들이밀며 남편의 등을 퍽퍽 때렸다. 아저씨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목걸이를 받아 들고 살폈다. 눈을 찡그려가며 이리저리 살피고, 뒤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던 아들까지 확인한 뒤에야 그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내, 내가... 내가 고마운 사람을 몰라보고... 진짜로 미안합니다! 이, 일단 들어 오이소! 어여! 드가가 커피 물 올리라! 머하노! 찬이 니는 가가 불 키고! 퍼뜩 움직이라!”
일단... 내 말을 믿기는 믿는구나. 나는 반대머리 아저씨 손에 질질 끌려 집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아니, 나도 집에 가야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