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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Dec 02.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5-고향 가는 길(E)>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가정집의 거실에 어쩌다 보니 자리를 잡았다. 소파에 멀뚱히 앉아 있는데 아주머니가 뜨거운 믹스 커피 한 잔을 타다 주셨다. 오, 믹스 커피! 단 거!

 나는 꾸벅 인사하고 커피를 받았다. 여전히 아들로 보이는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아저씨는 안방에서 한참을 부산스럽게 무언가를 마구 뒤지고 있었다. 얼마 뒤, 아저씨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와 내밀었다. 환하게 웃는 예쁜 아가씨 다섯 명이 찍힌 사진이었다. 나는 한눈에 그 여자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아저씨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사진 속 아가씨 한 사람을 짚었다. 아저씨도 확인이 하고 싶었던 거겠지.


 “이 분이네요. 이 아가씨였는데... 나이는 좀 더 들어 보였고, 금색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앞머리도 내리고 있었고요.”


 나는 그녀의 생김새와 차림새를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꿈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놀라게 했던 그 끔찍 모습 말고, 꿈에서 보았던 말끔하고 단정했던 그 모습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연아아!!”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고, 아저씨는 훌쩍이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고맙십니더. 참말로 고맙십니더. 우리는 갸가 아직까증 못 오고 있는 줄도 몰랐십니더. 델다 줘서 고맙십니다.”


 “아부지! 점마가 구라 치는 건지 우째 알고요! 시발, 막말로 어디서 주워가꼬 사기 치는 거면 우얄건데예!”


 그래. 의심하는 건 이해한다. 나조차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니까. 근데 난 정말로, 진짜 무서워 뒤질 뻔했거든? 의심하는 너도 이해는 하거든? 근데 이 새끼야. 아무리 봐도 나보다는 어리겠는데 초면에 욕에 반말은 좀 아니지 않냐? 확, 씨.


 “마! 니는 지금 이게 구라 같나! 니 큰 누나 데리고 온 은인한테 싸가지 없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지 말고! 잡소리 할 거면 방에나 드가!”


 남자는 씩씩 거리며 방으로 가 버렸고, 아주머니는 사진과 목걸이를 꼭 끌어안은 채 엉엉 울었다. 아저씨는 벌게진 눈으로 내 손을 연신 쓰다듬었다. 어... 이런 결말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좀... 그렇다. 이 새벽에 무슨 난리야.


 내 차를 타고 온 여자는 이 집의 장녀라고 했다. 10년쯤 전, 서울에 취직한 뒤 맞는 첫 명절이라고 고향으로 오던 길에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 후 그녀의 부모는 채 피지 못한 가여운 딸을 가슴에 묻었다. 꿈을 가지고 있었고, 꿈을 꾸었을 그때의 그녀는, 어쩌면 처음 서울에 자리를 잡던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처음으로 고향에 내려오는 오늘의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그... 저, 그럼... 저는 할 일 다 했으니 가보겠습니다. 저도 고향에 가는 중이었고...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셔서요.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그럼... 추석 잘 보내세요.”


 나는 결국 명함까지 꺼내 줘야 했다. 보답이니 사례니 하며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아주머니는 펑펑 울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우리 도연이, 사고 나서 머리를 크게 다쳐서... 얼굴이 엉망이었는데... 혹시 막 흉측한 얼굴로 댕기지는 않습디꺼?”


 아주머니는 꺽꺽 넘어가는 목소리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주름 가득한 아주머니의 얼굴을 적신 눈물바다를 바라보다 빙긋 웃었다.


 “아니요. 아주 예뻤습니다. 단아하고 귀엽고... 웃는 게 참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를 많이 닮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연아...”




 새벽의 소란을 뒤로하고, 나는 차에 올랐다. 반대머리 아저씨는 울면서 웃었다. 아저씨 내외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새벽의 골목길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내비게이션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고, 뒷좌석에서 느껴지던 찜찜하던 기운은 없었다. 대로변으로 나와 차를 잠시 세우고, 한숨 돌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은미 씨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전화기를 귀에 댔다.


 “예, 미션 완료입니다.”


 -수고하셨어요. 정말 잘하셨어요.


 “잘한 일, 맞겠죠? 좀 뿌듯해해도 됩니까?”


 -아주 많이요. 자랑스러워하셔도 돼요. 이제 집으로 가셔야죠?


 “네. 이제 가야죠. 다녀올게요.”


 -네. 운전 조심하고... 잘 다녀오세요.


 전화를 끊고 나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마음이 간질거리고 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무시무시했던 미션을 끝내고 나니 홀가분하기도 했고. 은미 씨가 칭찬도 해 주니 뿌듯하기도 했다. 여기서부터 집까지 또 한 시간 가량 가야 한다. 하지만 이번엔 피곤하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운이 넘쳤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담배나 한 대 피고 가자.”


 한적한 도로에는 간간이 다니는 자동차들과 연휴를 맞이해 오랜만에 만난 친척, 친구들과 회포를 풀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근처의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아저씨 세 명이 세 지역 사투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사투리가 절묘하게 섞이고 있었다.


 차 한 잔 마셨으면 좋겠다. 따뜻한 차. 담배를 끄고 편의점으로 들어간 나는 냉장고에 들어있는 음료수를 보았다. 아까 내가 귀신에게 사다 준 음료수다. 아, 저 음료수는 어떻게 하지? 먹어도 되나? 아까 은미 씨한테 물어볼걸. 먹기 좀 그런데. 버리지, 뭐.

 온장고에서 유자차 한 병을 꺼낸 나는 편의점에서 비닐봉지도 하나 샀다. 저것들도 다 돈이긴 한데... 일단 귀신한테 줬던 거라서 누굴 주기도 찝찝하고 내가 먹기도 불안했다. 마침 쓰레기통도 있으니, 이참에 버리고 가자.

 뒷좌석을 열고 의자 위에 뒹구는 캔 커피와 자몽 맛 음료를 봉지에 담았다. 팔걸이 꽂힌 음료수 병을 꺼내다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복숭아 맛 음료수 병은 텅 비어 있었다.


 “하... 시발.”


 내 다시는 고속도로에서 휴게소 가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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