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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Dec 03. 2020

약방 호은당

<외전 5-가을의 귀퉁이(1)>



<외전 5-가을의 귀퉁이>



 추석은 요란했다. 친척들은 내가 소사라는 직함을 달고 한약방에서 일한다는 것에는 놀라지 않았다. 전혀. 하지만 내가 타고 온 차와 은미 씨가 챙겨 준 약에는 아주 많이 놀랐다. 월급이 얼마냐, 차는 네 차냐, 약은 다 얼마어치 냐, 내 보약도 한 재 해 다오.라는 이야기를 친척들이 올 때마다 반복해서 들었다. 다들 짠 것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맨 마지막에 온 막내 고모에게서 똑같은 말을 듣고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고모는 쟤 왜 저래? 하는 눈이었다. 월급은 적금 하나 들고 옷 한 벌 살 만큼은 받고, 차는 내 차가 아니며, 약은 얼만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상자 삼십만 원쯤 할 거고, 보약을 짓고 싶으시면 직접 오시라는 말고 함께 소사 박정우라는 이름이 떡하니 찍힌 명함을 주었다. 왠지 넉넉히 챙기고 싶더라. 다들 오오, 하는 감탄사와 함께 명함을 아주 상세하게도 뜯어보았다.


 소사라는 직함에 사촌동생은 형, 그거 잡일꾼 아니가? 했다. 그래. 맞아. 잡일꾼.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잡일꾼이 맞긴 맞는데, 거기 노비인 건 맞는데, 인정하기는 싫었다. 꼴에 자존심이라고, 나는 종 2품이 어쩌고 하는 은미 씨의 설명을 기억해 내 설명했다. 학교 선생님인 작은 숙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거들었다. 아주 높은 직책이라면서 말이다.

 단숨에 친척들의 시선이 변했다. 오오, 하는 탄성이 또 터졌다. 에헴. 노비이자 마당쇠이자 무수리이며 식모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종 2품 소사인 것은 변함없으니까. 알량한 자존심은 지켜냈다.

 내가 온다는 소식에 잘 오지도 않던 고모들까지 우르르 모인 덕분에 나는 이 약들을 도대체 어떻게 나누어주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꽤 많은 양이었지만 막내 고모에게까지는 돌아가지 않았다. 싱글인 막내 고모는 난 아직 젊어서 괜찮아!라고 했지만 내심 서운한 기색이 보여 나중에 따로 보내주겠다며 속삭였다. 고모는 엄청나게 기뻐했다. 안 줘도 괜찮다면서?


 가족들은 저마다 까만 옻칠이 된 상자 하나씩을 들고 돌아갔다. 내일이면 나도 다시 서울로 가야 한다. 아쉬운 마음에 늦은 밤, 부모님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조카들이 만들어 놓은 삐뚤삐뚤하고 못생긴 동그랑땡을 하나 집어 먹었다. 형수님 덕분에 명절 음식이 맛있어졌다. 형수님은 정말 우리 집의 은인이다. 맛깔난 형수님 표 명절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나는 그동안 꽁꽁 숨겨 놓았던 황금색 보자기로 싸 놓은 산삼주를 꺼냈다. 부모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캔 거예요, 산삼.”


 “니가? 니가 뭐라고 산삼을 다 캐? 샀나? 솔직하게 말해라. 약방에 들어온 거 삥땅 쳤나?”


 아버지는 산삼이 든 단지를 둥그런 눈으로 살피며 조심스럽게 쓰다듬었고 엄마는 엄한 얼굴로 나를 질책했다. 아니, 내가 도대체 엄마한테 어떤 아들이었던 거야?


 “아, 뭘 슬쩍해! 엄마는 아들이 도둑놈인 줄 알아! 나는 뭐 산삼도 못 캐나! 저, 뭐... 약초꾼 아저씨 따라갔다가 우연히 발견했지. 산삼이 다 그런 거 아니야? 운 좋으면 캐는 거지.”


 “아따. 니 진짜 출세 했는갑다. 산삼도 다 캐고.”


 “아니, 산삼 캐면 출세한 거요? 아부지도 참. 두 번 캐면 임금님이라 카겠네.”


 “아까는 왜 안 꺼냈노? 식구들 다 있을 때 자랑이라도 하지.”


 물론 그러고 싶었다. 자랑하면서 내가 캔 산삼이오!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술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제일 큰 형님이자 세 명의 큰아버지들 중 대장, 큰아버지. 첫째 큰아버지는 술이라면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분이다. 좋다는 것이 있으면 죄다 술로 담아서 드시는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계신다. 뭐라도 그냥 먹는 것보다 술에 담가서 먹으면 흡수도 잘 되고 약발도 잘 듣는다면서 말이다. 그런 큰아버지 앞에서 산삼주를 꺼냈다간 통째로 빼앗기거나 통째로 비워지거나. 둘 중 하나다. 차라리 큰아버지께는 다른 약초로 술을 담아 선물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이고, 아까 꺼냈어봐라! 큰아부지 당장 따라카미 난리났을기다. 큰아부지가 이거 보고 그냥 넘어가시겠나? 절대 안 되지. 꽁꽁 숨카놔라. 한 오 년 있다가 엄마 아부지 반주로 쪼매씩 잡숴요.”


 아버지는 신줏단지를 받든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으로 술병을 안아 모셨다. 정말로 모셨다. 아버지는 걸음마저 조심스럽게 디뎌, 안방의 어딘가에 숨겨두셨다. 절대 못 찾을 거라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옷장 맨 밑에 서랍 구석에요?”


 어머니가 피식 웃으며 던지는 말에 아버지는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따, 딴 데 넣을 기다!”


 아버지는 후다닥 안방으로 도망쳤다. 어머니는 픽 웃었다. 옮겨봤자 반대편 옷장 맨 아래 서랍이거나 옷장 위, 그것도 아니면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내고 그 아래일 것이라면서 말이다. 나는 매트리스 밑에는 뜨뜻해가 안됩니더! 하고 외쳤다. 침대가 덜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어머니는 아예 배를 잡고 뒹굴었다. 결국 아버지는 어딘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완벽하게 숨기셨고, 어머니는 뻔히 알지만 모른 척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 귀에 소곤거렸다.


 “그래도 저거 따면, 첫 잔은 꼭 당신하고 같이 무그께.”


 “혼자 다 잡술라 캤능교?”


 아버지는 상추 위에 수육 두 점과 새우젓, 청양고추를 듬뿍 올리고 쌈을 쌌다. 그리고 어머니 입에 푹 집어넣었다. 산삼주에 대해 절대 함구하라는 뜻이겠지. 나는 킬킬 웃으며 쌈 하나를 큼직하게 쌌다. 그리고 그 쌈을 아버지 입에 넣어 드렸다.




 이튿날, 나는 아침 일찍부터 길을 서둘렀다. 연휴가 짧아서 임시공휴일이 제정되긴 했지만, 난 그 임시공휴일을 실질적으로 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나는 물도 마시지 않고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리며 마지막 한 방울의 소변까지 쥐어짜 내고 차에 올랐다. 어머니는 바리바리 싼 명절 음식들을 한가득 차에 실어 주셨다.


 “등시그튼기. 얼마나 호구맹키로 살면 귀신을 태우고 댕기노?”


 “아, 하지마이소! 안 그래도 아 벌써 바짝 얼었구만.”


 “니 어디 가가꼬 해병대 나왔다 카지마라. 해병대 망신도 정도껏 해야지. 쯧.”


 아버지는 혀를 쯧쯧 찼다. 나는 씩 웃었다. 뒷좌석에는 참외 두 박스와 고구마 한 박스, 부추, 고추, 배추, 깻잎 등. 어머니가 하우스 귀퉁이에서 기른 채소들이 가득 실렸다. 귀신이 앉을자리 따위 없다.


 “그래도 착한 일 했다 아입니꺼. 복 받겠지예. 가께예. 드가요. 춥다.”


 “그래. 어여 가라. 조심하고.”


 이른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다. 찬물로 세수하는 것 같은 바람이 불었다. 마을이 자리한 언덕 아래, 저 멀리 흐르는 강 위에 앉은 물안개는 도톰한 솜이불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경치에 나는 선뜻 출발하지 못했다. 쌀쌀한 바람 속에서 팔을 문지르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고, 나는 빙긋 웃었다.


 “도착하면 전화 드리께예.”


 “그래. 가라.”


 “운전 조심하고.”


 무미건조하고 짤막한 말이지만, 이것이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가장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인사일 것이다. 골목을 돌아 저 아래 강둑길을 달려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 부모님은 찬바람 들러붙는 팔을 문지르며 지켜보고 계시겠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내 뒤에서 부모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말이다. 나는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보일지 안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 멀리서 보고 계실 것이다.


 생각보다 차가 많이 밀리지 않아서, 5시간 만에 호은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으어억. 허리 부러지겠다. 이렇게 운전을 오래 한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미리 연락을 해 두었더니 우민이와 은미 씨, 은동이까지 공영주차장에 나와 있었다. 은동이는 입에 바구니를 물고 있었다. 내가 멀뚱이 바라보자 은동이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헥헥 웃었다. 나는 내 가방을 바구니에 담았다. 은동이는 바구니를 다시 입에 물고 씩씩하게 앞장섰다. 자식이, 밥 값 하는데? 고구마 찌면 하나 주마.


 “어서 오세요, 정우 씨.”


 “형, 어서 와.”


 “다녀왔습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참외 박스를 챙겨 들었다. 집에 왔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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