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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Dec 04. 2020

약방 호은당

<외전 5-가을의 귀퉁이(2)>




 호은당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다시 노비가 되었다. 말끔하게 빼 입었던 명품 슈트는 벗어던지고, 편하고 보드라운 개량한복이 몸에 착 감겼다. 역시. 개량한복 최고.

 은미 씨와 우민이는 이미 상자와 봉지를 다 풀어헤치고 아무거나 막 집어 먹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래야 호은당이지. 나는 한숨을 쉬며 그들의 손에서 넝마가 되고 있는 전과 튀김들을 빼앗았다. 은미 씨의 눈에서 불꽃이 파박! 튀었다. 이제 안 쫄거든요?


 “기다려 봐요. 데워 줄 테니까.”


 잘 쓰지도 않는 커다란 팬을 꺼내 전을 데우고 식은 고기를 잘랐다. 아침 일찍 어머니가 삶아 주신 돌문어도 얇게 썰고, 손도 안 댄 것 같은 밥도 한 가득 퍼 담았다.


 “아니, 밥이 돌이 됐어! 밥 언제 한 건데요? 밥 안 먹었어?”


 “우리 바빠서 죽을 뻔했어!”


 “오진할 뻔했다고요!”


 두 사람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어지간히도 굶었나 보다. 그러게 나 안 간다고 했잖아요. 걱정 말라며 보낼 때는 언제고. 나 참. 투덜거리며 재빨리 상을 차렸다.

 우민이는 번개처럼 날아다니며 음식들을 마당의 테이블에 날랐다. 테이블 두 개를 놓아야 음식을 모두 놓을 수 있었다. 분명 어머니는 이틀 편하게 먹으라고 넉넉히 싸 주셨을 텐데. 오늘 점심 한 끼로 끝날 거란 걸 모르셨을 거다. 아니, 말씀을 드렸어도 그저 잘 먹는 아이들에 대해 과장해서 표현하는구나, 하셨을 거다. 마지막으로 뜨끈한 김이 오르는 소고기 탕국을 떠서 들고 나왔다. 이미 은미 씨와 우민이는 허겁지겁 전과 튀김을 먹고 있었다.


 “이틀 내내 굶었어? 천천히 먹어요! 체해! 뭐 어땠길래 그래? 많이 바빴어?”


 “손님들은 문 열기도 전에 줄 서 있지, 전화는 계속 오지, 누가 먼저 왔는지, 줄을 누가 먼저 섰는지 싸워대지... 아주 말도 못 해, 형.”


 우민이는 밥 한 술을 꿀떡 삼키고는 이내 또 수북하게 숟가락을 채웠다. 연휴 첫날, 손님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냐며 낄낄 웃으며 대문을 열었는데 대문부터 골목 끝까지 10미터 남짓한 그 길에 긴 줄이 서 있었단다. 몇 번을 묻고 또 물어도 호은당에 진맥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화들짝 놀라 전화기를 살펴보니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켜는 순간과 동시에 미친 듯이 들어오는 부재중 전화 문자에 식겁했다고. 문자들을 확인도 하기 전에 연신 울리는 전화와, 대문이 열림과 동시에 들이닥친 사람들 때문에 정신없이 진맥하고 차를 내고 다과를 냈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기도 전에 다과는 다 떨어지고, 다급하게 먹은 아침 식사는 맹물에 만 밥 한 그릇이 전부였다고 한다. 점심으로는 마지막 남은 약과 두 개와 찹쌀떡 하나씩을 먹은 게 전부였고, 저녁만이라도 제대로 먹으려고 돈가스와 초밥을 주문했는데 그것마저도 밤 10시가 다 되어서 먹었다며 우민이는 울상을 지었다.

 추석 당일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예약도 안 한 손님들이 새벽부터 줄을 섰고, 정말 위급하다며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손님과 새벽부터 기다렸던 손님이 몸싸움을 벌여 경찰도 왔었다고. 당일엔 진짜 물 한 잔, 차 세 잔 마신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먹고 일만 했다고 한다. 나는 울먹이는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밤에 뭐라도 시켜 먹지 그랬어요?”


 “말도 마요. 8시 땡 하자마자 문 닫고 싶었는데, 경주에서 왔다, 울산에서 왔다, 제주에서 왔다... 심지어 해외에서 왔다면서, 어떻게든 진맥 해 달라고, 약 달라고 매달려서... 10시까지 진맥 했어요. 끝나고 우리 둘 다 그냥 상담실에서 뻗었다니까요.”


 은미 씨는 문어 세 점을 한입에 넣으며 우물거렸다. 진짜 고생했네. 한 끼는커녕 간식이라도 거르면 으르렁대는 천하의 백은미가 하루 종일 쫄쫄 굶었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래도 손님들이 중간중간에 빵도 사다 주고, 우유도 사다 주고 그래서 안 쓰러졌지, 안 그랬으면 저 정말로 호은당 폭파시켰을지도 몰라요.”


 우민이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고생했어요. 나는 얼른 뒤뜰로 달려가 상추와 깻잎 몇 장을 뜯어 왔다. 시들시들하는 잎들 중에서도 깨끗하고 싱싱해 보이는 녀석으로 골라 깨끗이 씻어 푸짐한 쌈을 싸 두 사람에게 먹여 주었다. 그 후, 둘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테이블 위의 음식이 싹 사라질 때까지 먹고 또 먹었다.

 대단하다, 정말.


 나는 말을 하는지 음식을 먹는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전화기를 꺼냈다. 내 전화를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야 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잘 도착해 싸준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은미 씨와 우민이가 볼이 빵빵한 채 소리 질렀다. 아마도 감사합니다, 혹은 잘 먹겠습니다, 맛있어요. 등등의 말이겠지. 알아듣지도 못 할 말을 들은 엄마는 깔깔 웃으셨다. 엄마, 아들은 못 먹겠다. 하나라도 집어 먹었다간 이 사람들 울 것 같아요.


 “연화는요?”


 “기오하어 아어어.”


 아. 기도하러 갔구나. 연화는 주기적으로 기도하러 가는데, 보통 한 달에 두 번 정도 간다. 특히 명절이나 특정 일자가 되면 근 일주일 씩 머물며 기도를 하고 오는데, 이번에도 역시 다음 주까지 기도를 하고 온다고 했다. 나는 남산 만 한 배를 한 두 사람의 앞에 디저트로 참외 세 개를 잘라 놓아 주었다. 내가 한 조각 먹는 사이, 이미 접시는 비워졌다.


 “설부터는 영업 안 해. 원래 명절에 영업 안 했는데... 올해는 왜 열었나 몰라요.”


 나는 빙긋 웃으며 참외를 또 깎았다. 어지간히도 힘들었나 보다.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 나는 넌지시 물었다.


 “그럼, 어차피 오늘부터 임시공휴일 이틀은 닫기로 했으니까... 바람 쐬러 갈래요? 오는 길에 보니까 핑크 뮬리 군락지에 사람 적던데.”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을 포크를 내려놓고 각자의 방으로 달려갔다. 심지어 은동이까지 목줄을 가지러 쌩하니 달려갔다. 거 참, 행동력은 최고네. 피곤하다더니.

 나는 킬킬 웃으며 빈 반찬통을 꺼내 참외를 잘라 가득 담았다. 바람처럼 옷을 갈아입고 나온 두 사람과 함께 몇 개 남지 않은 전을 챙겨 호은당을 나섰다. 나오는 길, 업무용 전화기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은미 씨와 우민이는 벨소리를 듣자마자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이건 정말,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예, 호은당 소사 박정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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