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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Dec 07. 2020

약방 호은당

<외전 5-가을의 귀퉁이(E)>





 잔뜩 들뜬 두 사람과 은동이는 차 안에서 신이 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하다는 핑크 뮬리 군락지가 있다. 얼마 전에 연화가 이야기해 주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제일 가고 싶어 했던 연화는 없지만, 은미 씨와 우민이, 은동이라도 쉬면서 즐길 수 있다니 다행이다. 미안하다, 연화야. 넌 다음에 오자.


 우민이와 은동이는 아예 환장을 하고 뛰어다녔다. 잘 닦인 산책로를 몇 바퀴나 돌며 사진을 찍고 소리를 질러댔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로 말이다.

 우민이에게는 특별한 시간이다. 은동이 없이는 호은당 밖을 나갈 수도 없으니, 갈 수 있는 곳도 한정적이다. 그런 우민이에게 이곳은 낙원이다. 우민이는 은동이의 목덜미를 안고 사진을 찍어댔다. 인싸그램 알림이 계속 울렸다.

 이 녀석, 몇 장을 올리는 거야? 댓글과 좋아요 수가 폭주했다. 은동이의 팬클럽이라고 자칭하는 랜선 이모들이 오구오구 하는 댓글을 남발하고 있었다. 은동이를 이뻐하는 건지, 우민이를 좋아하는 건지 가끔 헷갈리긴 하지만.


 은미 씨와 함께 인싸 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실시간으로 보다가 움찔했다. 우리가 나란히 산책하는 사진도 있었다. 그 아래, 매 게시물마다 가장 먼저 댓글을 다는 익숙한 아이디가 보였다. 어머나, 잘 어울려요. 그리고 하트. 어, 허. 거, 참.

 괜히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우리 그런 사이 아닌데요.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또 댓글이 달렸다. 감사합니다. 하트... 응? 은미 씨였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니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칭찬해 주면 고맙다고 인사는 해야죠.”


 방긋 웃는 그녀의 뒤로 연분홍 파도가 출렁거렸다. 넓게 펼쳐진 분홍빛 안개 같은 억새들이 사사사 소리를 내며 바람을 그렸다. 단아한 크림색 저고리와 청록빛 치마, 길게 풀어놓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연분홍 파도와 함께 흔들렸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 피어있는 은미 씨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심장이 움찔, 움직이는 것 같았다.

 뭐, 뭐지...? 방금? 나 어디 아픈가?


 “형아아! 누나아! 배고파!”


 저 식충이 자식. 밥 먹은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이리 와! 간식 먹자!”


 저 멀리서 커다란 은동이와 우민이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그들의 옆으로 펼쳐진 분홍빛 바다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오늘, 나는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자연을 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연화야, 다음에 꼭 데리고 와 줄게. 여기 정말 예쁘네.



 우리는 근처 벤치에 모여 앉아 싸 온 과일과 한과를 부산스럽게 먹었다. 은동이도 자기 몫으로 육포 몇 점을 뜯었다. 해는 일찍 기울었다. 4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서늘했다.


 “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


 “음... 비빔밥? 정우 씨가 처음 온 날 해 주셨던 그거. 참 맛있었어요.”


 아. 그래. 내가 첫 출근 한 날,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과 냉해로 시들 거리던 텃밭 채소들, 그리고 연화가 갖다 놨다는 고추장 양념으로 비빔밥을 해 먹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의 비빔밥은, 내가 했지만 꽤 괜찮았지.

 그 많은 간식을 다 먹고도 배가 고프다는 우민이를 앞세우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산책로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은동이와 우민이는 또 벌써 저만치 달려 나간 뒤였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붉은 잿빛의 억새일 뿐인데, 이렇게 모여 있으니 참 사랑스러운 분홍색 호수가 된다. 바람을 따라 사르르 흔들리며 파도치고, 마음을 빗어주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소리가 도시의 소음을 막아주고.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조용히 함께 걷던 은미 씨가 기지개를 켰다. 내 심장은 또 움찔했다. 아, 왜 이러지? 돌아가면 진맥을 좀 해 달라고 해야겠다.


 “아쉽네요. 오늘이 가는 게.”


 “그러게요. 오늘따라 하루가 너무 짧은 것 같아요.”


 “있잖아요, 저는 이 날까지 살면서 핑크 뮬리라는 거 처음 봤어요. 아니, 핑크 뮬리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이걸 핑크 뮬리라고 부르는 줄 몰랐던 거죠.”


 어... 그렇겠죠. 저도 서른 두 해를 살면서 처음 봤거든요. 뭐, 우리 그렇게 오래 산 건 아니잖아요? 나는 픽 웃었다. 왠지 엄청 오래 산 할머니 같은 말을 한다.


 “제게 있어서 식물은 모두 약이었어요. 이 식물은 어디에 좋고, 이 식물은 어디에 나쁘고. 이 식물은 독이 있고, 없고. 제게 있어서... 자연은 약국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제게는 약국 같은 곳이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아니네요.”


 사박사박 걷던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올려 보았다. 어째선지 쓸쓸하게 들리던 그 말에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분홍 파도가 깃든 뽀얀 얼굴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 같았다.

 외로웠다고. 지금까지 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약초꾼 아저씨에게 듣기로,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호은당의 전 주인이었던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호은당 일로 매우 바빴다고 했다.

 어린 은미 씨는,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그저 홀로 그렇게, 그 넓은 호은당의 마당에서 사계절을 보냈을 것이다. 마당 구석구석에서 자라는 흔하디 흔한 잡초들과 이야기하고, 바스스 흔들리는 보리수나무 그늘에서 하늘과 이야기하고, 덧없이 흩날리는 낙엽과 손에 닿을 듯 말 듯 날아다니는 잠자리들과 함께 뛰어다니고, 찬바람 휘몰아치는 언 땅에서 봄을 기다리는 숨은 씨앗들에게 잘 자라 인사하면서. 그녀는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굳은살 가득한 작은 손을 꼭 잡았다. 은미 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장이 또 술렁거렸다. 어, 그, 그냥 다른 뜻 없이 잡은 건데.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어수선한지 모르겠다. 어딘지 모르게 시끌시끌, 난전 같았다. 나는 뭐하는 거냐는 은미 씨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긴 시간 홀로 외로웠을 사람. 은미 씨의 호은당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은 외롭지 않게 해 주어야지. 다른 건 모르겠고, 약과 호은당 밖에 모르고 살았을 이 아가씨에게 바깥세상에 얼마나 아름답고 다채로운지. 약과 약초 말고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지금 이 빛나는 분홍 파도처럼. 세상은 외롭고 쓸쓸한 곳이 아니라 아름답고 눈부신 곳이라고. 행복한 곳이라고.


 “우리, 종종 이렇게 나와요. 나와서... 호은당 말고 바깥세상, 자주 봐요. 안에서 약만 만지고 있지 말고요.”


 동그랗게 반짝이던 까만 눈동자에 황금빛 노을이 앉았다. 뽀얀 얼굴 가득 채우고 있던 분홍빛 노을이 환하게 빛났다. 은미 씨의 눈이 곱게 휘어져 반달이 됐다. 발그레한 입술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정말, 눈이 부시게 웃었다. 오늘 은미 씨는 아름답게 빛났다.


 “네! 꼭이요.”


 “형아! 나 넘어졌어어!”


 아 씨, 저 자식. 오늘따라 왜 이리 얄밉지?

 나와 은미 씨는 우민이의 목소리와 컹컹 짖는 은동이의 소리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놓고 후다닥 달려갔다. 저 녀석은 한 번 다치면 크게 다치는데. 멀지 않은 산책로의 끄트머리, 우민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조심 좀 하지!”


 나는 얼른 녀석의 머리에 꿀밤부터 한 대 놨다. 오늘따라 미운 놈. 왜 미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괜지 얄밉다. 은미 씨는 서둘러 바지를 걷어 우민이의 발목을 살폈다.


 “그냥 삐끗한 거야. 괜찮아. 발목 움직여 봐.”


 은미 씨는 다정하고 포근하게 우민이를 보살폈다. 옆에 함께 앉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또 심장이 술렁거렸다. 쿵, 하면서 크게.

 나 정말 어디 아픈가? 안 되는데. 아직 1년도 채 일 못 했는데. 벌써 큰 병이면 어쩌지? 아직 서른두 살 밖에 안 됐는데! 약 먹으면 나으려나? 어느 병원을 가야 하지? 나 없으면 이 둘은 진짜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손이 떨려, 나는 얼른 손을 숨겼다.


 다행히 우민이는 이내 다시 잘 걷게 됐다. 신나게 뛰어놀다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진 탓이었다. 크게 다친 것이 아니라 가볍게 삔 거라 그런지, 굳이 다른 처방은 필요 없는 듯했다. 돌아가면 찜질 좀 해 주고 약이나 발라줘야지. 언제 넘어졌냐는 듯 다시 신나게 방방 뛰는 우민이의 뒤통수에 대고 좀 뛰지마아악!! 하고 소리를 질러 주었다. 그리고 우리 앞의 산책로는 끝이 났다.


 아쉬움이 가득한 발이 산책로를 떠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황금빛을 가득 머금을 붉은 파도가 너른 평지 가득 일렁이고 있었다. 군데군데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커플들과 우민이 만큼이나 신난 아이들이 보였다. 가슴 가득 두근거림이 차올랐다.


 아픈 게 아니구나. 나, 오늘 행복했구나. 즐거웠구나.

 그래. 그랬다. 내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나 오늘, 행복했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모두 행복했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드넓은 분홍빛 바다를 사진으로 남겼다. 연화에게도 보여주자.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다는 걸.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너도 나처럼 행복했으면. 우리 모두, 지금처럼만 행복했으면.


 “형아! 빨리 가자! 배고파!”


 아, 저 녀석. 끝까지 얄밉네.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서는 순간,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 아, 가슴 가득 차 있던 행복이여.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내 추억이여.


 “예, 호은당 소사 박정웁니다.”


 잊지 말자. 나는 호은당 노비 박정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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