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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Nov 08. 2018

라면과 라멘

서로 다른 매력을 인정하는 일

라면과 라멘, 서로 다른 매력. 


라면의 추억


그리 건강하지 못한 식성을 지닌 자들이 으레 그렇듯, 나도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유독 면류를 사랑하는데, 서른이 되기 전엔 쌀밥 없이 면만 먹고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최근 들어 ‘밥맛’을 알아버린 탓에 요즘은 라면이든 라멘이든 남은 국물에 밥 몇 술이라도 말아먹어야 속이 든든하다. 


막 김치를 잘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나는 라면에 빠져들었다. 짜고 맵고 기름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음식이긴 했지만 특히 부모님의 방해(!?)가 끼어들면 그 맛은 배가됐다. 하지 말라는 것일수록 더 하고 싶듯이, 먹지 말라는 라면이 더 맛있는 법. 성인에게나 성장기 아이에게나 라면의 영양 성분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아서 내게 라면은 일주일에 겨우 한두 번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다. 물론 스스로 라면을 끓일 수 있게 되고, 분식집 라면 하나쯤 사 먹을 수 있는 용돈을 받게 되고, 본가에서 나와 혼자 살게 되면서 라면은 내 끼니이자 간식이자 야식이 되어버렸지만. 

일요일엔 디즈니 만화동산 보고 라면 한 그릇... 

누구나 그러하듯, 라면에 대한 추억이 많다. 주말마다 외갓집에 가면 일요일 아침에 외삼촌이나 이모가 끓여주던 라면.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고 있으면 그다음으로 잠에서 깬 누군가가 말없이 라면을 끓였다. 특히 막내 외삼촌의 라면은 별미였다. 약간 적은 듯한 국물에 계란은 두 개. 하나는 국물에 풀고, 하나는 반숙으로 터뜨려 먹을 수 있게끔. 거기에 대파나 양파를 총총 썰어 넣기도 했다. 엄마의 라면은 자주 맛볼 수 없는 대신 한 번 먹을 때마다 양이 푸짐했다. 계란은 기본이고, 각종 야채와 떡, 만두, 햄, 김치, 다진 마늘, 참기름 등등. 분명 끓인 건 3개인데 양은 5인분 쯤 되는 그런 라면. 


처음 고시원에서 자취를 하며 허구한 날 끓여 먹었던 라면, 라면, 라면. 4끼 정도 연속으로 라면을 먹으면 속이 쓰려 새벽에 잠에서 깬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군대에선 봉지에 익힌 라면, 속칭 ‘뽀글이’와 육개장 사발면을 먹었다. 간짬뽕이나 공화춘 짜장 같은 특미도 있었지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건 한겨울 초소 경계 근무 중에 먹었던 육개장 사발면. 일부러 야외에 서서 칼바람을 맞으며 먹곤 했다. 젓가락을 몇 번 들었다 놨다 하면 금세 식어버렸던 면발과 속을 든든히 데워주던 국물. 

약 30년 전 안성탕면의 착한 가격...!

출처 : https://blog.naver.com/larc13/220745169914


그 모든 순간들에 라면이 있을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1000원이면 제일 값싼 라면으로 그럭저럭 한 끼는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물론, 내가 라멘을 알기 전의 이야기다. 


라면과 라멘, 한 끗 차이라기엔 너무 큰 가격 차이 


라면만 먹어대던 내가 처음 라멘을 만난 건 스물여섯 봄이었다. 대학교 정문 길 건너에 ‘멘야산다이메’라는 라멘 가게가 생긴 것. 일본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인테리어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일본 음악이 흘러나오던 곳. 트렌드에 민감한 후배 녀석 덕분에 들어가게 된 그곳에서 나는 라멘의 가격에 먼저 놀랐다. 기본 7,000원 선에서 토핑이다 뭐다 추가하면 9,000원까지도 나가는 라멘. 당시 내게는 라면이나 라멘이나 한 끗 차이였기 때문에, 1,000원짜리 라면이 9,000원짜리 라멘이 되는 변화는 악랄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소고기 국밥이나 육개장, 갈비탕도 아니고 라면 비슷한 라멘에 이 정도 돈을 써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런 충격과 고민은, 라멘을 먹자마자 사라졌다. 

크... 저 진한 국물과 두툼한 챠슈를 보라

라면 수프 국물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죄송스러운 라멘의 진한 사골 국물. 라면 20봉 치 건더기보다도 더 푸짐한 야채와 고기, 그리고 반숙 계란. 기름에 튀기지 않아 담백한 면발까지. 내가 그동안 먹었던 건 라멘의 ‘이미테이션의 이미테이션의 이미테이션’이었던 게 아닐까. 그날부터 한동안, 나는 ‘도장 깨기’ 하듯 대학가 근처의 라멘 가게를 섭렵해나갔다. 돼지 뼈를 우려낸 돈코츠 라멘, 일본식 된장을 푼 미소 라멘, 간장 베이스의 쇼유 라멘, 찍어 먹는 츠케멘, 비벼 먹는 마제멘까지. 같은 메뉴라도 가게마다 토핑이 제각각이라 먹는 재미도 있었다. 대파, 마늘, 챠슈, 반숙 계란의 기본 토핑에 청경채, 숙주, 버섯, 미역, 다진 고기와 옥수수 콘까지. 덕분에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나의 엥겔지수는 대학 생활 중 최고를 찍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라멘을 만났으니까. 


각자의 맛, 각자의 멋


명품에 홀려 평범하고 가성비 좋은 제품들을 홀대하는 졸부처럼, 라멘에 심취한 나는 한동안 라면을 홀대했다. 라면을 무성의하고 해로우며 싸구려인, 라멘의 보급형도 되지 못할 음식이라고 치부했다. 혹시 ‘라면이 먹고 싶은 본능’이 불쑥 찾아오기라도 하면, ‘흥, 그럴 바엔 라멘을 먹지. 몇 배의 돈을 내고서라도!’라며 라멘 가게로 달려갔다. 가끔은 편의점에서 인스턴트로 나온 돈코츠 라멘 같은 걸 먹어보기도 했지만 영 실망스러웠다. 한낱 음식 앞에서 사람이 유치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허세도 얼마 가진 못했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끓인 라면이, 기분에 따라 꼬들꼬들하거나 푹 퍼져버린 그 면발이, 냉장고 반찬통에 애매하게 남은 김치를 탈탈 털어 넣은 그 국물이, 자꾸 나를 찾아왔다. 늦잠 자고 일어난 주말, 씻지도 않고 라면부터 끓였다. 한 젓가락 후루룩하자마자 든 생각. ‘그래, 라멘은 라멘이고 라면은 라면이지.’ 라멘이 제 아무리 고급스럽고 정성스러운 음식이라 해도, 라면에게는 라면의 맛이 있는 법이니까. 


굳이 따져보면, 나는 라멘보다는 라면에 가까운 사람일 텐데. 우선 내 몸을 거쳐 간 빈도와 양만 보더라도 라면이 압도적이고, 상대적으로 적은 돈으로 생활하는 중이며, 하루하루의 농도가 사골 육수만큼 진하지도 않을 텐데. 라멘 한 그릇의 정성을 닮은 장인 정신으로 몰두해본 적보다, 라면에 띄우는 계란 노른자를 닮은 소박한 사치에 즐거웠던 적이 더 많았을 텐데. 내가 뭐라고 라멘 따위로 거드름을 피웠단 말인가. 양은 냄비에 담긴 겸손한 라면 앞에서, 오만불손했던 한때를 반성하며 남은 국물에 찬밥을 말아먹었다. 


그러다 문득, 어릴 적 엄마 몰래 라면을 끓여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경상도 김해 토박이인 아버지는 'ㅕ‘ 발음을 ’ㅔ‘로 하곤 했다. 


“빈아, 라멘 묵으까? 신라멘 물래? 안성탕멘 물래?”


그러고 보니 나는 이미 어릴 적부터 라멘을 먹어본 셈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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