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욕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생의 증거니까.
딱 요즘처럼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이었다. 애인과 돼지국밥 가게에 앉아 차게 식은 손을 무릎에 비벼대며 따로국밥 두 그릇을 주문하자, 초록색 소주회사 앞치마를 걸친 이모님께서 은색 쟁반(경상도에선 그걸 ‘오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에 놓인 기본 찬들을 날라주셨다. 배추김치와 깍두기, 자그맣게 말아둔 소면과 부추(경상도에선 그걸 ‘정구지’라고 한다.), 새우젓과 쌈장과 상추, 그리고 썬 양파와 생마늘, 고추와 오이. 돼지국밥 드셔 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기본 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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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를 참지 못한 우리는 맨입에 김치를 먹기도 하고 고추나 오이를 쌈장에 찍어 베어 먹기도 하며 뜨끈한 국밥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눈이 휘둥그레진 애인이 날 보고 던진 말.
“야! 편식이 그렇게 심하면서, 오이를 먹는다고? 왜?”
왜냐니, 그냥 먹을 만하니까 먹지. 그나저나 못 먹는 거 많다고 타박할 땐 언제고, 잘 먹으니 또 왜 이러는 건지.
애인은 오이를 먹지 않는다. 돼지국밥 가게에서 오이를 잘 먹는 편식왕의 기행(?)을 목격한 후로는 짜장면을 먹을 때도, 밀면이나 냉면을 먹을 때도 면 위에 다소곳이 누워있는 채 썬 오이는 오롯이 내 몫이었다. 나로서는 딱히 불만은 없었다. 편식왕이지만 의외로, 오이를 잘 먹는다.
오이가 호불호 심하게 갈린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오이 특유의 냄새라든가, 아삭한 겉과 달리 다소 무른 식감의 심지라든가 하는 부분이 누군가에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포인트였으리라. 그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내게는 그런 포인트가 사방천지에 너무 많으니까. 덕분에 편식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서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음식으로서 오이가 싫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군대 훈련소 샤워장의 습기 가득한 공기에 떠다니던 오이 비누의 향은 지긋지긋했지만, 다행히도 오이 비누는 먹는 것이 아니었다.
껍질을 벗겨낸 오이는 큼직하게 썰어 쌈장에 찍어 먹는 맛이 좋다. 수분을 가득 머금은 덕에 씹을 때마다 텁텁한 입안이 해갈되는 기분이 든다. 밋밋한 가운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오이 특유의 향은 쌈장이 특유의 맛으로 잡아준다. 짜장면의 채 썬 오이는 느끼한 기름기를 잡아주고, 밀면이나 냉면의 채 썬 오이는 말랑말랑한 면의 식감을 다채롭게 해준다. 오이소박이는 아무리 맵고 짜도 뒷맛이 개운해서, 밥반찬은 물론 야심한 때 밤참으로도 좋다. 이렇게 일일이 오이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열거하고 있자니, 옆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진다. 기가 찬다는 애인의 표정. 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별다른 이유랄 것도 없지만, 나는 오이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던 내가 유난히 오이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식성이나 독서하는 행태나 편식의 버릇은 여전한 탓에 그의 책 중 몇몇은 여러 번 다시 읽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상실의 시대》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읽기 시작해 이십 대 중반이 될 때까지 10번 정도 읽은, 그야말로 내 청춘의 책 중 한 권이다. (사족이지만,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제보다 ‘상실의 시대’가 훨씬 더 소설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마음속에 나오코에 대한 그리움과 책임감을 지닌 채로 미도리라는 여자와 요즘 말로 ‘썸’ 비슷한 관계를 이어간다. 미도리는 마을에서 불이 나자 제 집 옥상에 올라가 기타를 치며 제멋대로인 노래를 부를 만큼 엉뚱하고, 감당하기 힘들 만큼 발랄하면서도, 쉽게 위로하기 힘든 상처를 지닌 인물이다. 그리고 그 상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대학 병원에 입원해있다. 거동은 물론이고 4음절 이상의 단어조차 내뱉기 힘들 정도의 상태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와타나베는 언니와 번갈아가며 아버지를 보살펴야 하는 미도리의 부탁으로 함께 대학 병원에 가게 된다. 졸지에 ‘썸녀’의 아버지를, 그것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미도리의 거듭된 부탁에도 수프 한 입조차 먹지 않는다. 지친 미도리가 바람을 쐬러 나가고, 병실에 남겨진 와타나베와 그녀의 아버지. 당황스러울 법도 하지만, 와타나베는 다정하고도 무던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대기 시작한다. 미도리가 얼마나 좋은 여자인지에 대해서. 바깥 날씨의 상쾌함, 다림질하는 기쁨과 연극 에우리피데스에 나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서.
한참 재잘대다 배가 고파진 와타나베는 먹을거리를 찾다가 오이와 김과 간장을 발견한다. 김으로 오이를 감아 간장에 찍어 아작아작 먹으면서, 오이가 아주 맛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오이를 두 개째 먹어치우고서는 병상에 누워있는 미도리의 아버지에게 주스나 차를 마시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오이.”였다. 수프 한 입조차 먹지 않던 그는 “맛있어.”라는 말을 하면서 오이 한 개를 다 먹는다. 그때 와타나베가 한 말은, 내가 오이를 특별히 좋아하게 된 주문 같은 것이었다. “먹으면서 맛있다는 걸 느끼는 건 좋은 일이에요. 살아있다는 증거 같은 거죠.”
《상실의 시대》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좋아하는 장면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누워있는 회색빛으로 탁하게 물든 병원이 서서히 색색의 활기를 띄는 장면. 오이를 아작아작 먹는 모습에서 식욕이야말로 생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병문안 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꾸 먹을 걸 사 들고 가는 건지도 모른다. 비록 그다음 주 금요일에 미도리의 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지만, 떠나던 그의 입에 가장 선명한 생의 맛은 분명 오이였을 것이다.
오이를 좋아한다곤 해도 특별히 찾아 먹는 건 아니었는데,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나선 입맛이 없을 때 괜히 오이를 찾게 된다. 입맛이 없다는 건, 이것저것 아무것도 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어쩐지 생의 의욕마저 시들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럴 땐 거창하고 대단한 걸 하려고 할 필요 없이 입맛이나 돋울 수 있으면 된다는 걸, 와타나베와 미도리 아버지를 통해 배웠다. 씻은 오이를 쌈장이나 간장에 콕 찍어 먹는 일. 혹시 오이소박이를 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멍하니 앉아서 오이를 아작아작 씹다 보면 뭔가 더 맛있는 걸 먹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힘차게 살아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몸에 은근히 퍼진다. 오이는 그럴 때 진가를 발휘한다.
이제 애인이 나에게 “너는 편식은 심하면서, 왜 오이는 잘 먹는 거야?”라고 따져 물을 때, 그럴듯한 대답을 할 수 있다. 오이를 먹으면 입맛이 돌고 생의 활기 같은 게 생기거든.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날 쏘아보겠지.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도 오이 같은 건 먹지 않겠지.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나는 오이는 먹을 필요가 없겠네. 나한텐 입맛이 돌고 생의 활기를 느끼게 해주는 음식이 너무 많거든. 곱창, 생 연어, 닭발, 물회…” 하나 같이 내가 먹지 못하는 것들이다. 아무렴 어때, 나는 그저 오이를 먹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