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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Nov 22. 2018

때로 맥주는 맥주만으로 충분하지

보고 싶은 사람을 불러내는 힘

때로 맥주는, 맥주만으로 충분하지


맥주 마시기 좋은 날


“언제 한 번 보고 밥이나 먹자, 아니면 커피라도 한 잔 하자.” 대학교 졸업 이후 가장 많이 했던 빈말 중 하나가 아닐까. 물론 몇몇은 아주 빈말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성사되지 않았고, 성사되지 않았음에도 큰 타격이 없다는 사실만은 여전했다. 사실 저런 얘길 주고받는 두 사람 모두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올해 안에는 같이 밥 먹을 일이 없을 것이며,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한 시간씩 함께 있기엔 좀 부담스럽기도 하다는 것을.


그런데 “야, 술 한 잔 하자.”는 말만큼은 실제로 이뤄지는 타율이 굉장히 높았다. 우선 빈말로라도 술을 마시자는 제안을 할 정도라면 이미 꽤 친분이 있는 사이일 테고, 다른 음식이 아닌 술이라면 ‘뭔가 술 땡기는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그중에서도 소주나 막걸리보단  유독 ‘맥주 한 잔’을 자주 마셨다. ‘소주 한 잔’처럼 진중하고 무겁지도 않고, 낮맥이니 치맥이니 하는 식으로 시공간의 제약도 덜하니까. 심지어 특별한 이유가 필요치도 않았다. 열대야가 시작될 무렵, 후끈하고 습한 밤공기를 들이쉬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맥주 마시기 좋은 날이구나.


맥주를 즐기는 다양한 방법


맥주를 즐기는 타이밍에 대해 먼저 얘기해보자. 앞서 얘기한 한여름 밤의 생맥주는 두말하면 입 아프고, 캠핑장이나 대학 캠퍼스에선 병맥주를 병째로 들고 마시는 여유를 부리는 것도 나름 낭만적이다. 야근 후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쟁여둔 캔맥주를 따는 소리는 얼마나 경쾌한지. 끝없이 수다를 떨어도 즐거운 사람과 함께라면 주말엔 대낮부터 낮맥을 즐기는 것도 좋다.


이제 맥주와 어울리는 안주를 읊어볼까. 흔히 맥주는 마른안주나 튀김 종류와 찰떡궁합이라고들 한다. 볶은 땅콩과 아몬드, 쥐포나 육포 또는 말린 오징어. 만약 식사 겸 맥주를 마실 거라면 치맥(치킨과 맥주), 피맥(피자와 맥주), 감맥(감자튀김과 맥주)도 좋다. 최근에 먹어본 조합 중에선 떡볶이와 맥주도 훌륭했다. 특히 서른이 다 되어 발견한 의외의 조합 중에선 국밥과 맥주가 있다. 요즘처럼 추워질 무렵이면 생각나는 ‘국맥(국밥과 맥주)’. 부산의 명물, 돼지국밥과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 목욕탕에서 냉탕과 열탕을 번갈아 오갈 때의 그 찌릿찌릿하고 훈훈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같이 맥주 마시기 좋은 사람은? 기왕이면 슬프고 우울한 사람보단 활기차고 긍정적인 사람이 좋다. 청승과 눈물은 소주에게 잠시 양보하고, 맥주를 마실 때만큼은 광대가 터져라 웃을 수 있으면 좋다. 맥주 광고에서처럼 잔이 깨질 듯 에너지 넘치는 건배를 하진 않더라도, 술을 마시는 내내 미소가 머물 수 있는 사람이면 차가운 맥주를 마시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혹시 맥주 가게 한쪽 벽면의 커다란 TV에서 한일전 축구나 야구라도 중계하고 있다면 같이 응원해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사이.


맥주를 마셔야 할 때


꽤 오래전부터 ‘한국 맥주는 맛없다’는 인식이 강했다. 맥주의 본고장인 독일에 비하면 한국 맥주는 비린내 나는 보리차라면서. 하지만 그것도 이제 옛말이다. 세계적인 요리사 고든 램지가 “이모! 카스!”를 외칠 정도니까.(물론 자본주의에 굴복했다는 썰이 압도적이지만...) 아니, 그보다도 이제 우리도 양질의 다양한 수제 맥주를 즐길 수 있다. 2002년 주세법 개정으로 소규모 맥주 제조 면허가 도입된 후로, 하나 둘 수제 맥주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요즘은 각 맥주집이 자신들의 이름을 딴 시그니처 맥주를 개발하고, 전국 각지로 유통하기도 한다. 부산에만 해도 고릴라 브루잉, 갈매기 브루잉, 오울 앤드 푸쉬캣 등 입지를 다진 곳이 여럿 있다.


그저 시원한 맛으로 벌컥, 벌컥 들이키고 은근히 올라오는 취기를 즐기기만 했던 내가 ‘맥주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바로 수제 맥주집이 성행하면서부터다. 맥주와 어울릴 만한 음식, 어울릴 만한 사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떤 맥주’를 마실 것인지를 먼저 고민하게 된 것이다. 편의점에서도 무조건 싼 걸로 골라 마시는 대신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게 됐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흑맥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음주 이력 10년 만에) 처음 알게 됐다. 수제 맥주 중에선 맥파이 페일 에일을 제일 좋아한다. 묵직하고 고소하면서도 살짝 쓴맛이 감도는데, 신기하게도 코로는 달콤한 과일향이 은은하게 올라온다.


'맥파이 페일 에일'은 맥파이 브루잉에서 제조한 시그니처 수제 맥주다.

출처 : http://www.magpiebrewing.com/


‘안주빨’ 세우는 사람은 술맛을 모르는 거라던 그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그런데 맥주 맛을 조금 알고 난 뒤로는 그 말도 이해가 된다. 정말이지 맥주는, 때로 맥주만으로 충분하다. 안주도, 사람도 필요 없이 가끔 혼맥을 하는 기분. 특유의 맛과 코를 타고 올라오는 향을 음미하며 기분 좋은 취기를 받아들이는 일.


신기하게도 그러고 있으면 문득 누군가 생각나기도 한다. 대뜸 전화해서 “야, 조만간 우리 맥주 한 잔 하자. 내가 맛있는 맥주 가게 알거든.” 말하고 싶은 사람. 보통 그렇게 던진 말들은 성사되는 타율이 높다. 취중진담의 농도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렇게, 혼자 맥주를 마시는 일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맥주는 늘 반갑고 그리운 무엇인가를 불러낸다. 삶이 무료하거나,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지조차 잊은 것 같을 때 맛있는 맥주를 천천히 음미하며 마셔보자. 조금씩 생의 활기가 차오르고, 갑자기 누가 보고 싶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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