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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Dec 06. 2018

편식왕이 먹는 유일한 발, 족발

족적을 먹다.

편식왕이 먹는 유일한 발, 족발


남의 발을 먹는다는 게


자칫 질타를 받을 수도 있는 이야기로 이번 화를 시작해야겠다. 편식왕인 나는 어릴 적부터 고기류를 먹을 때마다 ‘살을 도려내 먹었으면 그걸로 족하지, 무엇하러 내장이니 발이니 하는 걸 먹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 것들을 먹으려는 시도를 했던 조상님들의 임기응변과 생존전략에 대한 모종의 비난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우리는 살코기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갖가지 영양분을 내장과 발 등의 부위로부터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론 바로 그 때문에 편식왕인 나의 불편함도 커졌으니까.

돼지? 나...?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나는 익힌 것이라도 내장, 발, 기타 특수 부위 등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간이나 천엽, 곱창, 대창 등등 모두 나에게는 ‘굳이 먹을 필요 없는’ 부위들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우연한 계기로 돼지 껍데기와 닭 근위(닭똥집), 족발은 먹을 줄 알게 되었다는 것.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 내장도 즐기게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남의 내장을 씻어서 먹는다는 게, 남의 발을 양념해서 먹는다는 게 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질 않아서.


웬만해선 거의 모든 음식을 잘 먹는 애인에게 “그런 걸 왜 먹어?”라고 물으면 “맛있으니까!”라는 우문현답이 돌아온다. 그 말에 100% 공감한다. 어쨌거나 이제 나는 족발을 굳이 찾아서 먹고 싶을 때가 있을 만큼 좋아하니까. 아니, 편식왕이라며? 내장이나 발은 못 먹겠다며? 그런 걸 왜 먹느냐고 물으신다면 “먹어보니 맛있으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족발? 이름이 좀 이상한데


동물 발을 재료로 하는 요리가 그리 흔하고 다양하진 않다. 닭발, 돼지 족발이 대표적이고 우족(牛足)은 주로 사골을 우려내는 데 사용된다. 그 외에는 글쎄, 적어도 보거나 들어본 적 있는 ‘발 요리’는 흔치 않은 것 같다. 그중에서도 나는 족발만을 즐긴다. 닭발은 거의 쳐다보기도 힘들고, 우족은 뼈를 우려낸 국물만 취한다. 참, 내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도 징하다.


그런데 ‘족발’이라고 부르고 나니 좀 웃기다. 족발의 ‘족(足)’이 그 뜻 그대로 ‘발’인데, 결국은 ‘발발’인 셈이니까. 이게 무슨 어둠의 Darkness, 운명의 Destiny 같은 이름이란 말인가. 우족과 같은 조어법이라면 ‘돈족(豚足)’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 같은데.

음, 왜 밀리는 느낌이 드는 걸까...?

그 이유에 대해서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2가지 설을 푼 적이 있다. 하나는 우족, 돈족 하는 식으로 한자만으로 이름 붙은 음식들은 과거에 비교적 고급스럽다는 인식이 있어서 서민들이 즐기는 음식에 맞게 ‘발’이라는 한글을 한 번 더 사용했다는 설. 다른 한편으로는 돈족이라고 부르면 왠지 우족이 밀린다는(?) 느낌을 받은 고위층의 영향 때문이었다는 설. 사실 개인적으로는 둘 다 그리 설득력이 강하진 않고, 그냥 ‘~카더라’하는 정도로 알아둘 만 하단 생각이 든다. 내 마음대로 ‘추측 썰’을 덧붙여보자면, 동물 발 요리 중에 제일 맛있어서 강조한 것은 아닐까? 마치 Best of Best, 왕중왕 같은 표현처럼 ‘발 중의 발’이라는 뜻으로 ‘족발’ 뭐, 그냥 흘러들으셔도 될 만한 편식왕만의 생각이긴 하지만.


족적을 먹는 것


또 기왕에 족발을 먹고 글을 쓰는 마당에 “족발 JMT!"라는 말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좀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차에 문득 ‘육식은 동물의 살점뿐만 아니라 업을 섭취하는 것’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육식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다. 섭취 가능한 고기의 조건을 정해둔 ‘구정육(九淨肉)’을 지키며 탐육하지 않는다면 육식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일을 어쩐담. 이미 나는 그동안의 탐육으로 내 업보의 절반 이상이 닭과 돼지와 소와 오리 등등의 업으로 채워졌을 텐데.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사실 육식을 포기할 생각이 없기도 하고.

고기 먹기 어렵다...

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동물의 업, 즉 카르마를 섭취하는 일에도 부위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가령 생의 대부분을 먹기 위해 활약했던 입과 혀, 소화시키기 위해 존재했던 내장들, 생존을 위해 쉴 새 없이 달리고 버텨야 했을 다리와 발은 서로 각기 다른 카르마를 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족발을 먹는다는 것은 생전 돼지의 족적을 먹는 일이기도 하다. 좁은 우리에서 그저 도축되고 먹히기 위해 같은 자릴 디뎠던 설움의 족적, 혹 넓은 들판을 달려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자유를 갈망했던 족적, 무거운 몸을 지탱하며 새끼를 낳고 보듬었던 생존의 족적 같은 것들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새삼 족발 앞에서 비장한 기운이 감돈다. 돼지를 안쓰러워하는 마음보다 육식의 즐거움이 더 큰, 무지막지하고 무자비한 인간의 딜레마. 돼지의 입장에선 비극이지만, 족발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이 정도의 다짐을 더할 뿐이다. 족발을 먹은 날에는, 적어도 돼지의 살아생전 족적만큼은 열심히 살자. ‘한낱 돼지’보다는 나은 인간이 되자. 오늘도 족발을 먹었다. 심지어 보쌈도 함께. 이제 어쩔 수 없다. 더 열심히 살아보자. 돼지의 몫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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