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맛을 알아가는 과정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일이다. 그때도 나는 피자를 좋아했지만, 지금처럼 먹고 싶을 때마다 마음 놓고 먹진 못했다. 겨우 10살인 내가 돈을 벌지도 못했거니와 우리 가족의 생계가 그리 넉넉한 편도 아니었으므로. 해서, 치킨이나 피자 또는 삼겹살이나 돼지갈비 같은 것들을 먹을 땐 늘 나름의 명분이 필요한 시절이었다.
문제의 그날은 수요일 또는 목요일이었던 것 같다. 웬만해선 뭘 사달라고 조른 적 없던 내가 하교하자마자 느닷없이 피자를 먹으러 가자고 엄마를 닦달했다. 처음엔 얘가 왜 이러나 싶어 하시던 엄마도, 저녁이 되어 아버지가 퇴근하고 나서도 피자, 피자 노래를 부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결국 시내에 있던 ‘피자헛’으로 향했다.
사실 그날은 저녁 8시쯤, 구몬 선생님이 오시기로 한 날이었고 나는 숙제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 한들 선생님이나 엄마가 크게 혼내지도 않을 텐데, 그때의 나는 뭐가 그리 초조하고 두려웠는지 그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고, 결국 생각해낸 것이 피자였던 것이다. 당시 피자헛은 거의 최고 주가를 달리는 피자 프랜차이즈였고, 직원에게 부탁하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는 이벤트도 있었다. 내 기분을 풀어주려 엄마는 생일도 아닌 나에게 고깔모자를 쓰게 하고는 갓 나온 피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웃지 못했다.
가슴은 쿵쾅쿵쾅. 혹시 엄마에게 구몬 선생님 전화가 오면 어떡하지. 헛걸음한 선생님이 돌아가는 길에 피자헛 유리창으로 날 보게 되진 않을까. 피자를 너무 빨리 먹어서 집에 돌아갔을 때 구몬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면? 혹시 엄마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빈아! 구몬 선생님 오시는 날 아이가? 퍼뜩 먹고 집에 가자!” 하면 큰일인데.
때문에 나는 피자가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시간을 끌어보려 깨작깨작 먹는 둥, 마는 둥했다. 대낮부터 졸라대서 온 피자 가게에서 제대로 먹질 못하니 엄마나 아버지나 답답하고 황당하실 법도 한데, 어쩐지 그날따라 두 분은 친절하셨다.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이리라. 그래서 구몬 선생님의 전화도 오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평소엔 좋아하지도 않던 피자 테두리를 꾸역꾸역 씹어 먹는 나를 타박하지도 않으셨던 것이리라. 오히려 그런 부모님의 다정한 모른 척 때문에, 세월이 지날수록 그날의 기억은 자꾸만 더 부끄러워져만 갔다. 그날 이후로도 종종 숙제를 미뤘던 기억은 있지만, 적어도 피자라든가 하는 핑계를 대진 않았던 것 같다. 내 생애 가장 부끄러웠던 피자의 맛이었다.
지금도 피자를 먹을 때면 예고도 없이 그날의 기억이 훅 날아든다. 이젠 우습기도 하고, 여전히 부끄럽기도 한 기억. 그날 이후로 20년이 지나는 동안 나도, 나의 피자 식성도 조금씩 변해왔다.
어릴 땐 토핑이 피자를 고르는 절대적 기준이었다. 어차피 동그란 반죽 위에 치즈 올리는 것까진 다 똑같으니, 결국 어떤 토핑이 더해지느냐에 따라 맛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것저것 토핑이 많이 들어간 ‘콤비네이션 피자’라든가 특유의 달콤 짭조름한 고기 맛이 일품인 ‘불고기 피자’, 크리스마스 때마다 봤던 영화 <나 홀로 집에>에 나오는 ‘페퍼로니 피자’ 같은 것들.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 한창 ‘시카고 피자’가 대유행을 하던 때, 비로소 치즈의 풍미에도 눈을 떴다. ‘아니 이렇게 많은 치즈를 느끼해서 어떻게 먹어?' 라던 내 의문은 첫 한 입에 치즈 녹듯 흘러내렸다. 물론 일반적인 피자에 비해 빨리 질려서 많이 먹기는 부담스러웠지만, 가끔 생각날 때마다 먹는 첫 한 입에서 느껴지는 치즈의 풍미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즈음부터 화덕 피자에도 눈을 떠서, 고르곤졸라 피자에 홀리기도 했다. 처음엔 약간 발 냄새(?) 같은 치즈 향이 당황스럽기도 해서 함께 주는 꿀을 가득 찍어 먹었는데 어느 순간 그 발 냄새가 향긋해지는 날이 왔다. 심지어는 ‘포 치즈 피자’처럼 다른 토핑은 전혀 없이 도우 위에 치즈만 가득한 피자를 찾아 먹게 되었을 때, 콤비네이션이나 불고기 피자만을 먹던 내가 어느덧 꽤 크긴 컸구나 하는 격세지감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광안리 근처의 ‘바트’라는 피자 가게에서 도우의 맛까지 깨우쳤다.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나의 필명인 Bart도 바로 이 피자 가게에서 따왔다.) 치즈, 소프레사타, 바트 레드, 바트 화이트의 4가지 피자를 판매 중인데 특히 토마토소스 베이스인 바트 레드가 별미다. 클래식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수제 토마토소스와 약간 건조한 듯 씹을수록 고소하고 쫀득한 식감이 입안에 퍼지는 도우까지. 이상하게도 가끔 생각나서 갈 때마다 문을 열지 않아서 몇 번을 헛걸음했는데도, 가게 입성(?)에 성공해 피자를 한 입 베어 물면 그 간의 아쉬움은 금세 사라진다.
그렇게 나이 서른 즈음이 되어서야 피자는 토핑, 치즈, 도우의 삼위일체라는 것을 알게 된 셈이다.
위클리 매거진 14회 차. 마지막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실상 음식 이야기는 이번 회가 마지막이다. 어쩌다 마지막 음식이 피자가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위클리 매거진 소개글과 프롤로그에도 적었듯이 ‘다 먹고 살진 못 해도, 잘 먹고살 순 있으니까’를 풀어내기에 적당한 음식이라는 생각은 든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다시 밝히자면, 나는 못 먹거나 안 먹는 음식이 많은 편식왕이다. 물론 좋아하는 음식 13개 정도를 고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먹을 줄 아는 음식이 한정적이긴 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편식이 ‘얼마 안 되는 음식들을 더 맛있고 의미 있게 먹을 수 있는 핸디캡’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다양한 음식의 맛을 알아가는 것은 편식왕인 내게 너무 더디고 힘든 일이지만, 하나의 음식을 오래 두고 먹으며 그 안에 담긴 여러 가지 맛을 알아가는 것은 자신 있었다. 피자 한 조각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20년 전의 기억으로 돌아간다거나, 다층적인 피자의 맛을 거쳐 온 내력을 되짚어보기 위해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는 과정 같은 것들 말이다.
혹시 오늘 피자에 맥주 한 잔, 어떠실지. 각자의 기억에 담긴 피자의 맛들을 되짚어보면서. 토핑과 치즈와 도우를 차근차근 맛보면서. 그러다 혹시 지금 이 글이 기억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