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그냥 좋아할 수 있는 것들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도 않은 사실이다. 나는 우유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유에 밥을 말아먹는다거나 해서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 만큼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본가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낼 때나, 독립해서 자취를 할 때나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냉장고에 우유가 준비되어 있는 정도. 다른 먹을거리를 살 땐 ‘원 플러스 원 행사’에 목숨 걸지 않으면서도, 우유만큼은 꼭 할인마트에서 두 팩짜리를 사는 정도. 여름 갈증에 냉수보다 차가운 우유를 먼저 찾는 정도. 팥빙수에 얼음보다 우유를 더 많이 부어 먹는 정도. 딱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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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는 여러모로 활용하기 좋다. 쿠키나 빵을 먹을 때, 우유와 함께 먹으면 특유의 고소한 향이 풍부해지고 식감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 인스턴트 분말 수프도 물보다는 우유에 타야 진한 맛이 나고, 라면에도 우유를 조금 넣어 끓이면 맛이 부드러워지고 속 쓰림도 덜하다. 요즘처럼 갑자기 겨울이 찾아와 감기라도 걸리면, 감기약을 챙겨 먹는 일만큼이나 뜨겁게 데운 우유에 꿀을 타서 마시는 일도 중요하다. 영양도 고루 담겨 있고, 맛도 다양하니 도저히 싫어할 수가 없다. 유당불내증이 있다든가, 우유 특유의 비린내에 민감해 피치 못하게 우유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세상에, 안타까워라. 아니 잠깐만, 편식왕인 내가 할 소리는 아닌가.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우유를 좋아했다. 특히 중학생이 되고서는 우유를 많이 마셔야 키가 큰다는 속설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몇 달 사이에 거의 10cm 가까이 키가 컸던 터라, 우유와 함께 이 기세를 몰아가 보자는 심산이었다. 아침마다 콘플레이크를 우유에 말아먹었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우유 급식은 아주 유용한 우유 공급처였다. 반에 꼭 한두 명씩은 우유를 안 먹는 친구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의 우유까지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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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도 열심히 했다.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고, 배워야 할 주제보다 엄석대의 육체미에 감명을 받아 헬스장을 다녔다. 방과 후 활동으로 유도를 배웠고, 허구한 날 친구들과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축구를 해댔다. 중학교 1학년 때 170cm 즈음이던 키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1cm씩 자랐다. 노력에 비해 굉장히 더딘 성장 속도였지만, ‘그래, 1년에 1cm씩만 꾸준히 자라면 180cm 정도는 되겠지.’ 하는 안일한 기대를 품었다. 중학교 졸업과 함께 키가 멈출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키 순서로 번호를 정했던 당시, 중학교 1학년 때 38명 중 34번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는 15번으로 밀려났다. 나만 빼고 다들 쑥쑥 잘만 자랐다. 이놈들, 도대체 우유를 얼마나 마신 거야.
흔히 키를 결정짓는 데에 유전적 요인은 20~30% 뿐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성장 과정에서의 식사, 운동 등등 후천적 요인이다. 내 아버지의 키는 170cm 후반, 엄마의 키는 (짐작컨대) 150cm 중반 정도. 병무청에서 실시한 신체검사 당시 내 키가 173cm였으니 철딱서니 없이 부모님 탓을 해보자면, 아버지보다는 엄마가 나의 중키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셈인데 오히려 키에 관해 타박을 주는 건 늘,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 입장에서 성인이 되도록 편식이 심한 아들이(심지어 편식을 고칠 생각도 별로 없고, 더 나아가 편식으로 글까지 써대는 아들이) 키 타령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얄밉고 황당하겠는가. 없는 형편에 그래도 자식 먹이려고 이런저런 음식들을 차려줘도 늘 먹는 것만 먹어대던 아들놈이 이제 와서 키 타령이라니.
3년쯤 전이었던가. 날씨가 화창한 일요일 오전에 가족들과 거실에 앉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보고 있었다. 전날 엄마가 사 온 식빵을 우유에 적셔 먹으면서, 나는 “그렇게 우유를 많이 마셨는데, 왜 키가 안 컸을까?”라고 혼잣말을 뱉었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엄마는 “그러니까, 어? 배구나 농구나 뭐 그런 위로 뛰는 운동을 해야지. 맨날 땅에 붙은 공만 보면서 뽈뽈 뛰어 댕기는 축구를 하니까 키가 안 크지.”라며 촌철살인을 날렸다. 엄마, 축구 선수 중에서도 키 큰 선수 많은데. 크라우치는 2m가 넘는데. 헤딩할 땐 나도 점프하는데…
“편식을 하니까 키가 안 크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엄마가 던진, 전혀 예상 밖의 축구 얘기에 나는 마시던 우유를 물끄러미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우유 네 탓이 아니야. 내 탓이지.
입대할 때만 해도 ‘군대 가서 키가 자란 이야기’에 희망을 걸기도 했는데, 서른 즈음부턴 자연스레 내 키를 받아들이게 됐다. 키가 큰 편인 여자 친구도 이제는 “너는 키가 큰 게 안 어울려. 그냥 지금 키가 딱이야.”라며 위로인지 놀림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사람들은 어떤 보상이나 유용함을 바라며 무엇인가에 열중하곤 한다. 원하는 몸매가 되길 바라며 운동을 하고, 지식과 교양이 풍성해지길 바라며 책을 읽는다. 아주 어릴 적에 나는 담임 선생님께서 찍어주시는 '참 잘했어요' 도장 때문에 일기를 공들여 쓰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좋아하는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어떤 보상, 어떤 유용함도 필요 없어진다. 굳이 육체미 때문이 아니라도 운동을 하는 것이 좋고, 굳이 지적 성장을 하지 않아도 그저 글을 읽는 것이 좋은 순간처럼. 이제 남들에게 보여주고 칭찬받기 위한 일기가 아니라, 하루하루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 그저 좋아서 쓰는 일기처럼.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태도에는 어느 정도 순진무구하고 맹목적인 구석이 있고, 때로 사람은 바로 그런 구석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도 하는 셈이다.
중학생 때부터 거의 10년 가까이 내게 우유는 ‘내 키를 키워줄 묘약’이었다. '큰 키'라는 보상을 바라며 우유에 열중했다. 결과적으로 내 키는 173cm에서 멈췄고, 바라던 보상도 끝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우유를 마신다. 맛있어서 마신다. 굳이 내게 뭘 해주지 않아도, 그냥 내가 좋아하니까 마신다. 오히려 키에 연연하던 그 시절보다, 지금의 우유 맛이 훨씬 더 좋다. 서른에 이르러 우유를 마신다는 건, 보상을 바라지 않고 좋아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것 아닐까. 이른 새벽 출근길, 커피 우유로 아침을 때우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유를 닮은 것들이 앞으로 더 늘었으면 좋겠다고. 이유 없이 좋아할 수 있는 물건, 기억, 그리고 그런 사람까지.